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내가 아주 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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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내가 아주 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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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내가 아주 급해
2022.05.02.
비서실 책상에 앉아 스케줄을 정리하던 도아가 허리를 세우며 기지개를 켰다.
창문 너머의 하늘이 유난히 높고 파랬다. 바람 속에서 색이 변한 나뭇잎이 하느작거렸다.
만질만질하게 스며든 햇빛 위로 몇 주 전 밤의 기억이 떠오르자 새삼스럽게 얼굴이 달아 올랐다. 떠놓은 물을 급히 마시는 것으로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켰다.
띠릭.
그런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로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복도에 퍼졌다. 외부일정을 마친 시우의 걸음 소리가 단정하고 일정하게 바닥을 두드렸다.
수줍은 한 줌의 숨을 내뱉은 도아가 빼꼼 나와 시우를 향해 반갑게 미소지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습관처럼 정원을 향했던 시선은 따뜻함을 그대로 유지한 채 도아를 마주했다.
화창한 가을 햇빛 한가운데에 맑게 웃는 비서가 서 있었다. 시우도 도아를 따라 가볍게 웃었다.
“왜 거기서 나와. 좀 쉬고 있지.”
넓은 보폭으로 걷던 시우가 신호에 걸린 듯 자연스럽게 멈추어 섰다.
“아 일정 변동된 것 좀 다시 작성하고 있었어요. 우편물들 정리해서 책상 위에 올려두었는데, 바로 확인해 주셔야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알겠어.”
시우를 슬그머니 올려다보는 도아의 두 뺨이 어느새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더워?”
“아뇨. 전혀요.”
“그런데 얼굴이 왜 이렇게 붉어.”
“그건, 음, 좋아서요.”
턱 끝을 살짝 숙이는가 싶더니 빨간 입술 끝을 올리며 대답했다. 비서는 보글보글거리는 마음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런 말 하면, 내가 일이 손에 잡히겠어?”
시우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복숭아 같은 볼을 가볍게 쓸었다.
“잘만 하시던데요?”
도아가 손길이 닿았던 곳을 다시 매만지며 대답하자, 시우가 눈썹을 살짝 어그러트렸다.
“……회의까지 얼마나 남았지?”
“30분 후에 잡혀 있습니다. 3층에서 제품 확인하시고, 9층 A회의실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그럼, 이따 같이 내려가.”
햇빛을 받아 촉촉하게 움직이는 속눈썹과 그 끝에 이어진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던 시우는 느긋하게 명령했다.
“네 알겠습니다. 노트북 챙길까요?”
“아니. 그냥 도아 씨만.”
“네? 아, 네. 알겠습니다.”
회의록 작성도 아닌 것 같고, 스케줄을 잘 숙지하고 있나 테스트하는 건 더욱 아닌 듯했다. 딱히 이유를 알 수 없어 그저 두 눈을 깜빡이며 대꾸하는 게 전부였다.
띠릭.
문이 열리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리며 인자한 인상의 사내가 들어왔다.
시우는 정장을 입은 남자에게 가볍게 턱 끝을 내리고는 몸을 돌려 집무실로 걸어갔다.
“김 기사님, 고생하셨습니다.”
대표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비서는 새로 근무를 시작한 김 기사를 향해 다시 웃었다.
저번 주부터 출근을 시작한 수행 기사는 대기업 계열사 대표 옆에서 꽤 오랜 시간 함께 일한 사람이었다.
보안팀장과 비슷한 연배로 노련미와 예의를 갖춘 사람이었다.
“아닙니다. 뭐 어려울 게 있나요. 저는 한 시간 후에 정비 때문에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네. 그렇지 않아도 스케줄 정리 막 마친 참이었어요.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 비서님이 이렇게 친절한데, 내려간다고 생각하니 벌써 아쉽네요.”
“하하. 저도요. 기사님 오셔서 좋았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돌아오시는 비서님이 저보다 훨씬 베테랑이셔서 편하실 거예요. 한국말도 엄청 잘하세요.”
월튼의 근무일이 확정되었다. 도아는 다음 주에 전략팀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호점 오픈과 관련해서 회의와 출장이 잦아졌고, 둘이 함께 식사하거나,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시우의 사랑이 의심되지 않았다.
정원을 바라볼 때처럼 한없이 깊고 다정하게 바라봐주는 눈빛이 마음을 채워주었다.
도아는 정원을 기분 좋게 한 번 더 바라본 후 걸음을 옮겼다.
**
“도아 내려온다면서!”
“들었어! 비서실에서도 잘 적응한 거 같지? 우리 중에 제일 먼저 승진하는 거 아니야?”
주혜를 비롯한 몇 명이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며 도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동기들이 시끌벅적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주혜는 두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결국, 고모가 해준 이야기는 정말 소문에 불과했고 이도아는 다시 전략팀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녀가 비서실에 가서 눈물 쏙 빠지게 고생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15층에서 일하는 동안 별로 힘들어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오히려 대표에게 눈도장을 받은 사원이 되었다. 게다가 우진의 마음마저 차지했다.
그래봤자 대표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 난 속물일 뿐인데. 너무 얄미워서 마음이 꽉 막혀버린 듯했다.
“도아 내려오면 시간 맞춰서 다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그러자. 주혜 네가 연락할래? 도아랑 친하잖아.”
수다가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무렵, 커피를 생수 마시듯 한 번에 들이켠 지헌이 빈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제안했다.
조용히 마음을 삭이던 주혜는 도아랑 친하다는 그 한마디에 경고등이 빵 들어오고 말았다.
“아뇨. 오빠가 대신 연락할래요? 전 요즘 좀.”
“아. 그럼 내갈 할게. 둘이 무슨 일 있어?”
“아뇨. 별건 아니고요.”
“왜 그래. 말해봐.”
한 귀퉁이에서 시작된 이야기에 눈동자들이 이끌리듯 모였다.
“사실, 도아 언니가 대표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일부러 비서실 간 거거든요.”
“도아가 자진해서 간 거라고?”
“네. 저도 우연히 알게 됐어요.”
“에이. 설마.”
“언니 술도 잘 못 마시는 거 알죠?”
“알지.”
“그런데 회식 때 보안팀 온다니깐 굳이 와서 대표님 차량 언제 들어오는지도 막 애교부리면서 알려달라고 하고. 대표님에게 잘 보이려고 옷도 엄청 비싼 옷으로만 입고.”
나불거리는 자신의 입술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은근 스킨쉽도 시도해요. 이것 말고도 되게 많은데, 그런 것들이 쌓이니깐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요.”
“에? 진짜? 전혀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반응을 보니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하는 눈치였다.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진 주혜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 언니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저는 그런 게 안 맞는다는 이야기였어요. 아니다. 그냥 잊어요. 다들.”
난처하다는 듯 눈썹을 내리며 울먹거렸다.
“아아. 그래그래. 무슨 이야긴지 알았어. 내가 괜히 연락하라고 했네.”
지헌이 무거워진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한마디 거들었다.
“그, 그래. 우리도 이제 그만 일어나자.”
눈치를 살피던 다른 사람들도 엉거주춤 자리를 정리하자 주혜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를 집어넣으며 라운지를 훑어보았다. 서너 명의 사람들이 테이블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창가에는 대표가 제주도 출장 때 구입했다는 금귤 나무가 달금한 향을 퍼트리고 있었다.
향기가 퍼지듯, 도아의 소문도 퍼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
“대표님. 지금 내려가서야 합니다.”
인상을 쓰며 화상통화를 하던 시우가 노크 소리와 함께 찾아온 비서를 보고 표정을 풀었다.
이어 짧은 한숨을 내쉬며 적당한 내용으로 연결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햇빛을 받아 더욱 빛나는 수려한 외형에 도아는 저도 모르게 잠시 넋을 놓았다.
어느새 그녀의 앞으로 바짝 다가온 시우가 시선을 물끄러미 내리며 침묵했다.
“그렇게 탐난다는 표정을 지으면 안 되지. 여기 15층인데.”
“탐낸 게 아니라. 그냥 본 겁니다.”
도아가 시우의 가슴팍을 가녀린 힘으로 툭 밀쳤다. 설핏 닿은 감촉에 시우의 미소가 짓궂어졌다.
“비서 말 들은 게 후회되네. 기사도 괜히 뽑은 거 같고.”
“빨리……. 이동하세요.”
시우의 숨결이 도아의 뺨을 스쳤다. 그것이 뭐라고 진득하게 느껴져 새삼 부끄러워졌다.
도아는 발치에서 시작된 떨림이 가득 번지기 전에 급히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총총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는 토끼를 사냥꾼은 느긋하게 쫓았다.
목적지에 도착한 비서는 새침하게 보안키를 댄 후 내려가는 버튼을 꾹 눌렀다. 팔딱거리는 가슴을 두 손으로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3층에서 지시하실 일 있으세요?”
제 뒤에 그림자를 느낀 도아가 상기된 목소리를 숨기며 물었다.
“있어. 3층은 아니고 엘리베이터에서.”
“네? 엘리베이터에서요? 거기서 뭘요?”
자신을 바라보는 순수한 눈동자에 시우는 곤란한 듯 잠시 혀끝을 굴렸다.
“글쎄. 남녀가 할만한 게 뭐가 있겠어.”
짧은 정적 끝에 날아온 아리송한 대답에 도아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아니. 그냥 도아 씨만.’
15층에서는 대표와 비서로 지내자고 합의했었다. 정확하게는 도아의 일방적인 명령이었다.
시우와 사귀기로 하고 나서 며칠 후, 집무실에서 가볍게 시작된 키스가 점점 짙어졌다.
녹아내릴 것 같은 감각에 흐트러지는지도 모르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머리로는 그만 끝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더운 숨을 연거푸 몰아 내쉴 때쯤, 보고를 하기 위해 올라온 직원이 로비에서 호출 버튼을 눌렀다. 울려 퍼지는 그 소리에 도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시우에게서 떨어졌다.
혹시라도 문을 열어두었다면 그대로 들킬뻔했다는 생각에 등골이 몹시 서늘해진 순간이었다.
엉망이 돼버린 머리를 매만지며 이제 15층에서 절대 이런 스킨쉽은 안된다 선언했다.
시우는 제주도에서 도아가 주저앉았던 그 순간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의사를 상당히 존중해 주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시우가 도아의 손가락을 제 손에 얽으며 끌어당겼다.
“내가 아주 급해.”
문이 닫힘과 동시에 시우가 얇은 허리를 끈끈하게 감싸며 단단한 몸에 바짝 밀착시켰다.
“안 돼요. 누가 타면 어떡해요.”
“아무도 안 타. 문도 안 열리고, CCTV도 꺼지고. 잊었어?”
“아…….”
시우가 봄에 해주었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을 땐 이미 입술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가득 밀려온 후였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부드러운 감촉이 도아의 눈을 스르르 감기게 했다. 목덜미를 가볍게 쓰다듬는 손길이 입술 끝을 자꾸만 올라가게 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로프의 마찰음 사이로 두 사람의 숨소리가 섞였다.
따뜻한 봄꽃 같던 시간은 너무나 순식간에 지났다.
엘리베이터 화면의 숫자가 곧 3층으로 변할 참이었다.
만족한 듯 웃은 시우는 번진 립스틱을 손으로 문지르듯 닦아주며, 가는 어깨를 잡아 등 뒤로 도아를 숨겼다.
띵. 도착 알람 음이 울림과 동시에 제일 아래층 지하주차장 버튼을 꾹 눌렀다.
“차에 선물 있어.”
작은 속삭임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3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영업팀 직원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오른발을 내디디며 인사에 가볍게 응한 시우는 그대로 가나 싶더니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뒤쪽으로 옮겼다.
“이 비서. 물건 잘 챙겨서 올라가요.”
옅은 미소를 띤 시우가 선선하고 단정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네? 아. 네. 알겠습니다.”
도아는 언제 자신의 손에 쥐어진 지도 모를 차 열쇠를 꾹 움켜잡았다. 가슴이 쿵쾅쿵쾅 열심히도 운동하며 온몸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