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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이 정도로? (42/85)

제42화. 이 정도로?2022.03.25.

시우의 눈썹이 어그러졌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그다음에서야 생각이란 게 돌아갈 정도로 놀랐다.

16548719747459.jpg“뭐가 있다고?”

16548719747464.jpg“소개팅이요.”

계산 없이 되묻는 질문에 도아는 마른 입술을 살짝 깨문 뒤 더 정확하게 발음했다. 고요한 정적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데스크 뒤쪽에 자리 잡은 키 큰 식물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와중에도 시우는 미동조차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흘 전, 도아가 했던 고백은 어릴 적부터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벽마저 일순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진실한 행동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이렇게 빠르게 마음을 접는 것이 가능하다? 관심의 정도가 깊지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토록 미련 없이? 자신이 아무리 차갑게 대해도 부르면 돌아봐 주고 결국엔 먼저 다가와 주는 비서였다. 고백에 거절했다고 매정하게 마음을 끊어내지 못할 걸 알았다. 결국, 도아가 제 상처를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결론 내린 시우는 제법 여유로운 태도로 되물었다.

16548719747459.jpg“어디서?”

16548719747464.jpg“저희 동네에서요.”

16548719747459.jpg“몇 시에?”

16548719747464.jpg“저녁에요.”

16548719747459.jpg“사람을 소개받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16548719747464.jpg“어제 친구가 잡아줬습니다.”

또랑또랑하게 나오는 대답에 결국 또다시 후덥지근한 침묵이 이어졌다. 시우는 평소와 같은 무감한 태도로 비서를 응시했다. 그 모습에 기가 눌리고 싶지 않아 도아는 더 힘주어 고개를 치켜들었다. 잘하고 있는 걸까. 소개팅은 좀 너무 갔나? 심장이 작고 빠르게 뛰었다. 거짓말하는 건 익숙하지 않은데, 시우와 일하면서 철면피가 레벨업이라도 한 건지 오늘은 너무나도 그럴싸하게 술술 나와 무서울 지경이었다. 괜스레 어렵게 쌓아 올린 사이만 틀어지게 되는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도 일었다.

16548719747464.jpg‘혹시 모르니깐, 다시 고백할까?’

16548719747498.jpg‘미쳤어? 이미 고백했는데, 뭘 또 해? 대놓고 소개팅도 하고, 관심을 끊어버려.’

16548719747464.jpg‘진짜 끝나면?’

16548719747498.jpg‘도아야. 그렇게 끝날 사이면, 네가 매달려도 절대 안 이어져.’

친구가 해 주었던 말이 맞았다. 다시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거절만 되풀이될 것이 분명했다. 다른 남자도 만나겠다 하고, 시답잖은 부탁도 하고, 차갑게 거절도 하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할 작정이었다. 자신의 태도에 황당해해도 좋고, 질투라도 하면 더 좋고. 정공법이 안 통하니 이렇게라도 덤벼야 했다. 도아가 햇빛이 어리어 있는 시선을 검은 눈동자에 똑바로 꽂았다.

16548719747459.jpg‘이렇게 욕만 하지 말고 한번 가지고도 놀아보지 그랬어.’

16548719747459.jpg‘가지고 놀아도 될 텐데?’

시우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떠올렸다. 대표님. 제가 열심히 가지고 놀아볼게요. 꼬셔볼게요. 질투 나게 해볼게요. 저를 봐줘요. 그 과정에서 자신이 마음고생 한 것에 십 분의 일이라도 느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정말 정말 얄미운 사람 같으니라고. 아마 이렇게 막힘없이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 것은, 그런 제 간절함이 만들어낸 초인적인 임기응변의 힘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신경을 쓰는 건지 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태도를 취하던 시우가 몸을 의자에 기대며 가볍게 물었다.

16548719747459.jpg“도아 씨. 저번 주만 해도 분명 다른 마음이었던 걸로 아는데.”

16548719747464.jpg“네. 하지만 대표님은 바로 거절하셨죠. 솔직하게 말씀드려야 다음 주 일정에서 빼주실 것 같아서 보고 드린 겁니다.”

16548719747459.jpg“언제부터 연애에 관심이 있었는지?”

도아는 확고한 표정으로 눈을 맞추자 시우가 선선하게 되물었다.

16548719747464.jpg“그런 것까지 말씀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제 연애사에 더는 시간 낭비 안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회의실 세팅을 해야 해서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도아는 네게는 감정 따윈 남아 있지 않는다는 듯, 깔끔하게 대화를 마무리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면 잘했어. 자기애 가득 찬 칭찬으로 마음을 달래며 몸을 돌렸다. 첫날 근무할 때보다 더 긴장되고 속이 울렁였다. 이런 소심한 저항이 효과가 있을까. 불안한 마음을 당당한 걸음걸이로 애써 감추었다. 도아가 닫아버린 문을 바라보며 시우는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인상 쓴 미모의 남자, 곧은 자세, 아침 빛이 가볍게 내려앉은 잎사귀들. 그림처럼 우아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불만 가득한 눈동자와 손등에 자리 잡은 핏줄이 성난 듯 선명했다. 지난밤, 비서와의 관계를 정의 내리는 중에 이런 변수는 없었다. 더이브에 다른 남자와 함께 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말라버린 가슴에 누가 번개라도 떨어트린 듯 온몸이 뜨겁고 불쾌했다. 결국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넓은 보폭으로 걸어 나갔다. ** 인원이 몇 명이었더라. 세팅해야 하는 파일명이 뭐였지. 아름아름 생각을 더듬으며 불도 켜지 않은 회의실로 들어왔을 때, 뒤에서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48719747459.jpg“도아 씨.”

인기척에 흠칫 놀란 도아가 몸을 돌리자 복도 불빛에 인영만 선명하게 도드라진 채 서 있는 시우가 보였다.

16548719747464.jpg“대표님?”

제 앞으로 성큼 다가온 그를 올려다보며 도아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16548719747459.jpg“취소하는 게 어때.”

시우는 어둠 속에 표정을 숨긴 채 조용히 권유했다.

16548719747464.jpg“네? 어떤 걸……?”

생각지도 못한 내용에 설핏 인상을 쓰던 표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당황스러움으로 번졌다.

16548719747464.jpg“소개팅 말씀하시는 거세요? 지금 그 말 하려고 따라 나오신 거세요?”

16548719747459.jpg“그래. 다음 주는 중요한 일정이야. 대표가 하는 말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그렇게 나가버리는 비서가 어디 있지?”

16548719747464.jpg“저번 주에 체크했을 때는 혼자 간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의전팀이랑 홍보팀에서 동행할 거라며…….”

비서는 대표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16548719747459.jpg“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적인 일 때문에 회사 일을 뒷전에 두면 쓰겠어?”

도아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딱히 감정에 쏠려 비서를 쫓아온 사람 같지는 않았다. 진짜 중요한 업무인가 싶어 죄송함이 불현듯 스쳤다. 감정싸움에 치중하느라 일을 바르게 보지 못한 게 못내 부끄러웠다.

16548719747464.jpg“네. 그럼 시간 조정해서 대표님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16548719747459.jpg“기어코 하시겠다?”

담백할 줄 알았던 상대방의 대답은 예상보다 지저분했다.

16548719747464.jpg“대표님. 이건 제 개인적인 일입니다. 상관하지 마세요.”

16548719747459.jpg“업무에 지장 있게 하지 말라고 했을 뿐이야.”

16548719747464.jpg“그건 제가 알아서 잘하겠습니다. 저랑 만나는 건 싫고, 소개팅하는 건 거슬리세요? 희망 고문하세요?”

도아가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잠시 망설이다, 주먹을 말아 쥐며 말했다.

16548719747459.jpg“하. 희망 고문? 내가 그딴 짓이나 하는 사람으로 보여?”

16548719747464.jpg“네. 다분히 그래 보입니다.”

처음엔 자신만 보면 그렇게 긴장하더니 이제는 아주 할 말 다 하는 비서의 모습에. 또 그것에 휘말려 자리를 박차고 나온 자신의 모습에 비소가 서렸다. 시우가 한 발자국 도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둠 속에 마주한 둘 사이로 키스를 했던 날만큼이나 밀착된 긴장감이 풍겨왔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에 고정되자 도아는 흠칫 놀라며 다급하게 눈동자를 바깥으로 굴렸다.

16548719747459.jpg“다른 건 괜찮아도 그런 오해는 사고 싶지 않은데.”

작게 전하는 내용은 깃털이 움직이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시우의 그림자 안에 갇혀 있는 기분에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어색해지는 듯했다. 이 넓은 층에 이 사람과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의식돼 입안은 타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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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송하다고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적막한 고요 너머로 저벅저벅 사람들의 걸음 소리가 웅웅 퍼져왔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잠시 눈동자를 보냈던 시우가 다시 도아에게 집중했다.

16548719747459.jpg“도아 씨. 로비 쪽 문이 왜 열려있지?”

16548719747464.jpg“앗, 그게…….”

도아는 그제야 회의에 참석할 직원들을 위해 보안키를 해제하고 복도 문을 열어놨던 것이 생각났다. 아마 오늘 참석자 중 몇 명이 미리 준비하기 위해 시간보다 일찍 올라온 듯했다. 회의실에서 불도 안 켜고 단둘이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짧은 신입사원 생활이었지만 한국지점을 맡은 젊은 대표를 향한 직원들의 관심이 과하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정작 한시우는 그런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도아는 비서로서 그게 늘 거슬렸다.

16548719747464.jpg“대표님. 어쩌죠. 여기는 너무 어둡고……. 거기에 단둘이 있었고…….”

16548719747459.jpg“지금 그게 중요해?”

16548719747464.jpg“그럼 뭐가 중요하죠?”

짧게 골머리를 앓는 사이 어느새 발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협조적이지 않은 시우를 향해 도아가 결심한 듯 돌렸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16548719747464.jpg“제가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표는 작은 염려가 담긴 눈빛으로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는 비서를 바라보았다.

16548719747498.jpg“어? 비서실에 도아 씨 없네? 오랜만에 얼굴 보려고 했는데.”

16548719747498.jpg“그러게. 우리 막내 사원 잘하고 있나.”

터벅터벅 걸어오는 발걸음과 직원들의 대화 소리가 이제 회의실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혀끝으로 입술을 핥던 도아는 준비가 되었다는 듯 눈썹까지 내리며 입을 열었다.

16548719747464.jpg“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음부터는 실수 안 하도록 주의하겠습니다.”

16548719747459.jpg“뭐?”

뭘 잘하나 했더니,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에게 혼날 때 매일 하던 대답을 내뱉고 있었다. 문밖까지 들리도록 소리를 적당히 조절하며 말하는 것이 아주 수준급이었다. 저렇게 연기를 잘하는 걸 보니, 자신이 그동안 가늠했던 것보다 꽤나 심도 있는 열연을 해왔다는 건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대표의 등 뒤로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직원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도아는 시우의 몸체를 방패 삼아 얼굴을 숨긴 채 빨리 이 연극에 동참하라며 입을 뻐끔거렸다. 협조를 안 하면 다시는 보지 않을 기세로 연신 눈치를 주는 폼이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16548719747464.jpg“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우가 대꾸를 안 하자 혼자서라도 끝내보겠다며 원망의 눈길을 담아 한마디 더 꺼냈다. 냉엄해 보이기까지 한 이 명령에 시우는 기꺼이 동참해 주기로 했다. 마음에 없는 말하는 거야 이 여자 앞에서는 전문분야이니.

16548719747459.jpg“이도아 씨. 일 처리 이딴 식으로 할겁니까?”

16548719747464.jpg“네? 죄, 죄송합니다.”

16548719747459.jpg“다음부터는 정신 똑바로 차려요.”

16548719747464.jpg“네. 알겠습니다.”

16548719747459.jpg“앞으로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고. 거슬리니.”

시우가 서늘한 목소리로 경고하고는 몸을 틀었다. 눈치를 보느라 차마 회의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직원들이 쭈뼛거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가벼운 끄덕임으로 인사에 응한 시우가 집무실로 들어가자 직원들은 도아에게 가까이 왔다.

16548719747498.jpg“괜찮아?”

16548719747464.jpg“아. 네! 괜찮습니다. 대리님, 준비하러 오신 거죠? 도와드릴게요.”

연기였는데. 오랜만에 듣는 서늘한 목소리에 몸이 움찔거렸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시우의 목소리가 더는 차갑지도, 무섭지도 않아졌던 것을 새삼 깨달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긴장감이 지나자, 불현듯 새로운 사실이 고개를 내밀었다. 진짜 왜 나온 거지? 겨우 소개팅 이야기 한 번에 지금 회의실까지 오고, 그런 생각 하지 말라며 경고까지 한 건가? 겨우 이 정도로? 한시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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