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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단정한 대답 (57/85)


제57화. 단정한 대답
2022.05.16.


호텔 최고층에 위치한 라운지 바.

아람이 창가를 응시하며 칵테일 한 모금을 넘겼다. 재즈와 작게 울리는 이야기 소리가 더없이 평화로웠다.

어두운 창가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보는데, 또 십 년도 더 된 기억이 떠올랐다.

뽀드득뽀드득 눈길을 밟으며 친구들과 도서관에 가는 중이었다. 입김이 뿌옇게 허공으로 퍼지는 날씨에, 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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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아람.’

그때, 거친 바람 위에 중저음 목소리가 실려 왔다. 뭉개진 발음이 아닌 각져 있는 또박또박한 말투에서 그가 누구인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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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역시 한시우였다. 자신의 이름을 저렇게 발음할 수 있는 사람은 한국인인 그밖에 없을 터였다. 친구들은 그가 우리 학부에서 가장 머리가 좋을 거라며 키득거리곤 했다.

그에게 특별히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의사 남자친구도 있고, 그냥 같은 한국인이니깐. 좀 친해져도 나쁠 건 없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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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떨어트렸어.’

작은 스케줄러를 건네는 손이 길고 예뻤다. 미소 하나 없는 얼굴이 이상하게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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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 이름 어떻게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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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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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알지.’

그가 재촉하듯 한 번 더 스케줄러를 앞으로 내밀었다.

잠시 넋을 놓았던 아람은 저답지 않게 허둥지둥하며 수첩을 받아들었다. 손끝이 닿았는데 장갑을 끼고 있는 것이 후회되기는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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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석 부를 때 들었어.’

차가운 음색을 끝으로, 그는 매정하게 뒤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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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우!’

넓은 보폭으로 멀어져가는 시우의 모습을 멍하니 보던 아람은 붙잡듯 다급하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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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이거 중요한 거였는데. 내가 다음에 커피 사줄게!’

수첩을 흔들며,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답례임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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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아람을 힐긋 보는 눈동자가 눈이 오는 지금의 계절과 아주 잘 어울렸다. 짧은 대답 후 미련 없이 나아가던 시우는 돌연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아람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람은 왜 그러냐고 물으면 떨리는 목소리를 들킬 것만 같아 입술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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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내 이름 아네?’

시우가 부드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차갑게 건네던 그 시선이 목을 빳빳하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아마 그때부터 다른 남자들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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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떨어트리셨습니다.”

그을음 같은 한숨을 길게 내쉬는데 누군가 아람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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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몰랐어요. 감사해요.”

눈을 가늘게 접고 턱 끝을 당기며 고마움을 표했다. 물건을 건네받으며 상대방의 이목구비를 살피니 몇 번 보았던 얼굴이었다.

이곳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프라이빗 라운지였다. 자주 오는 사람들끼리는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히기도 했고, 애초에 그걸 목적에 두고 오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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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오셨죠? 얼굴이 낯이 익네요.”

아람이 받아든 핸드폰을 명품 가방에 집어넣으며 적당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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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저는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자주 오기는 했습니다.”

그녀가 먼저 아는 척을 해주자 남자는 조금 놀라는가 싶더니 능청스럽게 피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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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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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오셨으면 잠깐 옆에 앉아도 될까요?”

지금 말을 건 사람과 눈이 마주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신이 주로 언제 오는지 물어봤다고 친한 바텐더가 귀띔해주기도 했었다.

계획적인 모습이 우스워 입술을 씰룩이던 아람은 불현듯 예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관심이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던 얄팍한 계획.

그때 한시우도 이렇게 내 마음이 빤히 보였을까.

제 앞의 남자를 보던 아람은 눈썹을 살포시 구겼다. 이곳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려 했지만, 다시 밀려온 짜증을 견딜 수 없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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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해서 이제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

우아한 미소를 띠며 가방을 팔뚝에 걸쳤다. 그리고 미련 없이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울리며 라운지를 벗어났다.

**

야경이 흘러들어오는 거실은 오직 아스라한 숨소리만 들렸다.

도아는 품 안에 접혀 있던 손을 빼내 시우의 뒷목을 쓰다듬었다.

오늘따라 유독 다정한 그였는데,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사납다고 느껴졌다. 이제껏 나누었던 키스와는 결이 다름을 온몸으로 깨달으며 그동안 그가 참았음을 짐작했다.

내가 호랑이 굴에 들어왔구나.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됐는데.

가파르게 고조되어가는 숨소리를 타고 도아가 내린 결론이었다.

두 눈을 감았어도, 그의 매끈한 감촉이 안달 날 정도로 좋다는 것과 자신의 눈가가 실없이 젖어간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포개어진 입술 사이로 열띤 숨결이 흘러들었다.

이 남자를 밤새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몰려오던 중에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움직임이 돌연 끊어졌다.

흐릿한 시야 속에 눈썹을 어그러트린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도아의 하얀 손끝은 어느새 매끈한 시우의 뺨 위에 닿아 있었다. 그 위에 자신의 손바닥을 살포시 포개는 움직임은 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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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왜 이렇게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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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후덥지근한 숨을 게우며 묻는 목소리가 여전히 애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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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물로 씻은 거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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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아요.”

시우는 도아의 차디찬 손을 주무르듯 그러쥐고는 이마와 귓불을 만지며 호흡을 잠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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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색도 창백하고. 속은? 체한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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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긴 한데요……. 긴장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서.”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툭툭 두드렸던 것이 그래서였구나 싶었다. 시우의 말을 듣고서야 명치끝이 막히고 어지럽다는 증상이 인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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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둔해. 언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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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팔려서요. 누구 덕분에.”

무엇이 문제였을까 기억을 되짚어보니 꿀꺽꿀꺽 삼켰던 주스가 후보에 올랐다.

음식이라도 조심해서 먹었어야 했는데, 너무 맛있어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왜 이렇게 바보 같나 싶어 심술 섞인 투정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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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를 죽으로 할 걸 그랬나. 재수 없는 대표랑 식사도 잘하길래 크게 걱정 안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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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정말 맛있었어요. 주스가 너무 차가워서 속이 놀랐던 거 같아요. 진짜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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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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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핏기없는 얼굴로 웃어 보이는 비서의 손을 가볍게 쓰다듬던 시우가 검지와 엄지 사이를 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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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딱딱하게 느껴지는 압통에 도아가 신음을 내뱉자 그가 인상을 쓰며 한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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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기는. 여기 지압해주면 좀 나아질 거야. 약도 먹자.”

잠시 멈추었던 단단한 손가락이 다시 부드럽게 도아의 손등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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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아는 침대 헤드 보드에 커다란 베개를 대고 편하게 기대어 있었다. 시우가 건넨 소화제를 입에 넣고 미지근한 물을 쭉 들이켜며 눈동자를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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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프려고 그런 게 아닌데요.”

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쭉 들이마신 도아가 빈 컵을 시우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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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내가 도아씨한테 매정했던 것에 대한 복수라는 합리적 의심이 드는데 말이지.”

시우가 낮게 키들거리며 도아의 이마를 짚었다. 노란 조명을 받은 밤 갈색 머리카락이 차가운 손등에서 하늘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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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해요.”

흘겨보는 얼굴에 핏기가 돌고 얼음 같던 손가락 역시 아까보다 따뜻해져 있었다.

도아가 그만하라고 말해도 못 놓아줄 것 같은 밤이었는데, 그녀의 몸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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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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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계속 어지러워서 좀 누워야 할 것 같아요.”

시우가 세워져 있던 베개를 빼 누울 수 있도록 자리를 정돈해 주었다. 서걱거리는 시트 소리가 정적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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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람과 일하고 싶지는 않군요.’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리에 누운 도아가 불현듯 자신이 너무 환자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시우를 말갛게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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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람 싫다고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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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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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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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 나약한 모습이 싫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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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혹시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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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예외니 쓸데없는 걱정은 말고.”

시우는 헛웃음을 입가에 담으며 도아의 코끝을 툭 치고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예외. 자신만 특별해지는 것 같은 그 단어에 도아의 두 볼이 발그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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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건강검진 받기로 한 건 정말 잘하셨어요. 나약해지지 않으려면 미리미리 예방하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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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네. 칭찬해 주셔서 굉장히 감사합니다.”

공주님같이 우아한 어조로 칭찬을 하사하는 모습에 시우는 충신이라도 된 듯 턱 끝을 내리며 대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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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같이 가고 싶었는데, 왜 월튼 비서님 오자마자 전략팀으로 가라고 하신 거예요? 일주일만 늦게 내려가도 동행할 수 있었는데……. 일부러 그러신 거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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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팀장이 인원 충원해 달라고 난리였어. 더 끌었다가는 대표실까지 찾아와서 시위라도 했을 거야.”

절반은 진실, 절반은 거짓이었다.

졸지에 팀원을 빼앗겼던 전략팀장을 위해 하루빨리 도아가 내려가야 했다.

개인적인 욕심으로 그녀를 더 오래 잡아두고 싶기도 했지만, 그랬다면 지켜준다는 실없는 이야기를 하며 병원에 따라올 것이 분명했다.

굳이 병실에 있는 대표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다 말하고 싶으면서도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안일한 욕심이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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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올라가고 전략팀 인원이 금방 채워진다고 들었었는데, 계속 공석으로 있을 줄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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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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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혜 아세요? 저번에 더이브 매장에서 봤던 작고 귀여운 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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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기억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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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가 저희 동기 정보통이에요.”

민 팀장과 민주혜의 얼굴을 동시에 떠올린 시우가 가볍게 끄덕였다.

더이브 매장에서 만났던 민주혜만 기억났으면 좋았을 텐데, 쓸데없이 좋은 기억력은 그 옆에 서 있던 보안 직원까지 생각나게 해 심기가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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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같이 있던 김우진이라는 직원은 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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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진 씨요? 음……. 친한 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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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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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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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웃음기를 지운 시우가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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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슬리는데, 근무 포지션이라도 바꿔버릴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줄 알았던 상대방의 반응이 날카로워지자 도아는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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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제가 느끼기엔 진심인 것 같지 않아요. 호기심 정도인 거 같고. 오히려 주혜랑 잘 맞아 보여요. 둘이 잘됐으면 좋겠어요.”

시우는 자신이 저지른 말을 급하게 수습하는 비서의 모습을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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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잘 아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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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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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대표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도아는 말끝을 조금 뭉개며 고개를 돌렸다. 수줍은 목소리에 검은 눈동자는 덜컹 잠시 흔들렸다.

아마 두 눈을 꼭 감고 있겠지. 빨갛게 물든 그녀의 귓바퀴가 속이 뒤틀리는 하찮은 감정을 진정시켰다.

저 말 한마디가 뭐라고. 시우는 너털한 한숨을 내쉬고는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협탁에 올려두었던 빈 컵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인기척에 놀란 도아가 다급하게 그의 옷소매를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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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려고요?”

어쩐지 익숙한 상황에 시우가 슬며시 입매를 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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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떠오려고. 혹시 모르니 약도 더 가져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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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는 다른 방으로 가려는 줄 알고.”

그제야 슬쩍 올렸던 몸을 다시 누우며 멋쩍게 웃었다. 아직 발그레한 볼이 향기라도 내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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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여기서 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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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갈색 눈동자는 몇 번 급하게 깜빡이는가 싶더니 빤히 그를 올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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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앉아서 자는 모습만 보니 억울해서 말이야. 오늘은 안고라도 자야겠어.”

단정한 대답이었지만, 그 한마디에 긴장감과 낯선 기대감이 뒤섞여 온몸을 타고 흘렀다.

침실을 가로질러 떠나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도아는 그 울림이 귀에서 들리는 소리인지 몸에서 나는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몇 번이고 앞가슴에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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