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정원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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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정원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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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정원에는
2022.05.06.
낙엽이 물들어가는 길목의 노천카페는 한적했다. 추위가 평년보다 빠르게 찾아왔고, 인사할 틈도 없이 여름이 지나갔다.
모퉁이 쪽 테이블에 자리 잡은 월튼이 다음 주부터 진행하게 될 업무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손에 들려있던 커피잔이 소서에 닿으며 카랑한 소리를 냈다. 두툼하고 하얀 손가락을 손잡이에 빼낸 월튼이 달력을 골똘히 보았다.
“흠…….”
잠시 고개를 들어 가지에 듬성듬성 노랗게 변할 준비를 하는 잎사귀를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외워둔 번호를 망설임 없이 꾹꾹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달칵 전화를 받는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아람? 나 월튼입니다.”
-어머. ……월튼 씨? 오랜만이에요. 한국 왔어요?”
신분을 밝히자 날카로운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네. 다음 주부터 다시 시우랑 일합니다.”
-잘됐네요. 목소리 들으니깐 반갑네요.
“시우가 아람 씨 병원 진료 예약을 하지 말라고 하던데, 무슨 일 있었습니까?”
-……걔가 다른 말은 안 하고요?
“네. 알잖아요? 본인 할 말만 하는 거.”
-그냥. 내가 좀 신경 거슬리게 했어요. 화해하고 싶은데 연락하기가 어렵네요.
“아, 그랬어요?”
어린 시절, 시우와 자신은 늘 붙어 다녔다. 같은 나이지만 어쩐지 멋있게 느껴지는 친구가 좋았다.
그러다 부모님의 직장 사정으로 아주 멀리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 무렵 시우의 어머니가 아팠다.
이런 계절이었다. 바람 없는 날에도 노랗고 붉게 변한 잎사귀가 툭툭 떨어지던 계절. 뿌옇게 변한 기억 속에 그것만은 생생했다.
학교에 갈 때도, 운동을 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늘 옆에 있던 친구와 이별했다.
편지와 전화로 간간이 이어지던 소식은 그 후로 3년이 지났을 즘 돌연 끊겼다.
잊고 지내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런 친구였다. 연락이 끊긴 지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어도 얼마든지 허울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역시 그 생각이 옳았음을 알았다.
하지만 옆에서 가만 보니 어린 시절 행복하게 웃음 짓던 아이는 사라지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사람만 남아 있었다.
하고 싶은 말만 짤막하게 내뱉는 것들로 시우의 아픔을 추측해보는 것이 다였다.
나는 내 친구가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사랑이라도 하면 괜찮을까.
아람은 나름 머리를 굴려 고른 상대였다.
대학에서 인연이 있고 의학적으로도 시우에게 버팀목이 되어줄 것 같은 존재.
둘을 이어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어찌 되었건 아람을 이용한 것 같기도 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화해하게 도와줄까요?”
-필요하면 연락할게요.
“알겠어요.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 다음에 커피 한잔합시다.”
-네. 알겠어요. 월튼.
여전히 아람은 시우에게 괜찮은 상대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인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 도아를 향하는 미소를 본 순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 눈빛이 기억 속의 어린 시절의 시우와 닮아 있었기에.
그래도 제 기도가 통하기는 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빠!”
방울 소리처럼 맑고 깨끗한 음색이 생각에 잠긴 월튼을 불렀다.
“공주님!”
토끼처럼 사뿐사뿐 뛰어오는 아이를 확인하고는 재빠르게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굽혔다.
그가 두 팔을 넓게 펼치자 어린아이가 햇살보다 환하게 웃으며 달려와 품에 와락 안겼다.
행복했다. 이 행복을 시우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이, 이 비서님?”
우진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당황함이 묻어 평소보다 높고 셌다.
시우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느라 정신이 팔렸던 도아는 그 소리가 우진이 아닌 다른 직원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눈동자를 들어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자신을 난처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이란 걸 알았다.
주말. 에이치 코리아 사옥의 메인 로비는 한산했다.
“헐. 못 알아볼 뻔했어요. 평소랑 조금 다르네요?”
우진은 평소와 다름없는 듯했지만, 몇 발짝 거리를 두고 떨어져 서 있는 도아를 향해 걸어오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눈동자가 가볍게 묶어 올린 머리부터 후드티, 편한 바지, 운동화까지 숨은그림을 찾듯 유심히 관찰했다.
“저는 깔끔한 비서님이 더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의견을 내놓았는데, 도아는 그게 못마땅했다.
“제가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입는 건 아닙니다만.”
그래서 그 기분을 적당히 흘리며 대꾸했다.
“잘 보이려고 비싼 옷 입기도 한다면서요. 전 안 믿지만요.”
“네? 잘 보이려고 뭐를 입어요?”
여느 때처럼 경계심이 바짝 서 있는 도아에게서 우진이 먼저 등을 돌렸다. 뚜벅뚜벅 걸어 엘리베이터 버튼에 보안키를 대주었다.
“아니에요. 어서 올라가 보세요.”
띵.
‘잘 보이려고 비싼 옷을?’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도아는 그저 우진이 하는 가벼운 농담쯤으로 여기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 강아지처럼 실실 웃던 우진이 머리를 긁었다.
분명히 예쁘긴 한데, 어색했다.
‘제가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입는 건 아닙니다만.’
특히 편한 옷을 입고 똑 부러지게 말하는 태도는 도아가 아닌 다른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 누구냐면……. 기억의 미로를 헤집고 다니던 우진이 마침내 누군가를 떠올렸다.
“우리 누나랑 비슷하잖아?”
누나들 가득한 집에서 자랐던 우진은 누나라면 질색이었다. 조금이라도 심기를 상하게 하면 훈수질이 아주 몇 시간이고 이어졌다. 대든다고 머리를 때리고, 부탁한 걸 안 해주면 시간과 장소를 안 가리고 성질을 냈다.
그런데, 나의 이 비서님이 우리 누나 같다니. 정말 내가 어떻게 됐나 보다.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본인의 포지션으로 이동했다.
뚜벅뚜벅. 사람 없는 로비를 걸어가던 우진이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주혜와 나란히 서 있던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주혜가 저런 모습이면 어땠을까.
“귀여웠겠지.”
우진은 저 혼자서 속삭이듯 말한 내용에 지레 놀라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당황스러움에 뺨까지 툭툭 친 우진은 아까보다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
비서실에 올라온 도아는 책상 주변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준비해 두었던 손님용 우산, 조문용 넥타이. 그 밖의 비서 용품들을 캐비닛 안에 깔끔하게 넣었다.
담요와 노트북 같은 개인용품들도 있었지만, 서랍 안쪽에는 나무 관련 서적, 건강과 관련된 책들이 켜켜이 숨어 있었다.
한시우가 싫다 그렇게 악을 썼으면서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미약한 기대감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에 조용히 꺼내 살피고 공부했었다.
과습인 식물에게 물을 주지 않도록, 아픈 대표의 상태를 바로 알아차리고 도와줄 수 있도록.
엄지로 책장들을 빠르게 넘기자 종이가 만든 약풍이 속눈썹을 흔들었다.
도아는 그 시간을 기억하며 의자에 잠시 몸을 기대었다.
이리저리 담고 버리다 보니 얼추 마무리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책상의 끝에 맞추어져 있던 초점은 책꽂이와 모니터를 지나 탁상거울 앞에서 멈추었다.
“내 꼴이 그렇게 초췌한가?”
화장기 하나 없는 모습을 골똘히 살폈다. 신경 쓰지 않는 척 고개를 휙 돌려도 눈동자가 다시 제 모습을 평가했다.
그냥 평소와 같은 얼굴인데.
제 뺨과 이마를 괜스레 손바닥으로 찰흙 누르듯 꾹 짚었다.
지이이잉.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 진동 소리가 거울 속에 들어갈 기세로 제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던 행동을 멈추게 했다. 집중력이 깨진 비서는 개인 핸드폰에 뜬 번호를 보고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대표님!”
밝은 목소리와 함께 시선을 올리자 간들간들 춤추는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야?
“회사요. 짐 좀 챙겨야 해서 들렸어요.”
-다음 주에 내가 옮겨준다니깐.
“괜찮아요. 차도 빌려주셨잖아요.”
-빌려준 게 아니라 뺏긴 거지.
도아는 곱게 접힌 부드러운 담요를 살살 매만지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다정한 목소리를 듣자 자꾸만 입술 새로 미소가 헤프게 흘러나왔다.
“일정은 언제 끝나세요?
-끝나고 올라가는 길이야. 거의 다 왔어.
“벌써요? 밤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됐어. 지금 만날까?
“아. 그게…….”
도아의 계획은 집에 들러 준비를 한 후 깔끔하고 단정한 이도아로 한시우를 만나는 것이었다. 작은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한 번 더 훑었다.
왜?
“제가 지금 상태가 별로예요.”
-난 상관없는데.
여유로운 대답에 순간 솔깃했다. 하지만 시우와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을 떠올리자 어렴풋한 가정은 더 확고해졌다. 시우의 그림 같은 모습과 대비되어 자신의 남루한 행색만 도드라질 것이 분명했다.
“대표님이 너무 말끔하게 챙겨입어서 같이 다니면 뭔가 수치스러울 것 같아요. 그냥 저녁에 만…….
-그럼, 집으로 와.
시우가 구구절절 뻗어 나가는 설명을 가지치기하듯 투욱 잘라냈다.
“네?”
예상치 못한 초대가 마음 깊숙이 침투하듯 파고들어 왔다.
-맛있는 거 해줄게.
“…….”
이어, 살살 구슬리는듯한 말투에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보들보들한 담요가 도아의 주먹 안에서 부드럽게 구겨졌다.
-요리 못할 것 같다고 무시했었잖아.
“제가 언제요? 그냥 뭘 만들어 먹는 스타일이 아닌 것 같다고 했죠.”
-그게 그거야. 올 거지?
“어. 그게…….”
-또 애를 태우시네. 어떻게 꼬셔야 하나.
한시우는 가벼운 말투로 말해도 진중한 고백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애를 태운다고? 어떻게 꼬셔야 하냐니.
도아야 말로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렇게 애태웠으면서. 사실 지금도 믿기지 않는 하루하루였다. 저 사람의 관심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예쁘게 물들어 있는 가지 끝 가을 잎을 보며 도아가 입매를 올렸다.
“좋아요. 야경도 멋있고, 마크 로이 작품도 있어서 특별히 갈게요.”
-매우 영광입니다.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예의를 갖춘 답변이 들려왔다.
“저 그런데 진짜 초췌해요. 놀라지 마세요.”
-도아 씨.
“네?”
또다시 낮고 단정한 목소리.
이름을 불러주던 순간들이 기억 속에서 배회했다.
눈동자를 올렸을 때, 고개를 돌렸을 때. 그때마다 마주했던 새까만 눈동자가 아름다운 빛깔로 피어올랐다.
난 물 뒤집어쓴 모습, 물에 빠진 모습, 화장 번진 모습, 술 취해서 떼쓰는 모습, 잠자고 일어난 모습. 이미 다 봤어. 다 예뻤어. 그러니 그런 걱정 하지 마.
그 색 안에 자신이 그런 모습으로 담기고 기억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따, 봬요.”
-그래. 이따 봐.
가지 끝에 열심히 매달려 있던 잎사귀 하나가 바람을 타고 상록수 위로 떨어졌다.
구상나무. 블루버들. 시우가 알려주던 나무의 이름들을 가만히 되짚었다.
초록 물결들이 반짝이며 흔들흔들 춤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