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9화. 중요한 사람 (49/85)


제49화. 중요한 사람
2022.04.18.


생각보다 길어진 통화에 시우는 잠시 정원으로 나왔다. 바람을 타고 온 가을 나비 한 마리가 꽃을 찾아 바삐 움직였다.

16548721705837.jpg

“대표님.”

습관처럼 나무를 훑으며 지시를 전하던 그가 비서의 부름에 행동을 멈추었다.

보통 오후쯤 되면 기억도 안 나는 게 꿈 아닌가.

쓸데없이 선명하기만 한 꿈자리가 거슬렸다. 그냥 모든 게 거슬렸다.

별다른 대꾸 없이 나무들 사이에서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아가 입술을 달막이다 말을 이었다.

16548721705837.jpg

“자리에 안 계셔서 찾으러 나왔습니다.”

꿈과 똑같은 대사가 속을 긁었다.

비서는 오늘 온종일 대화가 끝나면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고, 눈을 맞추면 괜스레 시선을 옮겼다. 뭐가 저렇게 불편한지.

16548721705837.jpg

“전략팀장님 올라와서 회의실에서 대기 중입니다.”

16548721705852.jpg

“조금 이르지 않아?”

그러나 꿈과 똑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건 너무나 명확했다.

꿈속의 그녀는 물방울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정신을 흔들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얼른 용건만 말하고 들어가려는 목표가 너무나 확실해 보였다.

16548721705837.jpg

“네. 10분 정도 일찍 올라오셨습니다.”

16548721705852.jpg

“통화 마무리하고 간다고 전해.”

핸드폰을 들어 올리면서도 시선은 얼마간 도아의 두 뺨 위에서 머무르다 천천히 초록 잎으로 옮겨졌다.

시우가 시계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기울이자 매끈한 옆모습이 도드라졌다.

도아는 떨구었던 눈동자를 들어 올려 그 모습을 훔쳐보듯 응시했다.

예쁘기까지 한 속눈썹과 높은 콧대, 자신과 맞닿았던 입술. 분명 제 손으로 다 만졌던 것들임에도 그 생김새와 감각이 생경했다.

월튼이 곧 온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다급해진 도아는 가만히 있어도 손에서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빨리 고백을 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마음을 다시 전해야 하는데. 뭐라고 말하지?

밤새 대사까지 고민했던 도아는 부끄러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일단 자리를 뜨기로 결정했다.

16548721705837.jpg

“네……. 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것도 잊고 있던 비서는 급히 인사를 마치고 몸을 돌려 새웠다.

저번에는 불안감에 휩쓸려 급작스럽게 마음을 내뱉게 된 것이라 이렇게까지 떨릴지 몰랐다.

고백.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였다.

생각만으로 이미 고백이라도 한 듯 얼굴이 붉어졌다. 볼에서 시작된 열감이 등줄기를 타고 온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16548721705852.jpg

“도아 씨.”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물처럼 흐르는 목소리가 도아의 발목을 붙들었다. 로비로 이어진 정원의 문을 막 열려던 참이었다.

어느새 통화를 마친 시우가 성큼성큼 도아쪽으로 걸어왔다. 그 모습이 허공에 궤적을 만드는 맹금류 같아 가녀린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급한 대로 다시 허리를 세우며 슬그머니 웃었지만 이미 시우는 평소와 다른 비서의 행동을 흘러넘치도록 느끼고 있었다.

실수해도, 혼나도, 키스해도, 고백한 후에도. 비서가 오늘처럼 대놓고 자신과 있는 것이 불편하다 티 낸 적은 없었다.

16548721705852.jpg

“할 말 있어? 오늘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해?”

결국 가슴 한구석을 부벼대는 불안과 짜증을 견디지 못하고 시우가 먼저 물었다.

남자를 소개받겠다는 어이없는 비서의 이야기는 결국, 대표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 행동으로 결론지어졌었다. 적어도 자신의 머릿속에서는.

그 여유로움에 안일해져서, 어제저녁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저도 모르게 도아의 속을 살살 긁었다.

16548721705852.jpg

‘그래서 언젠데.’

16548721705837.jpg

‘정하고 있습니다.’

16548721705852.jpg

‘장소는 여전히 동네고?’

16548721705837.jpg

‘음. 아마도요? 더 이상은 노코멘트입니다.’

누가 봐도 거짓말하는 모양새였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인지 알면서도 당황하는 눈동자와 반응이 재미있어 계속 툭툭 실없는 말을 흘렸다.

그럼 그 통화는 도대체 뭐였을까.

도아를 배웅하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을 때 복도는 요란스러웠다. 그러나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고, 차분한 도아의 목소리가 공연장에 온 듯 아름답게 퍼졌다.

16548721705837.jpg

‘내일이요? 네. 좋습니다. 퇴근하고 가면 일곱 시쯤 될 것 같아요.’

16548721705837.jpg

‘하하. 아니에요. 저 커피 좋아해요. 커피 마시면서 기다릴게요.’

물론, 내용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지만.

그 장면이 생각났던 시우는 눈을 가늘게 만들어 비서를 응시했다. 꿈속에서 도아가 내뱉던 말들이 귓전에서 이명처럼 울렸다.

16548721705837.jpg

“제가요? 하하. 전혀 아닙니다.”

아니라고 말했지만, 분주한 눈동자와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의심만 증폭시켰다.

16548721705837.jpg

“대표님이야말로 오늘따라 피곤해 보이시는데 괜찮으신가요?”

다정하게 자신을 걱정하는 비서. 말간 시선과 단정한 음색이 꿈과는 사뭇 달랐다. 안심이 되면서도 눅눅하고 찜찜한 기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침 불어온 미적지근한 바람이 흙냄새를 풍겼다. 도아는 오늘따라 눈길이 가던 시우의 속눈썹에 작은 먼지가 붙은 것을 발견했다.

저번에 볼펜 자국을 지워줄 때는 제법 뻔뻔하게 잘 올라갔던 손이 오늘은 어쩐지 사시나무 떨 듯했다.

하루종일 대표를 피하기 바빴던 도아가 용기를 내 슬며시 손을 올리려던 찰나 그가 먼저 가볍게 눈가의 흙먼지를 털어냈다.

새벽 이슬비처럼 느리고 부드럽게 내리감은 눈매. 세세한 속눈썹 끝에 닿은 단단한 손끝.

잠시 넋을 놓았던 도아가 마른침을 부자연스럽게 삼키며 자신의 손을 등 뒤로 숨겼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시우가 건조하게 대답을 이었다.

16548721705852.jpg

“꿈자리가 별로라서 잠을 잘 못 잤어.”

16548721705837.jpg

“꿈이요? 귀신이라도 나왔나요?”

16548721705852.jpg

“아니.”

16548721705837.jpg

“그럼요?”

16548721705852.jpg

“중요한 사람.”

16548721705837.jpg

“그런데 왜 꿈자리가 별로예요? 좋은 꿈 아닌가요?”

도아가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자 시우가 안도인지 투정인지 알 수 없는 작은 한숨을 흘렸다.

16548721705852.jpg

“글쎄. 나랑 일하기 싫은가 봐.”

16548721705837.jpg

“꿈이잖아요. 꿈은 반대이니 걱정 마세요. 혹시 말씀해주시면 저도 일정 잡거나 할 때 더 신경 쓰겠습니다.”

엉뚱하지만 다정한 대답에 시우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16548721705852.jpg

“도아 씨.”

16548721705837.jpg

“네?”

16548721705852.jpg

“바보네.”

16548721705837.jpg

“네? 바보요?”

시우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도아가 미간 새를 좁혔다.

16548721705852.jpg

“난 회의실 갈 테니 일 봐. 로비에 누가 있으니 확인하고.”

비서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로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주혜가 잡지를 품에 꼭 끌어안고 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1654872181184.jpg

 

**

1층 로비 엘리베이터 앞에 선 주혜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밝은 갈색 머리나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을 발견하면 흠칫 놀라며 고개를 휙 돌렸다가 슬그머니 곁눈질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마침내 목표물을 발견했다. 들고 있던 잡지 뭉치를 가슴팍으로 꽉 모아 안고는 위풍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홍보팀에서는 잡지에 회사 광고나 기사가 실리면 해당 부분을 표시해 비서실에 전달하는데, 오늘은 주혜가 그 일을 담당했다.

1654872181185.jpg

“저, 대표님 비서실에 올라가야 해요.”

카랑하고 높은 목소리에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던 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탱글탱글한 두 뺨과 말똥한 연갈색 눈동자를 확인하고는 얼굴에 깃들었던 웃음을 지웠다.

16548721811857.jpg

“네. 보안키 찍어드릴게요.”

평소였다면 주혜를 발견하자마자 장난을 쳤을 텐데, 오늘은 사무적인 투로 대답했다.

자신의 고백에 이렇게까지 태도가 돌변할 줄 몰랐던 주혜는 억울한 기분이 들어 눈가가 촉촉해졌다. 작은 입술을 앙다물고, 우진의 옆에 멀뚱히 자리잡았다.

입술을 삐쭉 옆으로 밀며 주혜를 슬그머니 내려본 우진은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왜 이러지. 왜 이렇게 신경 쓰이지.

여자들이 고백하면, 감정이 없어도 곧잘 사귀곤 했다. 하지만 술집에서 주혜가 울던 순간에는 쉽게 만나보자 대답이 안 나왔다.

도아를 좋아하고 있어서? 주혜에게 상처를 줄까 봐?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습관적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바람에 깔끔했던 머리가 너저분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복잡한 건 딱 질색인데.

우진이 혼자 생각을 곱씹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15층에 올라갈 수 있도록 보안키를 대준 후 자리로 돌아갔다.

16548721811857.jpg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직원들에게 건네는 사무적인 인사로 오랜만에 가지게 된 만남은 끝났다.

우우웅.

엘리베이터의 기계음이 조용히 울리는 가운데, 잡지를 쥔 주혜의 손이 잘게 떨렸다. 촉촉해졌던 눈망울에는 이미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괜히 말했다 싶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서러웠다. 도대체 그날 왜 그랬을까 후회하며 상황을 곱씹다 보니 도아가 떠올랐다. 이도아가 했던 말을 순수하게 따라서 이렇게 된 것이 분명했다.

1654872181185.jpg

“짜증나.”

커다란 눈물방울을 훔친 주혜는 주머니에서 거울을 꺼내 비장하게 얼굴의 상태를 확인했다.

로비에서 호출하면 이도아가 나오겠지? 그럼 던지듯이 주고 그냥 와버릴 거야. 손이라도 베이면 좋겠는데.

훌쩍이며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것으로 적을 만날 준비를 마친 주혜가 눈동자에 힘을 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느릿하게 열리며 그림 같은 조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밝은 빛 때문에 눈꺼풀을 급히 내렸던 주혜가 불만 섞인 말은 내뱉으며 다시 초점을 잡았다.

이곳에는 오늘을 포함해 세 번째 올라온 것이었다. 그때마다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상쾌한 느낌을 받았었다.

오늘도 역시나 그럴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파란 하늘과 초록 잎들이 넘실대는 정원에 도아와 시우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푸른 정원에 바람이 불며 도아의 머릿결이 흔들거렸다. 분위기가 좋아 보여 짜증이 나려는 찰나 도아가 대표의 얼굴 쪽으로 손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1654872181185.jpg

“뭐야? 지금 얼굴 만지려고?”

주혜가 놀라 혼자 중얼거렸다.

이어 도아도 아차 싶었는지 급히 손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복숭아처럼 물들어 있는 두 뺨과 달보드레한 눈빛. 뒤이어 대표와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또 혼이라도 났는지 결국 비서는 인상을 픽 썼다.

시우가 떠나고, 뒤늦게 주혜를 발견한 도아가 가볍게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지껏 보았던 도아의 다른 모습.

주혜는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가슴이 콩콩콩 요동쳤다.

대표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대표를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비서.

머릿속에서 도아가 새롭게 정의 내려졌다.

**

도아가 고개를 빼꼼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공인중개사와의 약속에 늦지 않으려면 이제 그만 퇴근을 해야 했다.

하지만, 평소대로라면 30분밖에 안 걸리던 보고가 1시간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택시를 타는 것으로 귀가 방법을 바꾼 도아는 얌전히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 간절함을 알아준 듯, 회의실 문이 열렸다. 시우는 집무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몇 가지 지시사항을 더 전했다.

피곤함이 완연한 전략팀장이 비서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6548721811877.jpg

“도아 씨, 대표님 무슨 일 있어요?”

16548721705837.jpg

“아니요. 특별한 일 없으세요. 좀 피곤하시다 고는 하셨어요.”

16548721811877.jpg

“그래? 그래서 더 날카로운가?”

16548721705837.jpg

“그러세요? 저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던데.”

이제 하도 혼나서 익숙해 져버렸구나. 동정심이 불쑥 솟아난 전략팀장이 프런트 데스크에 힘없이 몸을 기댔다.

16548721811877.jpg

“에휴. 힘들겠어. 아 참 오늘 이야기 들었는데, 이제 곧 전에 있던 월튼 비서님이 온다면서?”

16548721705837.jpg

“아……. 네.”

16548721811877.jpg

“사실 미국 본사에서 사람 온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몇몇 직원들은 대표님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수군거렸거든. 완전 헛소문이었지 뭐. 이렇게 일 처리가 칼같은데 본사에서 왜 바꾸겠어.”

16548721705837.jpg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하하. 일하는 게 철저하긴 하시죠.”

16548721811877.jpg

“그럼 도아 씨도 이제 내려오는 건가?”

이어지는 질문에 단정하게 웃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

16548721705837.jpg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곧 지시가 있으실 것 같아요.”

16548721811877.jpg

“그래. 그동안 고생했어. 돌아오면 내가 진짜 잘 챙겨줄게요.”

16548721705837.jpg

“네. 감사합니다. 팀장님.”

전략팀장이 인자한 미소를 남기고 떠나자 도아는 닫혀 있는 집무실 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16548721705837.jpg

“오늘 날카로운가?”

고개를 갸우뚱거려도 무엇이 그의 기분을 안 좋게 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16548721840035.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