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독감일 리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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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독감일 리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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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독감일 리 없는데
2022.05.09.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도아는 창문을 내려 초저녁 바람을 맞았다. 운전대 너머로 시우가 사는 주상복합 아파트가 보였다.
높은 건물에 박혀 있는 수많은 창문. 그 안에는 아이들이 장난을 치거나, 테이블에서 부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 그저 평범한 일상들이 담겨 있었다.
사람의 온기가 새어 나온 것이라 생각하니 유리창 불빛들이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바퀴는 부드럽게 굴러 지하주차장을 가로질렀다. 차 문을 닫고 입구로 걸어가는 동안 다른 차량이 지나가지 않았다. 넓고 고요한 공간에 운동화를 신은 도아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만 아주 작게 퍼졌다.
분명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외워두었던 공동비밀번호를 누르는 제 손끝이 떨리는 것을 보고 착각이었던 것을 깨달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도아는 시우의 문으로 향하는 복도 모퉁이를 돌지 못하고 잠시 멈추었다.
뭘 새삼.
처음 오는 것도 아닌데.
도아가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복도 등이 꺼지며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주변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해졌다.
“왜 안 들어오고 있어?”
낮고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아가 흐렸던 초점을 바로 잡자 아주 근사한 남자가 보였다.
역시, 바깥에서 봤으면 자신의 초췌함만 두드러졌을 뻔했다.
“지금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긴장감이 꾹 눌러 숨긴 단정한 말투에 시우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 올랐다.
“초췌하다더니 예쁘기만 하네.”
“네?”
“아냐. 어서 들어와.”
시우의 넓은 등을 보고서야 혼잣말의 내용을 깨달았다. 두 뺨에 오종종 숨어 있던 열기가 화르르 불을 피웠다.
결국 도아는 분홍빛으로 물든 얼굴과 떨리는 숨소리를 진정시키지 못한 채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독감일 리 없는데.
작은 혼잣말을 내뱉으며.
**
아람은 키보드를 쉼 없이 두드리다 고개를 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움직임을 따라서 단발머리가 매끄럽게 찰랑거렸다.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고, 시간까지 느려 터져 불만스러웠다.
손톱에 붙어 있는 파츠를 버릇처럼 문지르다 입가로 가져갔다. 손톱이 하얀 이에 부딪치는 소리가 관자놀이 근처에서 작고 둔탁하게 들려왔다.
톡톡 들리는 작은 소리에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끼워 맞춰졌다.
“네.”
아람이 대답하자 퇴근하기 위해 외투와 가방을 야무지게 챙겨 든 간호사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선생님, 오늘 토요일인데 아직도 안 들어가셨어요?”
복도 불도 꺼졌는지 그녀 뒤로 보이는 배경은 어두웠다.
“아 학회 준비 좀 하느라고요. 난 일이 좀 남았어요. 먼저 들어가요.”
“네. 저…….”
“왜요?”
평소처럼 나가려던 간호사는 눈썹을 내리며 슬며시 진료실로 한 발짝 들어왔다.
“배영희 환자 이제 예약받지 말까요?”
“예약 안 받는다고 안 올까요? 오늘도 막무가내로 온 거잖아요.”
아람은 약간의 찡그림과 미소를 동시에 지어 보였다. 아직 커피가 절반 정도 남아 있는 머그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네……. 그렇긴 하지만. 아까도 계속 선생님 힘들게 하고. ”
“괜찮아요. 일단 좀 지켜보자고요.”
“정말 대단하세요. 저는 이야기 듣다가 그렇게 사과하고 싶으면 직접 찾아가지 왜 여기서 그러시냐고 소리칠 뻔했잖아요. 아까.”
“만나질 못하니 답답해서 그러는 거죠. 에이치 코리아 대표가 동네 가게 주인도 아니니.”
흥분감이 실려 있는 간호사의 목소리와 다르게 아람은 꽤 차분한 모습으로 대꾸했다.
조금 전까지 불만이 가득 실려 있던 자신이 왜 지금은 오히려 평온한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 환자분, 사과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데, 정말 만나서 이야기라도 나누면 증세가 좀 괜찮아질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럼 제가 만나게 해드리고 싶네요. 선생님 좀 편하시라고.”
저 말.
간호사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미언같은 말 덕분이었다.
‘환자분이 이렇게 힘들어하시니, 한번 만나서 사과를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제가 사실 한시우 대표를 압니다. 자리를 마련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말을 하면, 어떨까? 터무니없는 상상이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정당화시켜주는 상대방의 대사가 불편과 짜증을 잠재웠다.
“최 선생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요. 어서 들어가요.”
“네. 그럼 월요일에 뵐게요.”
간호사는 냉철해 보이는 의사의 모습에 얼마쯤의 존경심을 담은 눈빛을 보내기까지 했다.
다시 혼자가 된 아람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커피잔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흐릿한 향기를 타고 오전에 월튼과 통화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화해하게 도와줄까요?’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월튼은 누가 봐도 자신과 시우가 잘 되기를 응원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제안이 솔깃하긴 했다.
그녀는 다시 손톱에 붙은 동그란 파츠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맨질한 감촉을 느끼다가 작은 한숨과 함께 허리를 세웠다.
“안 되지. 그건 안 되지.”
아무리 시우와 다시 엮이고 싶다고 해도 이건 정말 아니었다. 환자를 도와주는 척하며 시우와 다시 만나려는 몹쓸 계획.
환자를 위한 행동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빈 컵을 한쪽 귀퉁이로 밀어버리고는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
도아가 건넨 방문선물을 확인한 시우가 한쪽 입매를 올렸다. 이어 난감한 웃음과 함께 쇼핑백 안에서 작은 화분이 등장했다.
“마음에 안 드세요?”
협탁 위에 화분을 올리자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그럴 리가.”
손끝으로 잎사귀를 한 번 매만진 시우는 고개를 저으며 느슨하게 팔짱을 꼈다.
“나무에 환장해 있는데, 이런 선물은 매우 환영이지.”
“환장이요?”
“이제 메모장 내용은 기억에서 지워버렸어?”
듬성듬성 잘려나갔던 기억이 떠오른 도아는 급하게 한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목을 감싸 쥐며 답지 않은 연기를 했다.
“저 목, 목말라요.”
그 어설픈 행동에 시우는 선선히 속아주었다.
비서는 대표가 유리컵에 한가득 따라준 주스를 소중하게 쥐고 그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선물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 안심되었는지 조금 더 설명을 이어갔다.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도 어느 정도 곁들여서.
“나무 볼 때 대표님 표정이 편안하거든요. 집에서도 그렇게 계셨으면 해서요.”
“집에서 내 표정이 어떤데?”
“회사에서 볼 때랑 똑같았어요. 원래 집에 오면 긴장이 좀 풀리잖아요? 그런데 대표님은 안 그렇더라고요.”
“도아 씨가 내 표정을 아주 관심 있게 봤나 봐.”
도아는 눈을 가늘게 만들어 재미있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한 시우의 얼굴을 재차 확인했다.
저 분위기 때문에 휘말렸던 날들을 생각하니 억울하기도 했다.
“네. 뭐……. 보이니깐요. 대표님도 그냥 보이니깐 보신 거잖아요.”
도아는 별로 마르지 않은 목을 달콤한 음료로 축이며 제법 앙칼지게 대답했다.
윤기가 감도는 입매를 바라보던 시우는 충동적이지만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포개었다. 나비가 꽃잎에 살며시 앉았다 가는 것처럼, 아주 짧게 머물다 떨어졌다.
짧게 지나간 버드키스였다. 도아의 손끝은 그 감촉을 떠나보내기 아쉬운 듯 컵을 힘주어 잡았다.
“나는 관심 있어서 열심히 본 거야. 상대방의 표정 하나하나에 관심 가질 만큼 한가하진 않아.”
매끈한 입술에서 나는 달콤함이 마음에 든 듯 그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여유로웠다.
도아는 두 볼을 연분홍빛으로 붉히고서는 시우의 가슴팍을 툭 밀쳤다. 흔쾌히 한 발자국 밀려난 시우가 손을 뻗어 도아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래서, 지금은 어때 보여?”
“즐거워 보이는데요. 무척이나.”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감추며, 도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제대로 봤어.”
즐겁다. 행복하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낯설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시우는 도아가 정의 내려준 자신의 감정에 흔쾌히 수긍했다.
**
비서는 소파의 푹신함을 익히 알고 있기에 앉다가 뒤뚱거리며 내용물을 흘리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척 대표를 등지고 있다가 결국 몸을 돌려 부엌이 잘 보이도록 고쳐 앉았다.
평소에는 몹시 듬직한데, 요리를 한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못 미더웠다.
“진짜 안 도와드려도 돼요?”
불안감이 가득 담긴 질문에, 주물 팬에 음식을 볶던 시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가 도아 씨보다 잘하면 잘했지, 못하지는 않을 거야.”
“제 요리 드셔본 적 없잖아요.”
“뭐. 요리는 모르겠지만 가끔 과일 잘라주는 거 보면 칼질 솜씨는 보이지.”
도아는 자신이 처음 사과를 담은 접시를 책상 위에 올려놓던 순간을 떠올렸다.
늘 비서를 본척만척하던 대표가 불쌍하게 잘려 있는 과일을 확인하고 인상을 쓰며 자신을 똑똑히 올려다보았다. 나름 기념적인 날이라 확실히 기억했다.
“열심히 보셨나 봐요.”
“봤지. 추상미술작품인가 싶어서.”
뭐든지 열심히 하는 도아도 노력으로 채울 수 없다고 인정한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요리, 미술, 음악 등.
이론 쪽으로는 제법 괜찮았지만, 실기는 가망이 없었다. 그래서 그 시간에 더 효율적인 다른 공부를 하곤 했다.
과일 중에 사과를 제일 좋아한다는 월튼의 쓸데없는 코멘트를 하필 봐버려서는.
한시우가 밉다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잘해주고 싶기도 했다.
파는 것처럼 깔끔하고 예쁘게 담아가고 싶었는데, 역시 손가락을 쓰는 것엔 재능이 없었다.
도톰하게 잘려나간 사과껍질과 저에게 난도질당한 알맹이를 보며 한숨을 내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 정성을 그렇게 매도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비서는 약간의 창피함과 뻔뻔함을 담은 얼굴이었다. 시우는 이야기하면서도 멈추지 않던 손을 잠시 내려놓고는 눈을 맞추었다.
“맛있었어.”
“그럼, 다행이고요. 과일 깎는 거 어렵다고요.”
“이제 어려운 거 하지 마. 내가 깎아주면 되니깐.”
“…….”
시우가 도아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뭐야. 오늘 왜 저렇게 다정한 거야.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아는 새삼 달아오르는 얼굴을 식히기 위해 손부채질을 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소엔 있는지도 모르는 심장이 오늘따라 여기 있다며 계속 노크질을 해댔다.
요리가 볶아지고 담기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손에 들려 있는 주스를 기운차게 한 모금씩 들이켰다.
그렇게 콩콩거리는 심장이 진정되어갈 때쯤, 시우가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렸다.
“이제 담기만 하면 돼. 준비하다 보니 좀 늦어졌네. 어서 먹고 나가자.”
“네? 왜 나가요?”
“왜냐니?”
“뭐 살 거 있으세요?”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서로의 시선이 공중에서 몇 번 부딪혔다. 빈 잔을 들고 있는 눈동자는 정말이지 너무나 순수하게 반짝였다.
“집에……. 가야지?”
시우가 입꼬리를 살짝 당겨 올리며 대답했을 즘, 도아는 제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이 전혀 달랐던 것을 알아차렸다.
아차 싶은 마음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어……. 저는 자고 가려고 했는데……. 요.”
더듬더듬 이어 내뱉은 말에 그릇으로 조로록 담기던 브로콜리 하나가 튕겨 나갔다.
하지만 자신 혼자서만 그런 생각을 했나 싶어 괜스레 부끄러움이 몰려왔던 도아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