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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여름날 (37/85)

제37화. 여름날2022.03.07.

16548718846592.jpg“뭐? 그런 농담은 하지도 마.”

도아는 황당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정색했다.

16548718846596.jpg“그럼 뭔데요? 왜 둘이 만났는데? 언니가 먼저 보자고 한 거예요?”

16548718846592.jpg“주혜 너 화났어? 왜 이렇게 날이 서 있고 그래.”

평소의 귀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자신을 극도로 경계하는 동생이 낯설었다. 그녀는 이윽고 손등을 토닥이며 달래려는 도아의 손을 툭 밀치며 울분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16548718846596.jpg“언니, 제가 우진 씨 좋아하는 거 눈치 못 챘어요?”

16548718846592.jpg“뭐……?”

그래서 화가 났구나. 주혜의 행동의 원인을 알고 나니 도아의 얼굴에 한층 수심이 깊어졌다.

16548718846592.jpg“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확실하게 말해준 적 없잖아. 그리고 워낙 이성 친구들이랑 잘 지내니 반신반의하고 있었어.”

주혜는 붙임성이 좋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가깝게 지냈다. 회사 근처에 사는 남자 동기들과 단둘이 영화를 보고, 휴일에 스스럼없이 불러내는 경우도 많았다.

16548718846596.jpg“그럼 저한테 먼저 물어봤으면 됐잖아요.”

이게 뭔 억지인지. 본인들 편한 대로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모습에 머리가 지끈거려왔지만, 겨우겨우 평정심을 유지했다. 우진과 주혜가 자신을 화나게 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싶었다. 얼굴이 달아올라 있는 주혜를 잠잠히 바라보던 도아가 착잡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16548718846592.jpg“우진 씨가 나한테 사적인 연락을 자주 했고, 난 그만해달라고 부탁하러 나온 거야. 지금 네 마음을 알게 돼서 상황이 좀 우스워졌지만 그게 끝이야.”

16548718846596.jpg“…….”

16548718846592.jpg“주혜 네가 우진 씨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고, 내가 도와주겠다고 팔 걷어붙이고 응원하다가 배신한 것도 아니야.”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16548718846592.jpg“또 앞으로도 우진 씨랑 잘해볼 맘 없으니 내가 너한테 사과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고 생각해. 지금 화난 마음은 이해하지만, 괜히 나한테 짜증 내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주혜는 눈살을 찌푸린 채 바닥만 응시할 뿐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담담하게 말했지만, 동생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얼마간 정적 속에서 대답을 기다린 도아는 별다른 해결점이 나올 것 같지 않자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오늘은 주혜가 감정이 복받친 것 같으니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카페는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쟁반 위에 휴지와 컵을 담는 도아의 움직임이 끝날 무렵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48718846596.jpg“내가……. 너무 흥분했었나 봐요.”

도아의 시선이 미세하게 들썩거리는 작고 동그란 어깨에서 멈췄다.

16548718846592.jpg“아냐. 괜찮아. 이제 네 맘 알았으니 나도 괜히 엮이지 않도록 더 조심할게.”

웃음도 울음도 많은 아이였다. 자신보다 체구가 작은 그녀는 울 때 꼭 어린아이 같았다. 나도 너처럼 이렇게 다 말하면, 쏟아내면 마음이 편해질까. 자신이 저렇게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솔직히 말하는 장면을 조심스럽게 상상했다. 비서를 냉랭하게 바라보는 시우의 얼굴만 떠오를 뿐이었다. 선선히 웃어주는 모습을 이제는 꽤 많이 보았음에도 자신을 다정하게 달래는 모습은 생경했다. 안 되지. 지금이 딱 좋아. 욕심내면 안 돼. 대표님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감정을 드러내니 조심해야지. 바들거리는 등을 토닥이던 도아는 주혜에게 티슈를 가져다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덩그러니 앉은 주혜가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으며 도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밝은 갈색 머리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16548718846596.jpg“짜증 나. 지가 뭔데.”

삐뚤어진 입매에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6548718877179.jpg‘주혜가 예뻐서 친구들도 다 예뻐.’

늘 들어왔던 말이었다. 도아 또한 성격 좋고, 예쁘고. 곁에 두기 참 좋았다. 하지만 조금 거슬릴 때도 있었다.

16548718846596.jpg“면접장에서도, 교육 때도, 지금도…….”

함께 들어간 면접에서 도아는 주혜가 답변하지 못했던 공통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건 제가 우물쭈물하는 동안 할 말을 미리 생각해둔 덕분이었을 것이었다. 교육을 받는 게 능숙했던 건 중고 신입사원이기에 가능했을 것이고. 전략팀에 들어간 것 역시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그녀를 추켜세웠다. 주혜는 그런 도아에게 충분히 잘 대해줬다고 확신했다. 예쁘다, 너무 잘한다, 우리 도아 언니 최고다.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해 주고 속상해할 때 위로도 해 주고 회식 때도 챙겨줬다. 비서실로 갔으면, 거기서 얌전히나 있지.

16548718846596.jpg“왜 우진 씨까지 넘보려고 하는 거야?”

언제부터 일이 꼬인 걸까. 도아가 비서실에서 얼마나 고생하는지 너무 궁금해서 조르고 졸라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마침 우진이 그 약속에 흥미를 보였고 홀린 듯이 그를 초대했다. 다행히 도아는 상무의 전화를 받고 우진이 올 때쯤 자리까지 빠져주었다. 대화를 나누니 서로 잘 통하고 재미있어서 새벽까지 그를 붙잡으며 놀았다. 하지만 그날도, 그 이후에도 우진이 꺼내는 이야기에 도아가 어렴풋이 깃들어 있었다는 것을 최근 들어 느끼던 참이었다. 앵두 같은 입술로 손톱의 거스러미를 톡 뜯어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지금 가지는 질투의 감정은 더이상 귀엽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뭐?

16548718846596.jpg“이도아를 싫어하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잖아?”

혼잣말하며 훌쩍이는 주혜의 어깨 옆으로 도아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16548718846592.jpg“자. 티슈. 좀 진정됐어?”

도둑질이라도 하다 걸린 듯 밝은 갈색 눈이 댕그랗게 커졌다.

16548718846592.jpg“왜 이렇게 놀래?”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자리에 앉은 도아는 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리며 한쪽 어깨로 모았다. 적당히 광택이 도는 실크 소재의 라운드 블라우스는 도아의 피부와 잘 어울렸다. 저 모습이 예뻐 보였나? 잠시 바깥을 보던 도아는 자신을 유심히 살피는 시선을 알아차리고 가볍게 웃어 보였다. 밤갈색 눈동자가 진중하고 상냥해 보였다. 이어 부드럽게 휘어지는 입매까지. 주혜는 자신의 것과 도아의 것을 비교하며 유심히 관찰했다. 심도 있는 탐구의 결과는 단순했다. 역시 짜증 나. 손에 들린 휴지를 바짝 움켜쥐며 한 번 더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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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기예보에서는 이번 더위만 지나가면 갈바람이 불 것이라 예고했다. 메일함을 확인하던 도아가 자료를 인쇄하기 위해 비서실로 향했다. 햇빛이 진한 오후였다.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시선을 보내던 그녀는 녹음이 푸르른 정원에 선선한 모습으로 서 있는 시우를 발견하곤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오전에 조경사가 다녀갔는데, 그가 했던 조언을 참고삼아 식물들을 조금 더 살피기 위해 나온 듯했다. 도아는 인쇄를 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비서실에서 물티슈를 챙겨 들고 정원으로 향했다. 유리문을 밀자 훅, 뜨거운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태양 볕이 무게라도 지닌 듯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 찐득한 여름날의 무게 속에서 시우가 뿌리는 물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허공에 작은 무지개를 그렸다. 심란한 마음을 놀리기라도 하듯 한가롭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흙과 나무를 만지고 직접 물을 주는 모습은 더는 낯설지 않았다. 비서가 정원으로 나온 지도 모르고 있는 대표를 향해 다가갈수록 저도 모르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태평해 보이는 그의 등이 얄미워지려고까지 했다.

16548718846592.jpg“한시우.”

어차피 바람 소리 때문에 들릴 리 없으니 작게 입을 벌려 속삭였다.

16548718846592.jpg“대표님.”

두 걸음. 그 정도의 거리가 되었을 때 이름 뒤에 이어지는 호칭을 덧붙였다. 이름을 부를 땐 마음이 아리고, 호칭을 부를 땐 멀어지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 순간, 호스 헤드를 쥐고 있는 단단한 손이 자신의 머리 쪽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이른 봄, 물을 뒤집어썼던 장면이 빠르게 겹쳐지고 온몸을 휘감았던 차가운 물줄기의 감각이 오소소 되살아났다. 도아는 본능적으로 숨을 흡 참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야 속에서 산란한 물줄기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16548718905314.jpg“도아 씨.”

어정쩡한 침묵 사이로 눈꺼풀을 올렸을 때 시선에 들어온 건 물기 먹은 뿌연 허공이 아닌 시우의 얼굴이었다.

16548718905314.jpg“나왔으면 불러야지. 또 물맞으면 어쩌려고.”

시우가 설핏 웃으며 호스 헤드를 달칵 잠그고는 나긋하게 말했다.

16548718846592.jpg“하하. 그러게요.”

도아는 긴장감이 깃들었던 몸을 반듯하게 펴고, 손부채질하며 민망함을 달랬다. 그는 알았다. 그녀가 다시는 물에 맞을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물을 줄 때면 늘 떠오르는 도아의 모습은 몇 달이 흘러도 선명했고, 혹시라도 같은 실수를 할까 늘 조심하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을 상대방이 알 리 없었다. 정작 고개를 돌렸을 때 제 눈앞에 실체가 있었던 적은 없었음에도 습관처럼 확인했다. 그래서 지금 마주하고 서 있는 도아의 모습이 환영처럼 더 아름다웠고, 그녀의 주위만 생생하게 요동쳤다. 나무 그늘 사이로 스며든 햇빛이 여름의 오후를 청량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16548718905314.jpg“왜 나왔어?”

16548718846592.jpg“물티슈 드리려고 나왔습니다. 옷에 묻으실까 봐.”

16548718905314.jpg“여기다 두고 어서 들어가. 날이 더워.”

도아는 서늘하게 건네는 권유에 물티슈를 더욱 꽉 움켜쥐었다.

16548718846592.jpg“그늘 때문에 하나도 안 덥습니다. 저도 여기 있겠습니다.”

16548718905314.jpg“이 비서님. 벌써 이마에 땀 맺혔습니다.”

지그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던 시우가 고개를 느리게 내렸다.

16548718846592.jpg“진짜 안 더운데요.”

도아는 더위에 약한 자신의 피부를 원망하면서 태평스럽게 대꾸했다.

16548718905314.jpg“내가 그렇게 보고 싶으면 비서실에 앉아서 구경해. 거기서도 잘 보이잖아.”

16548718846592.jpg“네? 하하. 대표님도 참, 농담도.”

곁가지를 매만지며 넌지시 건넨 농담에 도아의 뺨이 붉은빛으로 슬그머니 물들어 갔다. 그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더이상 들어가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여기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무심히 그의 뒤를 지키던 도아는 흔들거리는 나뭇잎들을 보다가 문득 자신도 이제 나무 이름을 제법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6548718846592.jpg“대표님. 저 여기 있는 나무 종류들 이제 꽤 많이 아는데 제가 맞춰볼까요?”

16548718905314.jpg“도아 씨. 내가 업무 분장에 나와 있는 일들만 하면 된다고 했을 텐데.”

16548718846592.jpg“아. 제가 며칠 전에 추가했습니다. 나무사랑회 한시우 대표님 비서라면 나무 정도는 알아봐야죠.”

16548718905314.jpg“나무…… 뭐?”

16548718846592.jpg“보세요. 저것부터 말해볼게요.”

못마땅해하는 대표의 잔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고는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키며 나무 이름과 특징을 말했다. 대부분 정확히 알고 있었으나 틀리는 것도 있었다.

16548718846592.jpg“이건 귀룽나무이고, 저건 블루바드입니다. 블루바드는 프랑스어로 큰 가로수길이라는 뜻이고요. 어, 이건……. 소나무?”

16548718905314.jpg“구상나무.”

수분 입자와 노란 햇살 속에 노근 노근 울려 퍼지는 도아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어떤 음악보다 기분이 좋아지는 소리였다. 좋아하는 여자의 목소리에 홀려버린 얼빠진 남자 덕분에 뽑혀야 했던 잡초도, 잘려나가야 했던 나뭇가지도 너그러이 살아남은 한적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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