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같이
(56/85)
제56화. 같이
(56/85)
제56화. 같이
2022.05.13.
“요리를……. 잘, 하시네요?”
시우가 만든 음식을 한 입 먹은 도아의 눈이 커졌다. 맛있다는 칭찬을 먼저 해야 하는데 놀라 되묻는 말이 그만 먼저 나오고 말았다.
“불만이야?”
평소보다 크고 높은 목소리에 시우가 작게 웃으며 물었다. 뭐, 마냥 기뻐하며 먹는 모습도 괜찮지만, 저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아뇨. 좀 뜻밖이라서요. 대표님이 누가 해준 요리만 먹었을 것 같다는 건……. 저의 편견이었나 봐요.”
도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른 음식을 입가로 가져갔다. 또다시 흠칫하는 모습에 시우가 입매를 부드럽게 올렸다.
“세상에. 진짜 맛있어요.”
이번에는 정석에 가까운 반응과 대사를 내보이고는 오물오물 고기를 씹으며 연거푸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보다 조금 늦게 자신이 만든 요리를 맛본 시우는 음식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반쯤 빈 도아의 컵에 물을 채워주었다.
제 입맛은 아주 완벽히 달아나게 해놓고, 너무나 태평한 비서의 모습에 기가 찼다.
이 여자는 이렇게 딱히 계획적이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쉼 없이 흔들어 놓곤 했다.
‘어……. 저는 자고 가려고 했는데……요.’
자신이 따라 준 것이 주스가 아니라 술이었나 진지하게 기억을 되새겼지만, 입술에 남아 있는 맛은 분명 과실의 단내였다.
도아를 보면 이성의 끈이 풀리곤 하지만 요즘 들어 대표보다 더 바빠 보였던 비서를 위해 오늘은 정말 저녁만 먹고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말 한마디에 얄팍한 계획은 무너지고 수액이라도 맞은 듯 몸이 반응했다.
마음을 겨우 억누르고, 시선은 다시 눈앞의 여자를 향했다.
“많이 있어. 천천히 먹어.”
낮은 음색에 도아가 귀를 쫑긋하더니 허리를 세우며 웃었다.
“네. 대표님도 어서 드세요.”
권유를 가장한 명령에 남자 역시 놓았던 젓가락을 들었다.
시우가 손을 뻗은 그릇에는 새우가 곁들여진 샐러드가 담겨 있었다. 그를 따라서 양상추를 아삭 씹은 도아가 드레싱 맛에 다시 한번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진짜 왜 이렇게 맛있지? 대표님 요리 학원 다녔어요?”
어린아이처럼 음식 하나하나 반응해 주는 모습에 오랜만에 시간을 들여 요리를 한 것이 꽤나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비서님이 오늘 칭찬에 후하시네.”
“정말 맛있어요.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데요?”
도아를 처음 보았을 때는 늘 표정을 숨기려고 필사적이었는데, 지금은 저렇게 그대로 보여주니 상이라도 받은 듯했다.
그것이 뭐라고 시우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특별할 것 없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다니지도 않는 그런 이야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랑 같이 지냈어. 할머니마저 돌아가신 후에는 쭉 혼자 지냈으니 요리를 못하는 게 이상하지.”
“할머니는 언제 돌아가셨는데요?”
“대학교에 입학할 즘.”
“좋은 분이셨어요?”
“아들을 잃은 슬픔 때문에 마음의 병이 심하셔서 나를 보듬을 겨를은 없으셨어. 기억에 남는 건 에이치 그룹을 싫어하셨던 점? 자세한 말씀은 안 하셨지만 아버지의 목숨을 뺏어간 회사라고 생각하신 거 같아. 그래서 회사에서 받은 돈들도 모두 기부하시고 인연을 끊어버리셨어. 나는 할머니가 사는 작은 소도시에서 평범하게 지냈어. 특별한 거 없지?”
분명 힘들었을 텐데.
이 사람은 멍울 같은 기억을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내뱉는 재주를 가진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쩐지 더 슬프기도 했다.
“제가 대표님의 슬픔을 함부로 위로할 수가 없네요. 그 깊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어서.”
“다 지난 일이야.”
“지났다고 사라지지는 않죠. 많이 힘들었겠어요. 어린 시우가.”
웅크린 어린아이. 혼자서 어설프게 슬픔과 고통을 덮던 시간.
괜찮다고 말하려던 시우가 도아의 뽀얀 얼굴을 유심히 살피다가 투정 부리듯 웃었다.
“맞아. 사실 조금 힘들었어.”
전혀라고 말할 줄 알았던 그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오자 도아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입술을 꾹 눌렀다.
떨리는 호흡을 몇 번 내뱉고서야 겨우 대답을 할 수 있었다.
“힘들었던 거 다 말씀하셔도 돼요. 말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시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갈색 눈동자 너머로 보이는 제 집을 바라보았다.
삭막한 공간.
도아가 건네는 말 한마디에 그 끝이 옅지만 푸르게 물드는 기분이었다.
협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화분만큼. 그 정도.
‘대표님께서 나무를 좋아하셔서 자택에도 식물이 많을 줄 알았는데, 없어서 조금 뜻밖입니다.’
비서는 처음 집에 왔던 날, 이곳에 작은 식물조차 없다는 사실이 뜻밖이라는 듯 말했었다.
그 말이 결국 이렇게 뿌리 달린 생명체를 가져오는 결과라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잠시 머물다 떠나리라 생각했기에 굳이 무언가를 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걸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때 보여?’
‘즐거워 보이는데요. 무척이나.’
그런 공간이었는데, 즐거워 보인다는 이야기를 듣기까지 했다.
스며들지 못하고 맴돌기만 하던 위로라는 단어가 오늘은 이슬비에 젖은 듯 마음을 물들이기는 한 것 같았다.
“그래. 말하고 싶어지면 다 말할게.”
“언제든지요. 비서가 대표님 이야기 들어주는 게 뭐 어렵겠어요.”
웃으며 전하는 말이 노래처럼 감미로워 시우는 저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도아의 표정 역시 풀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다정한 눈빛은 소낙비처럼 매몰찬 태도로 자신을 바라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시우의 집은 얼음 같은 차가운 눈동자를 닮았었다.
깔끔한 색감과 단정한 가구들의 조화는 조명과 어우러져 미술관이나 박물관처럼 근사했다. 그러나 동시에 건조했다.
도아가 정의내렸던 이 집의 것들은 그런 느낌이었는데, 지금 순간은 따뜻한 공기가 옅게나마 배어 있는 듯했다.
오는 길에 도로에서 보았던 따뜻한 창문 불빛들이 생각났다. 그 행렬 같은 반짝임 안에 이 집도 포함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흡족함이 번졌다.
앞으로도 시우가 차가운 곳이 아닌, 그의 정원처럼 푸르고 따사로운 곳에서 지내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
[내일 저녁에 같이 초밥 먹으러 갈래요?]
아니다. 이거는 너무 데이트 신청 같다.
[주혜 씨. 제가 엘리베이터에서 너무 쌀쌀맞게 대했…….]
이것도 별로였다. 사과해서 뭐 어쩔 건데?
축구 중계방송을 보던 우진이 몇 분에 한 번씩 핸드폰을 들었다가 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이깟 메시지 보내는 게 뭐가 어렵다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비틀어 쥐다 헝클어트리고, 다시 보기 좋은 모양으로 정돈하기를 반복했다.
그 희한한 광경을 옆에 앉아 지켜보던 둘째 누나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너 뭐하냐?”
“신경 꺼.”
“어쭈.”
리모컨으로 머리를 탁 때리는 행동은 습관처럼 자연스러웠다. 평소 같으면 무던히 넘어갔을 상황인데 오늘따라 짜증이 밀려온 우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짧은 욕설이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에? 너 진짜 이상하다? 다 지난 사춘기야, 뭐야?”
“그만 때리라고 좀.”
“뭐래? 고민 있나 본데,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마. 보통 마음을 진작에 정하고 망설이는 경우가 태반이야. 그냥 끌리는 대로 해. 하여튼 유난이야.”
편한 옷을 입고 똑 부러지게 말하는 태도.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인상을 쓴 동생의 얼굴을 골똘히 보던 누나는 콧방귀를 끼며 채널을 바꿨다.
“조언해 줬으니깐 라면 끓여.”
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우진은 현관으로 가려다 결국 부엌으로 방향을 틀었다. 티브이 소리가 요란했다.
지금 마음이 기우는 쪽은…….
**
꼴깍.
샤워를 마친 도아가 차마 나가지 못하고 손잡이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얕은 숨소리를 따라 자신의 어깨가 천천히 들썩였다. 수전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이제 그만 나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보고 싶었던 영화를 틀었는데 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우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지레 눈을 꼭 감으며 몸을 움츠렸다.
어색하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수시로 둘 사이에 내려앉았지만, 오늘따라 시우는 잠잠했다.
영화가 끝나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불을 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시우가 넓은 등을 돌려세워 도아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볼을 뭉근하게 매만지는 감촉에 도아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올렸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는 검은 화면 빛이 서로의 얼굴에 부드러운 윤곽선을 만들어 꿈속에 빠진 듯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집에 갈 시간은 충분히 줬는데.’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 위에 매끄럽게 겹쳐졌다.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온 시우가 허리를 숙여 도아를 조금 더 관찰했다.
어두운 빛 속에서 눈을 반짝이며 저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봄날 정원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때는 자신에게 들이닥친 감정을 외면하느라 상처를 주며 몰아세웠다면, 오늘은 아마 다른 의미로 그녀를 몰아가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게 바라보면 안 되지. 이도아.
‘이제 못 내려가.’
시우가 한마디를 더 내뱉자 하얗던 두 볼에 분홍 꽃이 피어올랐다. 길고 단단한 손끝에 그 열감이 고스란히 전해지자 그가 더 짓궂게 입매를 늘어뜨렸다.
‘같이 씻어도 되고.’
취한 듯 몽롱해 보였던 도아의 눈동자는 마지막 한마디에 정신을 차린 듯 크게 요동쳤다. 다급하게 상체를 뒤로 빼며 시우의 손길로부터 달아나고는 최면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연거푸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요! 따로! 제가 먼, 먼저, 씻겠습니다.’
두 눈을 끔뻑거리는 중에도 손을 들어 단호하게 거절의 의미를 밝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도아 씨 편하신 대로.’
후덥지근한 밤공기를 맞던 시간도 있었는데, 그 잠깐이 어려울까.
시우는 어질고 자애로운 태도로 흔쾌히 길을 내어주었다.
도아는 자신의 목덜미를 쓸며 그렇게 욕실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짧은 회상을 마치며 답답한 앞가슴을 주먹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왜 이렇게 울렁거리고 어지러울까 생각하니 답은 하나였다. 한시우 때문에 정신을 못차리겠어서.
그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 도아는 자신이 입고 있는 시우의 옷을 소중한 듯 매만지고는 문을 열었다.
잠잠하게 반짝이는 야경이 보이고, 곧이어 시우가 가느다란 손목을 기다렸다는 듯 끌어당겼다.
“대표님. 씻으……셔야죠.”
“이 넓은 집에 욕실이 하날까.”
떨리는 목소리로 시간을 벌려는 도아를 향해 그가 싱긋 웃으며 답해주었다.
물기를 머금은 그의 짙은 머리칼이 매혹적으로 흔들렸다. 신경 쓰지 말자고 하면서도 홀린 듯 뒤돌아 보게 만들었던 그 향기가 진득하게 풍겼다.
풀잎처럼 서늘하고 푸른 향이 맴도는 그의 품이 가만가만 정신을 아득하게 잡아먹었다.
“내가 이제 못 참겠어서.”
탄탄한 팔뚝에 갇힌 도아가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사이 시우가 빨간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아, 저. 잠깐.”
“안 돼.”
몇 달을, 며칠을, 몇 시간을 참았어도 지금은 어려웠다.
시우는 허둥지둥 몸을 뒤척이려는 그녀를 더 단단하게 당겨 안으며 저항을 잠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