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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너무 늦었어요 (48/85)


제48화. 너무 늦었어요
2022.04.15.


거실에 있던 사람은 굳이 숨거나 하지 않았었다. 그저 깜짝 이벤트 정도로 소파에서 편하게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

집에 들어온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만 보느라 저가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해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무엇보다 차갑기만 했던 친구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 어찌 된 일이냐고 당장 달려들어 캐묻고 싶었다.

개슴츠레 뜬 눈으로 상황을 살피던 월튼은 당황한 시우의 여자친구를 위해 일단 참기로 했다.

거실에 불이 들어오자 어째 분위기가 더 싸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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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튼 님?”

어색함에 더욱 크게 미소짓는 남자를 향해 비서가 더듬거리며 신원을 확인했다.

시우의 등 뒤에서 한 발짝 앞으로 나온 도아는 유명인이라도 만난 듯 호기심 어리게 눈동자를 빛냈다.

노란 금발에 파란 눈동자. 누가 봐도 외국인. 유창한 한국어. 시우의 집에 들어올 수 있는.

대표와 3년간 함께 일했던 비서임을 확신했다. 지금 비서의 머릿속에는 그가 남겨준 빛 같던 코멘트들이 머릿속에 넓게 펼쳐지고 있었다.

두 남녀를 번갈아 보던 월튼이 도아를 향해 몸을 돌려 새우곤 눈을 찡긋 추켜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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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압니까?”

자신을 먼저 알아본 여자를 향해 인간적인 호감도가 상승했다. 시우가 자신의 이야기를 여자친구에게 했구나 싶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얼굴 전체에 흐르는 능글맞은 웃음에 시우가 눈썹을 어그러트렸다. 제주도에서 식사할 때 천 회장이 지어 보인 미소와 매우 흡사했다.

그을음 같은 한숨을 내쉰 시우가 도아에게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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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튼 브라운이야. 누군지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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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압니다! 안녕하세요. 비서 이도아입니다.”

도아의 내적 친밀도는 최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시우의 고갯짓이 가리키는 쪽으로 공손하게 인사하자 월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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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

여자친구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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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비서입니다.”

눈을 가늘게 만들며 되묻는 질문에 도아가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깔끔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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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가 네 집에 왔다고?”

비서에게서 대표로 목표물을 바꾼 월튼이 고개를 재빠르게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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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수도 있지.”

자신이 아는 한시우는 개인 공간에 절대 회사 사람을 들어오게 할 인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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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걸까. 사실 대충 감이 왔지만, 천천히 알아가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일단 지금은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눈앞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완벽한 비서의 모습으로 도아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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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시우랑 함께 일했던 월튼입니다.”

시우만큼이나 기품있어 보이는 모습에 도아의 경계심은 한없이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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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대표님께서 이야기 해주셔서 알고 있습니다. 남겨주신 자료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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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저의 기쁨이죠. 우리 할 이야기도 많을 것 같은데 언제 셋이 저녁이나 먹을까요? 이번 달 말쯤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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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때 대표님 건강검진 일정이 있어서 그날만 피해서 잡으면 될 것 같습니다.”

시우는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대표실에서 처음 인사할 때는 가면 쓴 듯 웃었던 비서가 월튼과는 편안하게 이야기 나누는 모양새가 상당히 못마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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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검진?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잡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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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게.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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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빙그레 웃던 도아의 얼굴이 희끝 붉어졌다.

손을 잡고 졸랐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시우에게 도움을 청하듯 눈동자를 반짝였지만, 도와줄 마음이 없는 듯 고요하게 도아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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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가지런히 모아……. 기도하듯 간곡하게 부탁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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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런히 모아?”

시우의 비웃음이 귓불에 스쳤으나 도아는 애써 외면하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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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친구분도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월튼과 만나 반갑긴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어쩐지 지금 상황이 부끄럽기도 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그냥 함께 집에 들어온 것이 다일 뿐인데 나쁜 짓을 하다 들킨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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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마시고 가.”

홧홧해진 두 뺨을 지그시 누르며 도아가 한 발짝 물러나자 시우의 눈동자가 그 움직임을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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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얘기 편히 나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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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방해꾼인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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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아닙니다! 저는 짐만 올려드리려 온거예요.”

도아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손사래 쳤다. 뒷걸음질까지 치는 모습에 월튼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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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지금은 정신없으니 출근해서 다시 봅시다. 어차피 곧이니.”

그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전하자 도아의 눈동자가 일순 동그랗게 커졌다.

출근해서.

그 한마디에 마른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그 말을 곱씹으며 도망치듯 몸을 돌리자 굴곡진 머리가 함께 찰랑거렸다.

복도를 지나며 힐끔 오른편에 걸려있는 그림을 챙겨보았다. 소용돌이치는 제 속마음을 꼭 닮은, 현대 미술의 거장 마크 로이의 작품이라나 뭐라나.

도아가 다급하게 문을 닫는 소리가 메아리치듯 퍼졌다. 그 잔향이 잠잠해질 즘, 작은 웃음이 거실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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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야?”

시우는 히죽히죽거리는 월튼의 질문을 가볍게 무시하며 트레이에서 탄산수를 꺼내 한 모금 깊게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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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야말로 갑자기 왜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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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이벤트였지. 원래 전화하려고 했는데, 아니, 비밀번호가 똑같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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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더 있다 올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서도 시우의 시선은 현관 쪽을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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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문제 때문에 잠깐 왔어. 아내랑 딸은 여기 있고, 나는 다시 미국 갔다가 이주 뒤에 마무리하고 들어올 거야. 그리고 출근. 내 자리 마련해놔.”

목을 젖혀 물병을 비운 시우는 잠시 침묵했다. 친구가 내 이야기를 듣고는 있냐며 이름을 부르는 사이, 대리석 상판을 투툭 두드리던 손끝은 느려지다 결국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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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기다려. 1층까지 비서 좀 배웅해주고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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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배웅? 너 뭐야 진짜? 사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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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없긴. 아무 사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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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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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턱 끝을 내려 가볍게 끄덕인 시우가 넓은 보폭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 나갔다.

아무 사이 아닌. 그래도 괜찮은 사이.

최면을 걸듯 입술 새로 한 번 더 도아와의 관계를 정의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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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급하게 문을 닫고 나온 도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바닥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끔뻑끔뻑. 멍한 표정으로 눈꺼풀을 올렸다 내리기를 수차례. 낮은 숨소리가 어둠 속을 배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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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월튼이 한국으로 올 거야. 예정대로 오게 되면 전략팀으로 갈 수 있을 거야.’

가을은 짧지만 긴 계절이었다. 이제 막 여름이 끝났을 뿐인데 벌써 월튼이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직 정원에 낙엽이 지지도 않았는데.

잠시 잊고 있었던 순간이 바짝 다가왔음에, 마음이 쥐어짠 것처럼 조급해졌다.

햇빛이 길게 드리운 복도. 정결한 발걸음 소리. 마파람 맞으며 춤추던 잎사귀들. 콧등을 스치며 지나가는 시우의 풀잎 같은 향기. 그리고 이따금 보여주던 잔잔한 웃음.

누리던 것들과의 작별이 못내 아쉬웠다. 무엇보다 전략팀에 가게 된다면 고작해야 사원인 자신이 지금처럼 자주, 쉽게 시우를 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시우의 마음을 확실히 알았으니, 이번엔 끝까지 밀어 부쳐야 했다. 분명히 제 말 한마디에 동요하고 끌려다녔다.

하지만 소개팅을 어떻게 할 거냐 놀리듯 물어보던 얼굴이 떠올라 불안감이 아주 조금 양념질되었다.

다시 고백을 하자 마음먹으니 온몸이 정신없이 나부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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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만 해.’

시우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해야만 해. 도아는 온몸에 힘을 바짝 주며 전의를 다졌다.

지이이잉.

때마침 가방 속에서 느껴진 진동이 빠져나간 정신을 제자리로 끌어왔다.

고개를 살포시 들어 올리자 어두워졌던 복도의 불이 다시 환하게 들어왔다.

말끔한 공간을 훑은 도아가 전화를 받으며 엘리베이터 앞으로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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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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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행복부동산이에요.

마침, 왼쪽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다여섯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우르르 내렸다.

왁자지껄한 이야기 소리와 아이들이 뛰며 장난치는 웃음이 뒤섞여 조용하던 복도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하강 버튼을 누르려고 서둘러 걸음을 옮긴 도아는 위로 올라가는 표시를 보고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전화를 고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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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죄송해요. 지금 밖이라서. 누구라고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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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부동산이요.

도아는 한쪽 귀를 꾹 누르며 수화기 너머의 소리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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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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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연장하신다고 하셨죠? 집주인이 내일 시간 된다고 하는데 괜찮으세요?

승강기에서 내린 가족들이 집으로 들어가자 복도는 다시 고요해졌다. 도아의 목소리가 대리석 벽면을 타고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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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요? 네. 좋습니다. 퇴근하고 가면 일곱 시쯤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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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시요? 그때는 계약이 잡혀 있어서. 옆 카페에서 잠시 기다리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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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카페 말씀하시는 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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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거기요. 와이프가 하는 곳이라 부동산에서 왔다고 하면 음료 안 시켜도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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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아니에요. 저 커피 좋아해요. 커피 마시면서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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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감사하죠. 보증금 올라간 건 알고 계시죠? 계약서 새로 쓰니깐 도장이랑 신분증 챙겨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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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내일 뵐게요.”

올라간 보증금 생각에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도아는 통화를 마무리했다.

띵.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문이 쓱 열렸다. 도아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 몇 초 후 문이 닫혔다.

복도가 다시 어두워지자, 유리창 너머의 야경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그리고 아주 낮고 서늘한 시우의 음성이 공간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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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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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머리를 풀고, 남색 셔츠 원피스를 입은 도아가 정원에 서 있는 시우에게로 사뿐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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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안 계셔서 찾으러 나왔습니다.’

도아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볼 끝을 스쳤다. 시우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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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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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그냥……. 보고 싶어서요.’

수줍게 미소짓는 웃음에 심장이 쿵쾅쿵쾅 자맥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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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오늘 점심에 저랑 같이 식사하실래요?’

그리고 이어 비서가 어쩐 일로 함께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다. 마음이 동해 표정이 풀어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함께 가고 싶은 곳이야 많았다. 이왕이면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그는 다시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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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말고, 저녁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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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을 말씀하시는 거세요?’

곤란해하는 비서의 모습이 어쩐지 낯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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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선약 있어?’

대수롭지 않게 되묻는 질문에 도아가 곤란한 듯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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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게 오늘 남자 소개받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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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소리. 어차피 내가 공원에서 했던 말들 다 기억났잖아. 그냥 나 자극하려고 했던 말인 거 다 알아.’

시우가 비소를 머금자 도아의 눈썹이 미세하게 어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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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일이 기억나면, 제가 대표님을 계속 좋아해야 하나요?’

카랑카랑한 말대답에 둘 사이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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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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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표님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에요. 제 마음이 그리 깊은게 아니더라고요.’

대표가 황당해하며 한마디 내뱉자 비서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마음을 쏘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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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었어요. 대표님. 저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대표님이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매혹적인 입술에서 무섭디무서운 말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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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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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속이지 말았어야죠.’

단호한 목소리가 머리를 울리며 세상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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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아.’

시우가 변명하려 손을 뻗었을 때 그녀는 이미 등을 돌린 채 멀어지고 있었다.

도아를 잡기 위해 몸을 움직인 순간, 번쩍. 익숙한 천장이 시야를 채웠다.

꿈이었다.

쿵쿵쿵.

요란하던 심장은 여전히 진정하지 못 하고 있었다.

본능에 가깝게 상체를 일으킨 시우가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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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딴 꿈을.”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방 안에 조용히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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