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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달아요 (52/85)


제52화. 달아요
2022.04.29.


물 냄새도, 벌레 소리도, 풀꽃의 너울도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촘촘히 자라난 나뭇잎 사이로 얇은 달빛이 흘러내려 시우의 얼굴을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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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발견한 날이, 고백했던 날 맞지?”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사이 시우가 손바닥 위에서 잠자고 있는 목걸이를 톡 건드렸다. 작게 빛나는 알맹이가 데굴 구르며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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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 혹시 화나셨어요? 제가 기억나고 모른척해서?”

눈치를 보며 묻는 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메모를 읽었을 때도, 목걸이를 발견했을 때도, 이렇게 바보 같은 상황이 돼버린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자신이 도아에게 한없이 약해질 거란 걸 알았다. 그런데, 화났냐고?

정말 바보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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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화 안 났어.”

상대방의 선선한 대답에 도아가 안심한 듯 솜털 같은 한숨을 내쉬며 발그레 미소지었다.

달려들고 싶을 만큼 예뻤다.

시우가 눈길을 내려 낮게 핀 꽃들을 바라보았다. 여름날 비서실에서 있었던 일은 서로에게 상처만 남겼다.

고백하는 사람은 마음이 너덜너덜해졌을 것이고, 거절하는 자신 역시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감정은 이미 넘쳤지만, 굳이 크기를 가늠한다면 아마 여름날보다 더 깊고 넓어졌을 것이었다.

신이 멀리서 장난질을 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움조차 무의미한 시간이었다. 이토록 무력하게 삶을 보도록 만들었으면서, 왜 이제 와 소용될 거리를 던져주는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려 다시 도아를 마주했다.

시우가 다정했던 눈빛을 지우며, 담담한 표정으로 도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차가워진 시선과 다르게 무척이나 다정한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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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많이 힘들었어?”

시우의 목소리가 나직이 흘렀다. 따뜻한 손길은 나풀나풀 움직이는 깃털처럼 간지러웠다.

왜 자신의 결심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지고, 그렇다고 칼같이 차갑게 끊어내지도 못하는지. 이제는 확실히 알았다.

너와 이대로 멀어지는 것. 그것이 두려워서. 혼자 웅크리고 울던 그때만큼이나.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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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그때의 서운함이 울컥 솟아나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톡 쏘는 말투와는 달리 손끝이 스친 귓불은 장밋빛으로 물들어갔다.

다정하던 시우의 손길이 다시 잠잠히 멈췄다. 고요 속에서 서로의 숨소리가 부드럽게 얽혔다.

시우는 차가운 바람이 완연했던 봄의 초입을 떠올렸다. 도아를 보고 시선이 갔지만, 어차피 무의미한 감정일 뿐이라고 단정 지었던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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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답은 쉽게 하는 게 아닙니다.’

비서에게 했던 말인데 정작 새겨들어야 했던 건 자신이었다. 결국 감정은 넘쳐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달라질 건 없었다. 들키지만 않으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기에.

그러나 그 자만을 비웃기라도 하듯 결국 타오르는 성마른 감각에 취해 도아를 안았다.

사막처럼 건조한 내 삶에 끌어들일 수 없어 다급하게 멈췄지만, 그러면서도 울먹이며 다가온 고백에 바보처럼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나는 너를 상처만 입혔는데, 너는 끊임없이 나에게 따뜻한 무언가를 불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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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아프셔서 병원이 싫으실 수도 있겠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괜찮으실 거예요.’

괜찮을까. 정말 너의 말처럼.

사실은, 이제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우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호흡이 저답지 않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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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사귀면, 결국에는 네가 힘들어질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랬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잠잠한 투로 마음을 털어놨다. 시선 안에 도아를 가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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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래. 내 삶이 굉장히 건조하고, 삭막해. 그런 삶에 너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담담하게 전하는 이야기에 도아의 눈동자가 조금씩, 조금씩 흔들렸다.

시우의 그림자 안에 갇혀 있는 기분에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어렵다고 느꼈다.

지난번에도 그의 대답에 헛된 기대를 품었다가 상처를 입었다. 저 고요한 바다 같은 이야기의 끝이 칼같이 자신을 잘라내려는 이야기라면 정말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가 지금 전하는 내용이 새삼 슬프다고 느껴,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때는 시우는 결핍 따위는 없는 완벽한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그가 권력에 익숙하고, 때로는 오만함을 풍기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하지만 이따금 느껴지는 무기력한 이야기들은 그의 마음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상기시켰다.

하지만 그 모습까지 좋았다.

나는. 정말 괜찮은데. 그런 삶이라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은데.

손에 들려 있는 목걸이를 비틀어 쥐며 마른 입술을 꾹 눌렀다. 비서실에서 성급하게 고백했던 그날처럼 될까 봐 터져 나오는 마음을 필사적으로 눌렀다.

사실, 그가 전하는 이야기의 방향이 무엇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시우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을 어두운 눈동자에 가만히 담았다.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볼에 힘을 주는 모습.

생각해보면 저 표정도 늘 마음에 들었다.

뭐든지 열심히 하려는 네가, 차갑게 대해도 꿋꿋하게 버티던 네가, 이야기를 나누면 밝게 웃어주고, 투정 부리듯 되받아치는 모습의 네가.

모두 다 좋았다.

관심. 호감. 애정. 사랑.

무의미하던 것들이 이제는 유의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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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도아.”

덮으려고 해도, 끊어내려고 해도. 결국엔 도아를 찾을 것을 이제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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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제 못 참을 거 같아.”

웅크리고 있는 어린 자신도, 삭막하고 허로 한 지금의 자신도.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무척이나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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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싫다고 해도 이제 안 돼.”

느리게 올리는 눈꺼풀 위로 놀란 도아의 모습이 예쁘게도 담겨 있었다.

시우가 선선한 손으로 도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어린잎처럼 매끄럽고 생기 넘쳤다. 이어 자근자근 떨리는 성근 호흡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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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날 보고 있는 모습도, 아무 의미 없는 숨소리도 유혹처럼 느껴질 정도로 네가 아름다워.”

바람이 불며 도아의 향기가 시우를 향했다. 이제서야 바람이 더없이 향기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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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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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지금 저한테 고백하신 거예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도아의 얼굴이 한발 늦게 붉어졌다. 믿기 어렵다는 듯 침묵 속에서 눈을 수십 번 깜빡이고 난 후였다.

비서는 수줍게 미소짓는 대신 눈썹을 구기는 쪽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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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번엔 도아 씨가 거절하려고? 쌤통이라고 하면서?”

무슨 말이든 하려고 하는데 마음과 다르게 입술 끝만 떨릴 뿐이었다.

여유롭게 물어보는 태도가 조금 전 절절하게 마음을 털어놓았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분명 자신은 좋아한다 고백할 때 심장이 터질 것처럼 매서웠는데,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서, 그래서 더 믿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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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게 아니라…….”

굳어있는 입매를 겨우 달싹였다. 도아의 글썽이는 음성이 수줍게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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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제가 고백하려고 했는데. 이게 좀. 당황스러워서.”

전략팀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소식에 마음이 다급해진 건 비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상황에 굳이 내가 고백하려고 했다는 말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시우 앞에서는 왜 이렇게 헛소리만 하게 되는지.

아마 평생을 가도 고칠 수 없음이 분명했다.

인정머리 없는 입술이 내뱉은 말을 수습해야 하는 것은 도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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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또르르 눈알을 굴리는 비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시우가 미소를 담아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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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려는 사람이 그렇게 속을 긁어? 가지고 놀고 있던데.”

가지고 놀다니!

물론, 얄미운 마음에 그런 심술을 부리긴 했지만, 시우로 인해 마음고생 했던 것을 떠올리면 오히려 화내고 싶은 쪽은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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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뭘 얼마나 긁었다고! 대표님이 처음에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잊으셨어요?”

시우의 속 긁는 소리에 도아는 어깨를 앞으로 불쑥 들이밀며 다가왔다.

평화롭던 모래사장에 예고도 없이 몰아친 큰 파도 같은 모양새였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너울거림에 그녀를 그대로 안아버릴 것 같아,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말간 눈동자가 자꾸만 마음을 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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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나뭇잎 사이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비서의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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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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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자꾸 눈에 밟혀서, 아무리 애써도 지워지지 않아서 더 그랬어. 많이 후회하고 있어.”

도아의 가슴 속에서 시작된 진동이 천천히 여진처럼 몸 끝으로 퍼져나갔다.

그 떨림을 느꼈는지 시우는 가녀린 손끝을 더 다정하게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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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안해.”

무감하고, 차갑게 느껴지던 검은 눈동자가 더없이 깊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지치고 힘들었던 시간이 흔적도 없이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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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멘트도 준비했는데.”

마음을 가다듬은 도아는 이어 조심스럽게 한마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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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해 봐. 들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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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요. 창피해요.”

배시시 웃으며 투정 부리듯 말하는 도아를 보며 시우가 가볍게 입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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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싶어.”

고작해야 한마디였다. 듣고 싶다는 겨우 그 네 글자에 마음이 뒤죽박죽 꿈틀거렸다.

이번에는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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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도 밤에도 제 마음 안에 당신이 가득해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좋아해요. 만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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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처음 비서실에서 인사를 하던 날처럼 단정하고, 잘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시우는 장밋빛으로 붉게 물든 뺨을 바라보며 천천히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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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이번에도 거절하면 영영 저를 못 볼 줄 아세요.”

예상치 못한 고백의 마무리에 시우는 표정을 허무하게 풀며 웃어버렸다.

역시 눈앞의 비서는 타고난 계략가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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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협박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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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데요.”

맹수 사냥꾼에서 연약한 동물로 돌아온 도아가 삐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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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아 씨. 고백해본 적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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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정곡을 찔린 비서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시우가 흙길 위로 자박, 한 걸음 다가왔다. 달아오른 도아의 한쪽 뺨을 서늘한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이어 단정하게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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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은 이렇게.”

쪽.

서로의 숨결이 가까워지다 조심스럽게 맞닿았다.

가볍게 부딪혔던 입술은 달뜬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곧바로 다시 상대방을 찾았다.

호숫가의 잔잔한 물결 같던 움직임이 조금씩, 조금씩 더 깊게 서로를 향했다.

도아가 떨리는 손끝을 들어 올려 시우를 끌어안자, 바짝 붙은 서로의 체온을 타고 뜨겁게 달아오른 심장 소리가 전해졌다.

뒷목을 매만지는 차가운 손끝에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얽혀들었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섬세한 감촉 때문인지 바잡듯 숨이 가빠졌다.

뜨거워진 서로의 호흡이 겨우 멈추자, 도아가 촉촉한 눈빛으로 시우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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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요.”

속살거리는 목소리에 시우가 부드럽게 입 끝을 올렸다. 검지로 도아의 입술 결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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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나직한 대답에 도아도 양쪽 뺨 위로 붉은빛이 번졌다.

수줍은 숨소리 너머로, 흰 꽃 가득 핀 내리막길을 따라 도란도란 물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곧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시우는 다시 도아의 탐스러운 입술을 삼켰다.

도아는 기꺼이 그 욕심에 응해주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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