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그만해2022.03.28.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낮 동안 힘들어하던 나뭇잎도 이제는 싱그러움을 유지했다.
“대표님. 수행 기사 면접자분 응접실로 안내했습니다.”
근무 중인 면접자의 상황을 고려해 제법 늦은 시간에 면접 일정이 잡혔다. 문을 열고 보고하는 비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걸어가는 대표의 모양새가 아주 뾰족했다. 회의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도아는 반듯하던 자세를 풀고 등받이에 힘없이 툭, 몸을 기대었다.
“하, 그다음에 할 일이 뭐였지.”
4호점 오픈이 가까워지며 비서실도 함께 바빠졌다. 도아는 애꿎은 대표실 문만 흘겼다. 소개팅 이야기로 질투라도 하는가 싶더니 며칠이 지난 지금은 다시 원래의 한시우로 돌아왔다. 그는 차가웠지만 그래도 벚꽃잎이 흐드러지게 떨어지던 날의 기억 덕분에 견딜만했다. 도아는 텀블러에 담긴 찬물을 벌컥 마시는 것으로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업무에 집중했다. 면접은 별 탈 없이 끝났다. 시간이 꽤 흘렀을 무렵,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지는 와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대표실 번호인 것을 확인한 도아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수화기를 들었다. 눈동자가 잠시 시계를 향했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었다.
“네. 대표님.”
-오늘은 먼저 들어가도록 해.
“아닙니다. 저도 일이 많아서 남겠습니다.”
-그래, 그럼.
뚝. 매정하게 끊는 통화에 미간이 욱신거렸다. 아, 정말. 자신이 기억이 났기에 망정이지, 아무것도 몰랐으면 이런 태도에 또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싶었다. 진짜 그때 공원에서 쥐어박았어야 했는데. 비서는 대표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만큼 힘껏 수화기를 집어 던지듯 콱 내려놓았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 집무실 문이 열린 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부수려고?”
뚜벅뚜벅 프런트 데스크로 가까이 다가온 시우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낮은 목소리에 비서는 대답도 못 한 채 눈만 껌뻑였다.
“나중에 회계팀에 말해서 비서실 지출 못 하게 해야겠네. 이렇게 물건을 막 다뤄서야.”
“그게, 모기가 있어서요. 하하.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멋쩍어하며 엉거주춤 일어나자 하나로 묶은 머리가 어깨를 타고 스르르 떨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우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목소리 들으니 얼굴이 보고 싶어서. 도아의 하얀 두 뺨이 오늘따라 유난히 보드라워 보였다. 만지면 달큰한 꽃향기라도 날 것 같았다. 시우는 일렁이는 마음을 삼키기 위해 설핏 사무적인 표정을 지었다.
“저녁은?”
“저는 괜찮습니다. 메뉴 말씀하시면 준비하겠습니다.”
비서와 함께 식사하고 싶지만, 차마 같이 먹자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미련이 많은 사람이었나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정적은 길어졌다. 대표의 대답을 조용히 기다리던 비서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상체를 앞쪽으로 기울였다.
“대표님, 얼굴에 펜 자국이.”
“펜 자국? 아, 아까 통화할 때 묻었나.”
시우가 대수롭지 않게 오른쪽 뺨을 쓸며 대답했다. 도아는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귀여워 입 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쪽이 아니고.”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얼굴에 스리슬쩍 가져다 대었다. 저도 모르게 한 일이라고 마음에게 변명하려고 해도, 의지와 사심이 가득 담긴 행동이었다. 잠시 방심했던 시우는 갑작스럽게 볼을 매만지는 감촉에 움찔하며 손목을 잡아채었다.
“뭐 하는 거야.”
훅, 침투하듯 들어온 감각에 날을 세우며 불편한 티를 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엉뚱한 곳을 문지르셔서 닦아드리려고 그랬습니다.”
비서는 대표가 화낼 것쯤은 예상했다는 듯 재빠르게 사과했지만, 상대방은 여전히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회의실에서 비서의 연기력을 확인했던지라 죄송하다는 발언이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마지못해 고개도 끄덕였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
이어 혼잣말을 내뱉듯 작은 핀잔을 주었다.
“여기저기 다 만져놓고 뭘 새삼.”
비서는 자신이 차갑게 대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하고, 오히려 지나치게 의식하는 쪽은 고백받은 자신이었다. 그래서 다른 남자를 만날 건지. 이제 정말 아무렇지 않은지. 며칠 동안 구구절절 이어지던 유치한 잡념은 결국 유들유들한 형태로 튀어나왔다. 대표가 의도했든 아니든 그는 늘 비서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제가 뭘 다 만졌다고 그러세요? 대표님이야말로 다 만져놓고. 그날 일이라면 이제 저는 정말 아무렇지 않습니다.”
도아는 당황을 감추기 위해 더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손을 보니 회복이 빠른 편은 아닌 것 같은데.”
시우는 조용히 시선을 내려 나뭇가지에 긁혔던 도아의 손을 살폈다.
“아니요. 이건 누가 흉 진다고 밴드를 덕지덕지 붙여줘서 그런 거고요. 놔뒀으면 진작에 다 나았죠. 제가 회복이 빠릅니다. 그동안 대표님 꾸지람에 버틴 게 우연일까요?”
“칭찬이라도 해줘야 하나?
“아니요. 사양합니다.”
느긋한 놀림이었다. 우다다 말을 잇던 비서는 그에게 또 질세라 잡혀 있던 손을 힘주어 쏙 빼내 시우의 손을 직접 움켜쥐었다.
“이것 보세요. 저는 손을 잡아도 괜찮고.”
뒤이어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고,
“아까처럼 얼굴을 만져도.”
그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반듯하고 넓은 어깨에 양손을 사뿐 올렸다.
“어깨를 잡아도…… 괜…….”
당당하게 스킨쉽을 이어가던 도아는 어깨와 이어진 단단한 가슴 근육에 잠시 기가 죽어 말끝을 흐렸다. 천연덕스럽게 행동했지만, 손을 잡으니 정원에서 옷깃을 잡았던 순간이 스치고, 얼굴을 만지니 제주도에서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입을 맞추던 기억이 뒤섞였다. 어깨에 닿은 손끝의 감각이 생생하니, 옷 안쪽에 있는 반라의 모습까지 떠올라 숨이 턱 막혀왔다.
“도아 씨.”
얼굴이 붉어지려는 찰나, 시우가 도아의 이름을 부르며 먼저 한걸음 물러났다.
“도아 씨. 그만. 그만해.”
말하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후덥지근한 호흡이 도아의 콧잔등을 스치지 않았다면 그가 화가 났다고 믿었을 것이었다. 큰 손으로 얼굴을 가린 시우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틀었다.
“저녁은 됐으니 어서 일해.”
대표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비서에게 간결한 대답을 남기고는 몸을 돌렸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펜이 데구루루 굴러 바닥으로 톡 떨어졌다. 순식간에 단단하게 막혀버린 문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도아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저 넋이 나간 듯 동그란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펜 자국을 지워주겠다며 손을 뻗은 순간부터 문이 닫혀버린 지금까지 시우의 모든 행동이 천천히 재생되었다.
“……세상에.”
자신의 손길에 점점 당혹스럽게 변해가는 표정이 눈앞을 채웠다. 문틈으로 짧은 순간 목격했던 한껏 달아오른 그의 귓바퀴가 사진처럼 뇌리에 박혔다. 도아의 귀는 시우보다 한발 늦게, 물감 번지듯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갔다.
**
“이 비서님!”
사람이 없는 한적한 로비에 도아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도아의 얼굴은 여전히 달아올라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출입구 앞쪽에 귀엽게 미소지으며 서 있는 우진이 보였다.
“퇴근하세요? 아, 진짜 답장 한 번도 안 하실 줄 몰랐어요.”
개인적인 연락은 부담스럽다고 말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천연덕스러웠다. 주혜의 이야기까지 들은 터라 도아는 더이상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네. 안녕하세요.”
“귀는 왜 이렇게 빨개요?”
그녀가 자리를 피하고 싶어 멋쩍게 대하는 것을 알아차렸으면서도 우진은 계속 질문을 이어나갔다.
“아, 일하다가 열이 좀 받아서요.”
“대표님이 또 혼냈어요?”
“그냥 일이 잘 안 풀려서요. 제가 맨날 혼나는 줄 아세요?”
“하하. 힘들었으면 저 조금 있다가 퇴근이니 같이 술 한잔하려고 했죠. 이 비서님 술 취한 모습도 되게 예쁘던데.”
“우진 씨,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런 태도는 부담스러워요.”
우진의 강아지 같은 웃음을 보며 도아는 적당히 예의를 갖추어 거절의 의사를 다시 한번 밝혔다.
“알겠어요. 그냥 제 마음이 그렇다고요.”
“제가 도대체 왜 좋으세요?”
“와, 뭐죠. 이 자신감?”
“정말 궁금해서 그래요.”
능청스러운 태도에 도아가 눈을 찌푸리자 환하게 웃던 우진이 잠시 눈을 굴렸다.
“음. 예쁘니까요. 항상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이 다니잖아요.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다 이해해주고. 그냥 완벽해요.”
설명을 듣는 도아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이 사람이 진짜 자신을 잘못 알아도 단단히 잘못 알고 있구나 싶었다.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다.’니. 시우 앞에서 보인 추태들이 떠올랐다. 혼나고 나서 침착한 태도는 또 어떤가? 메모장에 대표를 열심히 흉봤다가 걸렸던 걸 차마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진 씨. 저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지금은 뭐가 씌신 것 같은데…….”
“하하.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으셔도 돼요. 굳이 설명해 주고 싶으면 같이 술 마시러 가요.”
“아뇨, 아뇨. 오늘은 진짜 피곤해서요. 저 말고 주혜랑 가세요. 두 분 친하잖아요.”
“음. 그러게요. 아쉬우니 연락해 봐야겠네요. 저번에 진짜 재밌었는데. 주혜 씨 머리에 벌레가 붙은 거예요. 엉엉 울면서 방방 뛰는데 너무 재밌어서 한참 웃었어요.”
“아!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것 같아요. 주혜 귀여웠겠어요.”
“네. 제가 안 도와주고 웃기만 했다고 삐져서 달래주느라 진땀뺐다니깐요?”
우진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대화창을 확인했다. 도아는 그의 얼굴에 살며시 스며들어 있는 미소를 관찰했다.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라고 말하는데, 저 사람은 어쩜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시우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다고 가정하니, 상상만으로 가슴이 욱신거렸다. 자신을 예쁘고 완벽한 사람으로 단정지어 바라보는 사람. 그의 마음을 함부로 단정지을 순 없지만, 우진의 감정은 좋아함이 아니라 호기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아가 그 속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는 사이 그가 고개를 들었다.
“주혜 씨는 나올 수 있다고 하네요. 그럼 이 비서님, 일단 오늘은 봐줄게요.”
어휴. 봐주긴 뭘 봐줘. 어린 게 진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 정도쯤은 티 내지 않고 넘길 수 있는 성격이었다. 본인도 모르게 욱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우 앞에서만 벌어지는 실수였다.
“그러게요. 다행이네요.”
“다음엔 꼭 같이 가요. 아 그거 아세요? 오늘 보안팀에서…….”
모처럼 도아와 만나 신이 난 우진이 다른 이야기를 꺼내려는 찰나, 비서실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집 도착하면 바로 연락하도록.]
시우의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