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다 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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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화. 다 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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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화. 다 알면서
2022.04.25.
“어?”
갈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이번이 두 번째였다. 더이브 매장에서도 이렇게 느닷없이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때도 도아는 지금처럼 바로 대답을 내뱉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여기 있을 것 같아서.”
단정하고 차분한 목소리. 분명 그였다. 내려다보는 눈빛이 날카롭지만 진득해서 야릇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 왜?”
조금 전, 샛별을 보며 커피를 한 모금 삼켰던 도아는 건물의 불빛, 신호등, 가로수들을 무의미하게 감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개인이 서류와 분양 자료를 한가득 챙겨 들고 카페로 들어왔다. 전문가다운 꼼꼼한 설명을 곁들여 도장을 찍어야 하는 위치를 알려주었다.
10분만에 계약은 마무리되었고, 두 사람은 각자 귀가하기 위해 카페 문을 열고 나왔다.
‘바래다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가는 길이니 부담 갖지 마세요.’
생뚱맞은 친절에 도아가 그의 손이 향하는 곳을 살펴보았다. 아까와 다름없는 풍경 속에 노란색 스포츠카가 들어왔다. 주차되어 있는 차량을 쭉 훑고는 심드렁한 마음을 숨기며 다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그냥 좀 걷고 싶어서요. 마음은 고맙…….'
도아는 다시 한번 거절을 하기 위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마지막 눈길이 멈췄던 곳에서 불현듯 익숙한 것을 보았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깜빡이며 방금 보았던 장면을 되새김질하다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급히 돌린 시선 끝에 시우의 검은 차량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방을 잡고 있는 손끝에 힘이 풀릴까 세게 움켜쥐었다.
곧이어 차 문이 열리고 시우가 허리를 세우며 모습을 드러냈다. 여유로운 듯 시선을 끄는 움직임은 분명히 한시우였다. 도로 건너편에 있는 짙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호흡이 불안해졌다.
헛것이라고 애써 외면하는 사이 성큼성큼 그가 자신의 쪽으로 다가왔다. 군더더기 없는 걸음걸이로 조용하고, 매섭게.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시선을 허공으로 보냈던 도아가 다시 시우를 흘깃 보았다.
도아와 눈이 마주치자 여기 있을 것 같아서 왔다는 사람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말간 눈동자를 향했던 눈길이 선선히 남자에게로 옮겨갔다.
"볼일은 다 보셨습니까."
나지막하고 단정한 음색에 상대방이 꿀꺽 침을 삼켰다. 사치를 즐기는 남자였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사람이 함부로 해선 안 되는 종류의 사람이란 것을.
그가 겁먹은 강아지처럼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까딱 숙였다.
"아. 네! 저,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자신을 지켜보는 서늘한 눈빛이 굉장히 매섭게 느껴졌다. 남자친구가 있으면서 왜 말을 안 했냐 물어보려다 그냥 자리를 뜨는 것을 택했다.
급히 발걸음을 돌리는 집주인을 향해 도아가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그 내용에 잠시 의문을 품었던 남자는 보일러에 관해 이야기 나누었던 것이 떠올라 큰 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아! 알, 알겠습니다."
그 예의 바른 대화에 시우의 눈썹이 조용히 어그러졌다.
**
부산스러운 상황이 끝나고, 멀뚱히 서 있던 도아가 시우의 옆얼굴을 골똘히 새겨보다 빳빳한 소매 끝을 살며시 붙잡았다.
아주 작은 끌림일 뿐인데, 먼 곳을 바라보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했다.
도아는 익숙하지 않은 존재가 당황스러운 듯 속삭이듯 물었다.
"대표님. 여긴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진짜?"
"지나가다 봤어."
"그 말을 믿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글쎄."
뭔가 못마땅해 보이는 그 태도에 도아의 목소리는 결국 커졌다.
"그럼 그냥 보고 가지. 왜 굳이 내려서 심술이세요?"
"속이 뒤틀리는데, 참을 수가 있어야지."
"네……?"
도아가 무슨 말을 할지 입술을 딸막이는 사이, 시우가 먼저 채근하듯 물었다.
"기어코 하셨어?"
"뭐를요?"
너무도 이상한 질문에 도아의 눈이 어린아이처럼 커졌다.
"남자 소개받겠다던 약속. 지금 한 거 아니야?"
질투가 잔뜩 묻은 뜻밖의 내용에 얼굴이 붉어진 건 오히려 도아였다. 내려 깐 눈매는 조심스럽거나 부끄러워하는 낌새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도아가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쿨럭 내뱉었다.
"그건……!"
서둘러 변명하기 위해 고개를 치켜든 찰나, 카페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여럿 나왔다.
즐거운 웃음소리가 두 사람 주위로 퍼져나갔다.
행인들은 사랑싸움이라도 하는 듯한 흥미진진한 분위기에 관심 없는 척, 안 듣는 척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꿋꿋하게 말을 이으려던 도아는 일단 눈을 치켜뜨는 것으로 시간을 끌었다.
다시 거리가 한적해지기를 기다리는 바람과 다르게 지나가는 사람들은 하나둘 늘어만 갔다.
잘난 대표는 길가에 서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기도, 여유로워 보이기도 한 이상한 모양새에 도아는 눈을 샐긋 찡그렸다.
여기서 이렇게 있다가는 또 한시우한테 휘말리게 될 게 뻔했다.
비서는 꽃잎 같은 입술을 꽉 뭉개 닫으며 대표의 큰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그를 끌고 한적한 곳을 찾아 나섰다.
아귀힘이 몹시 연약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지만, 시우는 모든 것을 포기한 포로처럼 별다른 저항 없이 따라주었다.
제 감촉 안에 들어와 있는 시우의 단단한 손이 또다시 도아의 가슴을 콩콩 뛰게 했다. 이제 이것이 독감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명확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해서 여기까지 온 거라고?
당황스러움이 가시자 마음속에 요란스러운 떨림이 찾아와 저도 모르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찻길을, 골목을, 그 아래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니 키 작은 메밀꽃이 지천으로 핀 강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풀벌레 노래가 천변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그림자를 몇 개 지나 인적이 드문 곳이 마침내 나오자 도아가 새초롬하게 몸을 돌려세웠다.
"아니에요."
"아니라고?"
"저 오늘 원룸 계약연장 하는 날이라서 일찍 퇴근한 겁니다. 아까 그분은 집주인이고요!"
마음이 몹시도 떨리는 비서의 눈은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뭐?"
보잘것없이 끌려오던 와중에도 단정하던 그의 표정이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순간 흐트러졌다.
혼란스러웠다.
다른 사람에게 가버릴까 저급한 감정을 곱씹고, 곱씹어 여기까지 왔는데, 사랑에 빠져 얼빠진 오해를 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그럼 왜 처음부터 제대로 말 안 했어? 평소였다면 이유를 먼저 말했을 텐데?"
"그건……. 제 마음입니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관심 좀 끌어보려고 그랬어요.
대답하려니 너무 유치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도아는 다소 변덕스러운 대답을 선택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시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얼굴 붉히며 고백해 사람 난처하게 만들 땐 언제고, 이렇게 또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살살 가지고 논다. 앞에 서 있는 비서는 계산 따위 하지 않아도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타고난 계략 가인 듯했다.
그런데, 그 모습도 좋았다.
작아진 목소리와 함께 도아는 꽉 쥐고 있던 커다란 손을 슬그머니 놓아주었다. 하지만 이번엔 시우가 사냥감을 낚아채듯 덥석 가는 손을 그러쥐었다.
발가벗겨진 기분은 들꽃처럼 하늘거리는 도아의 모습을 눈에 담으니 허무하게 회복되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치부를 드러내도 기분이 좋은 법이니.
"그럼 왜 하지도 않을 소개팅을 자꾸 한다고 하실까. 비서님은."
엄지로 살살 도아의 손등을 문지르며 태연하게 눈동자를 맞추었다.
"할 겁니다!"
여유로운 태도에 도아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크게 외쳤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오는 말이 원망스러웠지만, 시우 앞에서는 자주 벌어지는 일이라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정말?"
한시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정원에 서 있으면 그곳에 주인 같고, 인파 속에 섞여 있으면 그곳의 주인공 같은. 권력에 익숙한. 좋게 말하면 완벽하고 나쁘게 말하면 오만한.
지금도 분명 질투에 눈이 멀어 여기까지 와놓고, 오히려 자신의 속을 긁었다. 그 모습이 너무 얄미웠다. 말아쥔 손안이 식은땀으로 가득 찼다.
"네! 왜요? 싫으시면, 싫다고 말씀하세요."
"……."
시우는 대답 대신 입 끝을 가볍게 올렸다.
도아의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따져 묻는 태도가 상당히 사나웠다. 그래 봐야 참새, 고양이, 병아리쯤이겠지만.
저 하찮은 성질머리가 이제는 폭군의 명령처럼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함부로 도아에게 화조차 낼 수 없는 스스로가 너무나 우스웠다.
"왜 대답을 못 하세요? 좋은 소리라도 하면, 또 마음이 풀어질까 봐 그러세요?"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판단을 내린 비서는 한걸음 바짝 다가왔다.
발끝의 움직임을 따라 초록 잎들이 나풀거렸다. 도아가 가까이 오자 그제야 이곳의 나무들이 아직 푸른빛으로 반짝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우가 아량을 베풀어준다는 듯 너그러운 눈빛으로 지그시 비서를 응시했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
익숙한 표정과 말투는 제주도에서 핸드폰을 쥔 채 미소짓던 대표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네?"
자신을 독 안에 든 쥐처럼 몰고 가던 그 상황이 떠올라 도아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마음이 풀어진다는 말. 딱 한 번 말했었는데. 술 취했어도 기억력이 좋네."
'……네가 너무 예뻐서, 내 마음이 풀어질까 봐 그러는 거야. 섭섭해도 어쩔 수 없어.'
"아니. 그게……."
시우의 차분한 표정에, 눈망울을 사납게 빚내던 도아가 머뭇거렸다.
반말하고, 성질내고, 고백까지 다 들었던 것을. 이제 와 기억났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시우의 마음을 알면서 모른 척 농락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제 손은 이미 단단하게 붙잡혀 있었다. 수갑이라도 찬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빼내려고 손목을 꿈틀거렸더니, 시우가 그 움직임을 알아채고 더 세게 손가락을 얽혔다.
"다 알면서. 재미 좀 보셨습니까. 비서님?"
사색이 된 도아와 다르게 생기가 도는 짓궂은 얼굴이 정적을 깨고 물었다.
"무슨,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비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단정한 미소를 만들었다. 인형처럼 보기 좋은 웃음이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물결처럼 일렁였다.
시우는 제 앞에 있는 인위적인 거짓 웃음을 차분하게 감상했다. 이건 이거대로 좋다는 생각으로 음미를 마치고는 쥐고 있던 손을 선선히 풀어주었다.
폭군은 갑자기 찾아온 해방감에 오히려 어리둥절해서 하는 모양새였다. 내려앉은 시우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의 손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식은땀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는 하얀 손바닥을 시우가 부드럽게 펼친 건 그때였다.
그리고 이어서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가 살포시 자리 잡았다.
동시에, 그것을 발견한 유리알 같은 눈동자도 동그랗게 커졌다.
내 목걸이.
도아가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였다.
"주인이 발견하고도 모른척해서 목걸이가 많이 서운했겠어. 안 그래?"
가녀린 어깨는 서서히 굳어가고, 손끝은 파르르 떨렸다.
다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
도아는 어느새 말라버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정적 속에 풀벌레 소리가 자신을 놀려대는 것만 같았다.
실망……. 했을까?
떨어진 시선 아래 닿아 있는 나무뿌리가 길게도 늘어져 있었다. 정원에서 마주했던 제 마음처럼.
"도아 씨."
목소리가 가을바람보다 차가웠다. 불현듯 물에 젖어 벌벌 떨던 제 모습이 떠올라 목덜미가 뻐근거렸다.
다정한 표정을 바라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은 무표정을 넘어선 경멸의 시선일지도 몰랐기에 그것이 조금 무서웠다.
"아. 이게. 어.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겨우 삐걱거리는 고개를 들어 올린 도아가 천천히 눈꺼풀을 위로 올렸다.
"왜 그렇게 긴장해."
몽롱한 시선이 초점을 잡자 바람에 나부끼는 눈길 끝에 시우가 가득 들어왔다. 꿈이라고 믿어질 정도로 다정한 눈빛과 목소리에 도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