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내가 아닌 다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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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내가 아닌 다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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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내가 아닌 다른 사람
2022.04.22.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카페 사장이 건넨 커피잔을 받아든 도아는 창가에 자리 잡았다.
도자기 장식품과 주먹만 한 다육식물들이 많은 가게였다. 유리창 바깥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행인과 차들이 보였다.
사람들을 관찰하던 도아는 꽃무늬 쿠션에 몸을 기대고 비서실 핸드폰을 열었다.
이미 다 외워 두었지만 한 번 더 일정을 확인하고, 메일도 놓친 게 있는지 체크했다.
그것들이 끝나자 이번에는 메모장을 열었다. 짧게 기록했던 것 중 필요 없는 것들을 쓱쓱 옆으로 밀며 삭제했다.
‘비서실 진짜 매뉴얼’이라며 호기롭게 적어놓았던 파일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제주도 요트 위에서 시우에 말했었다. 아무 일 없이 지내고 싶다고.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미련 없이 지워버렸다.
그렇게 다 끝난 줄 알았지만 음큼한 글자를 지운다고 마음이 비워지는 게 아니었다.
처음엔 포로롱 새싹 같던 작은 마음은 정원의 식물들처럼 영차영차 자라났다. 그러다가 어느 날 꽃봉오리가 생기고 점점 부풀어 오르다 팡, 만개하며 마음속을 향기로 가득 채웠다.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꽃은 줄기를 잘라내도 시드는 순간까지 향기를 내뿜는다. 억지로 끊으면 더 지독하게 마음을 채울 것이 분명했다.
다급해진 마음에, 다시 고백하려고 마음먹었더니 어쩐지 긴장이 돼 오늘 하루 동안 시우를 피했다. 이렇게 누구를 좋아하게 된 것이 처음이라 모든 감정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도아의 앞에 불쑥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안녕하세요.”
얼굴을 확인한 도아는 자세를 바로 고치며 반갑게 웃었다.
“잘 지내셨어요?”
“네. 그럼요.”
자연스럽게 맞은 편에 앉은 남자는 도아와 비슷한 또래였다. 부모님 덕분에 벌써 건물주의 삶을 사는 젊은 집주인.
저번에 계약서 쓸 때도 제 현실과 비교되어 씁쓸했었는데, 역시 오랜만에 봐도 똑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 제가 요즘 일하느라 바빠서. 갑자기 약속을 잡았는데 마침 시간이 되셔서 다행입니다.”
중개사님이 너 골프 치다가 오는 거라고 말해줬어. 부럽다. 너의 인생이. 도아가 속으로 또래 임대인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네. 마침 오늘 시간이 됐어요.”
“돈 벌기가 참 쉽지 않죠? 힘들게 모아도 아까워서 못쓰겠어요.”
“하하. 네.”
로고가 너무 잘 보여 그가 쓰고 걸친 것들이 명품 브랜드임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우렁찬 소리로 존재감을 뽐내던 스포츠카도 빼놓으면 섭섭했다.
도아는 입 끝을 가볍게 올리며 그 어이없는 말에 적당히 웃어주었다.
‘마음에도 없는 웃음 지을 때 눈썹을 가볍게 찡그려. 목소리도 미세하게 올라가고.’
그러다 불현듯 들리는 시우의 목소리에 급하게 이마를 짚어 제 눈썹을 확인했다.
“지내면서 불편한 건 없으셨어요?”
“네. 정말 편하게 지내고 있어요.”
눈썹 끝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쓸며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그럼 다행이고요. 옆집은 보일러가 안 된다고 몇 번 연락 왔었어요.”
“아! 저도 작년에 가끔 안 돌아간다고 느낀 적 있었어요. 이제 추워지니깐 한번 확인해 볼게요.”
“기다리느라 지루하죠? 이거 드시면서 있으세요. 곧 끝난다고 해요.”
생각보다 대기시간이 길어지자, 카페 사장이 수제 쿠키 두 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양해를 구했다.
“아아. 감사합니다. 사장님.”
쿠키를 받아든 남자가 직접 만든 것인지, 무슨 맛이 인기가 많은지 등의 질문을 하며 관심을 보였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도아는 내려놓았던 비서실 핸드폰을 살며시 들어 화면을 확인했다.
아직 일하고 있으려나. 계약 끝나고 바로 전화해 봐야지. 커피라도 사서 다시 갈까.
먼저 퇴근한 것이 후회되었다. 시우가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결코 아닌데.
자리에서 일어날 마음이 없어 보이는 보스를 향해 조심스럽게 먼저 퇴근해 봐도 되냐고 말을 꺼냈다.
시우는 그저 무감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다 대수롭지 않게 이유를 물었다.
전날 소개팅은 언제 할 것이냐며 살살 약 올리는 모습이 겹쳐 얄밉기도 했다. 정원에서 바보라고 말한 건 또 어떻고?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냥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
가지고 놀아보겠다는 거창한 계획이 아니었다. 한 번 더 물어보면 바로 대답을 해주려고 했는데, 그는 귀찮다는 듯 대화를 끝냈다.
가보라는 대답이 평소보다 더 건조해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그냥 집 계약 때문에 가봐야 한다고 처음부터 솔직히 말할 걸 그랬나.
도아는 짧게 고민하다 시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살며시 고개 내민 샛별을 보며, 마른 입술에 커피를 적셨다.
**
정원에 있는 나뭇잎이 시우를 에워쌌다. 단정하게 손을 들어 여름 동안 길게 뻗어 나온 나뭇가지를 매만졌다.
봄에 난 새잎 줄기가 단단히 굳어 있었다. 이 시기에 가지치기하지 않으면 나무의 모양은 흐트러져 보기 좋지 않았다.
해가 넘어가기 직전, 세상은 붉은빛이었다.
일광욕을 즐기듯 햇빛을 담뿍 뒤집어쓴 잎들을 천천히 살폈다. 서쪽으로 부드럽게 시선을 옮기자,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매끈하게 들어오는 빛이 눈을 찔렀다.
시우는 이만 벤치에 가볍게 앉았다. 뒷목을 지그시 누르는 손이 한없이 무거웠다.
제 마음 때문이 아니고, 빛 때문에 나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 변명에 헛웃음을 치며 주머니 속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조금 높게 들어 올리자 하늘에 박힌 샛별처럼 반짝였다. 도아의 눈동자 같기도 했다.
‘대표님. 제가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먼저 퇴근해봐도 될까요.’
바람을 타고 넘실대는 초록 물결 사이로 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비서가 대표실로 들어왔다.
중요한 약속.
조심스러움이 잔뜩 묻어 있는 그 요청에 온몸이 굳고 생각이 멈췄다. 온종일 속을 뒤집고 뒤틀던 가정이 현실이 되었다.
대표가 보내는 무감한 표정에 비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으로 되받아쳤다. 그러다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아마 혹시 저가 놓친 실수가 있나 되새김질을 하는 모양이었다.
‘왜?’
‘그게……. 약속이 있어서요.’
온종일 제 눈치를 보는 모습도 어제의 대화도 다 거슬렸지만 지금 내뱉는 저 말이 제일 마음에 안 들었다.
무슨 약속?
그냥 평소처럼 물어보면 되는 단순한 일이었다.
하지만 돌아올 대답을 떠올리니 사뭇 짜증이 났다. 어쩌면 두렵다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날 거냐며 터질 듯 튀어나오려는 말을 입술을 짓눌러 막았다.
폭풍처럼 요란하던 마음을 겨우 다시 덮었다 싶었는데. 다시 꿈틀꿈틀 기어 나오는 제 욕망이 싫었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끝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아마 저 스스로는 절대 도아를 놓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알았어. 가봐.’
그래서 쫓아내듯 밀어내 버렸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툭.
어둑한 생각은 길게 자란 나뭇잎이 시우의 얼굴을 건드리며 시기적절하게 멈췄다.
생각이 길어지는 사이, 어느새 하늘은 감청색으로 물들고 잿빛 구름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위를 향하던 눈동자를 사선으로 떨어트려 자신의 뺨을 찌른 잎사귀를 관찰했다.
더이상 봄에 보았던 녀석이 아니다. 반지르르 윤이 돌던 어린잎은 사라지고 넓고 짙은 청록색 잎사귀가 되었다.
색이 변하고 크기도 커져서 어쩐지 조금 음침해진 것 같기도 했다. 거미 다리처럼 길게 뻗어 나온 나뭇가지와 잘 어울렸다.
부드럽게 나무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어느 순간 고요해졌다. 침전물이 모두 가라앉아 버린 잠잠한 연못 같은 침묵이었다.
내가 이런 무의미한 고민을 하는 사이 너는 다른 사람과 웃을 텐데.
다른 사람이 네 이름을 부르고,
다른 사람이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사람이 너의 뺨을 어루만지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몇 가지 가정을 내보던 시우는 얼굴을 구기며 눈을 질끈 감았다.
바람을 들이마시면 차가운 공기가 마음을 게우고 그 옆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평범한 삶.
숨통을 조여오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힘들어 포기했었다. 하루하루 죽어가다 조용히 끝나기를 바랐었다.
포기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기에.
도아에게 휩쓸려 갔더라도 결국 또다시 이딴 생각을 했겠지.
지이이잉.
마음을 다시 덮으려는데 진동 소리가 그것을 저지했다.
[대표님. 늦게까지 일하실 예정인가요? 이따가 커피 사 갈까요?]
이도아. 너는 정말이지. 짧디짧은 내용일 뿐인데 마음이 일렁였다.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차량 소리가 어스름을 타고 옥상까지 올라왔다. 높은 곳을 휘젓고 다니는 바람이 요란스럽게 옷자락을 건드렸다.
그녀가 꼭 자신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것 같았다. 덮으면 들추고, 피하면 붙들고.
그래서 지금. 또 다시. 백열의 섬광이 머릿속을 가득 매우는 것만 같았다.
너가 다른 사람과 있는 것이 너무 싫다.
손끝에 닿은 흙 알맹이가 유난히 까끌거렸다.
제주도 바다 위에서도, 도아가 고백해 오던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자신의 속을 긁어 대던 날에도 도아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사실 너무나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것이 지금 느끼는 솔직한 마음이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에 드리운 나무 그림자를 담았다.
‘내가 좋아하는 나뭇잎이 갈색으로 변했어요. 그런데 그것도 예뻐요.’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 늘어진 모양. 어린 시절 자신이 느꼈던 감정 그대로, 이건 이거대로 보기 좋았다.
어릴 적 자주 보러 갔던 커다란 고목의 가지를 누가 자른 적이 있던가.
꼭 가지를 잘라내야만 하는가. 이대로 두면, 둔 대로 아름답게 자랄 텐데.
마음을 꼭 자르거나, 덮어야만 할까. 그냥 두어도 좋지 않을까.
불조차 들어오지 않은 어둑한 정원 한가운데 드리워진 인영이 날카로웠다.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형형한 안광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잔잔해진 바람이 새까만 머릿카락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시우가 좋아하는 적당한 선선함과 세기의 바람이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다.
바람이 향기롭다. 나무들이 푸르고 환하다.
그런데 네가 없다. 네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지?
사막의 씨앗이 물웅덩이를 찾아내 뿌리를 내린 것처럼, 축축한 상념은 무서운 속도로 뻗어나갔다. 그럴수록 단 한 가지는 점점 더 명확하고 선명해졌다.
이도아.
왜 나는 그날 그런 기분이 들었을까. 왜 너만은 내 공간에 들어오는 게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을까. 왜 병원에서 너를 보고 안심이 되었을까.
영원할 것 같던 공허한 시간도, 부모님에게 붙들려 있는 자신의 미래도. 도아와 관련된 것들은 늘 범주 밖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이제 자신이 도아가 없으면 안된다는 걸 인정해버렸으니 괜찮아야만 했다.
정원의 한편이 눈에 밟혔다. 넘어진 도아의 눈동자에 밑동부터 요동치던 자신의 몸뚱아리. 제 마음을 무시할 수 있을 거란 건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자만이었다.
도아가 넘어졌던 곳에 눈길을 보내던 시우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보다 넓은 보폭으로 정원을 가로질러 나갔다.
하느적 거리는 구름 사이에 새초롬하게 떠오른 샛별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