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9화. 바람 (59/85)


제59화. 바람
2022.05.23.


석양빛이 창문을 통해 깊게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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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검사받느라 힘들었을 텐데 하루 정도는 쉬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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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참을 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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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색이 저번보다 좋기는 하네. 환자복은 어차피 안 입을 거니 치워둘게.”

월튼이 노트북을 덮으려 손을 뻗자 시우가 온화하게 저지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 의자에 걸려 있던 외투를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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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아가 일정 조정을 잘해놔서 괜찮다니깐 그러네. 너 진짜 혼자 있을 수 있는 거지?”

이어 맥코트를 걸치며 흐르듯 내보낸 이야기에 시우의 부드러운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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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서라고 불러. 이름 부르지 말고.”

단호한 목소리에 단추를 잠그던 행동이 일시 정지된 것처럼 멈추었다. 그러나 끔뻑거리던 눈꺼풀에 곧 미소가 실실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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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름만 불러도 질투 나?”

그 웃음이 못마땅한 듯 시우가 인상 썼지만 월튼은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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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빠졌는데,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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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없긴. 빨리 가.”

시우는 상종할 가치가 없다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월튼은 이미 나갈 차비를 다 마쳤음에도 발걸음을 떼지 않고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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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말이야 휴대폰 볼 때도 도아, 아니 이 비서랑 연락할 때는 표정이 다른 건 알지? 뭐, 난 그냥 좋다고 생각해. 원래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월튼은 시우와 어릴 적 함께 다니던 곳들을 떠올렸다. 시우의 집, 자신의 집, 친절한 이웃들의 근사한 정원, 오래된 나무들이 가득했던 산, 조금 멀리 떨어진 호숫가.

또래 중 나무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시우였다. 눈망울을 반짝이며 나무를 설명해주던 그 모습은, 친구지만 멋지다고 늘 생각했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믿었던 그 분위기가 어렴풋이 느껴지는 요즘이었다. 그것이 괜스레 좋아 가끔 기분이 들떴다.

앞으로도 딱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돌린 월튼의 걸음이 멈춘 건 시우의 목소리가 들리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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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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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고개만 빼꼼 돌린 월튼이 정말 뜻을 모르겠다는듯 콧잔등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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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표정이 그런 거 나도 안다고.”

시우가 입매를 비스듬히 올리며 등을 기댔다. 비서는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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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이것봐라?”

저딴 대답이라니. 역시 그때와 같을 순 없었다.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어린 시우의 순수함은 사라진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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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가. 내일 늦지말고.”

친구의 황당한 눈을 바라보던 시우가 무엇이 문제냐는 듯 고개를 사선으로 살짝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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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예. 대표님.”

대표가 걱정되어 밤에라도 잠깐 들릴까 했지만, 정말 컨디션이 괜찮아 보였다. 웃음 섞인 부드러운 대답을 끝으로 월튼은 병실을 떠났다.

공간은 다시 조용해졌다.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의 고요함 속에서 시우는 집중했다.

비서의 말대로 오늘 꼭 해야만 하는 이슈는 없었다. 하지만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안감을 감추고자 더 몰두했다. 초조함을 잠재우기 위해 일에 집중하는 건 익숙한 일과였다.

그렇게 밤을 새우기도 하고, 약을 먹기도 하고, 쓰고 찝찝한 시간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올 것 같았던 그 불편한 기분을 끝낸 건 도아의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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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진은 다 끝나셨어요? 괜찮아요?]

업무 중에는 연락도 잘 안 하는 아주 모범적인 직원. 딱히 기다린 것 같지 않았는데,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메시지를 보는 순간 알았다.

툭툭 화면 두드려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낸 시우는 잠시 시선을 해가 넘어간 하늘로 보냈다.

저물어 가는 하늘이 유독 며칠 전 새벽과 닮아 있었다.

얕은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품 안에서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는 도아를 느꼈다. 믿기지 않아 가녀린 어깨를 쓰다듬고 머리칼을 쓸었다.

이마를 만져도, 안아 들고 다른 방으로 옮겨도 절대 깨지 않을 깊은 소리였다. 변하는 하늘빛을 명화 삼아 도아의 숨소리를 타계한 음악가의 명연주 삼아 한참을 감상했다.

그렇게 낯선 평온을 즐기고 있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본사에서 온 연락이었다. 낮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며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통화를 마치고,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를 준비하던 시우는 침실의 커튼을 열어둔 것이 생각나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커튼레일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새벽빛은 사라지고 방은 어두워졌다. 흘러내린 밤 갈색 머릿결을 뒤로 쓸어 넘겨주는 손길에 도아가 볼을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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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우.’

잠긴 목소리에 잇닿아 있던 손끝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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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추워.’

제정신 아닐 때는 반말이 입에 붙었지.

입구를 한번 훑은 시우는 별다른 고민 없이 다시 도아의 옆에 몸을 뉘었다. 그러자 도아는 기다린 사람처럼 안기듯 품으로 파고들었다.

몸이 달아오르는 기분 탓에 나갈까도 고민했지만, 이 여자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품에 쏙 들어온 도아는 풀향기 같은 상쾌하고 선선한 기운이 좋은지 시우의 체온이 좋은지 만족스럽게 입매를 늘렸다.

그렇게 한참을 속살거리던 호흡은 점점 잠잠해지더니 이내 부스럭거리는 움직임과 함께 툭 멈추었다. 어둠 속에 익숙해져 있던 눈은 아기 동물 같은 그 행동을 느긋하게 관찰했다.

그녀가 한 것은 고작 고개를 올려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본 것이 다인데, 그것이 뭐라고 마음마저 요동쳤다.

애써 짓눌렀던 평온함은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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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 때문에 깬 거예요?’

그렇게 천진한 표정으로 보지 말았어야지. 웃지 말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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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다 나았나 봐요.’

몸 상태가 아직 안 좋다고 했어야지.

그 웃음과 빛깔과 향기에 취해 홀린 듯이 입술을 부딪힌 건 어쩌면 충동적이기도 했다.

물기 서려 있는 눈동자를 마주하면 가까이 있는데도 더 가까이 있고 싶었다.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달려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시간이 가는 것이 아까워 습관처럼 시계를 확인하고, 가녀린 어깨를 다시 끌어안았다.

도아의 얼굴과 몸을 집요하게 매만지던 커다란 손을 바라보던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가을바람이 두 뺨을 휘감고 짙푸른 속눈썹을 흔들었다.

도아를 향한 마음이 제가 여태껏 느꼈던 감정과 다르단 걸 이제는 인정했다. 불안과 공포가 엄습하는 걸 막을 수 없었듯, 이 마음이 다가오는 걸 막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달큰하기도 하고, 쓰기도 한 이 기분이 오랜 기간 자리 잡았던 공허함을 메꾸어 주는 듯했다.

죽음으로 나아가던 하루하루가 멈춘 듯한.

괜찮아질 리 없다고 생각해서 포기했었는데, 괜찮아지고 싶었다.

자신의 얼굴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부모님의 잔상이 마음속에서만큼은 흐릿해지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

소파에 편하게 앉아 책장을 넘기는데, 뜻밖의 손님이 왔다.

아직 문 뒤에 숨어 있는 얼굴이 다 드러나지도 않았지만 벌써 누군지 알아차리고 마음이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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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나뭇잎 찰랑거리듯 시우를 부른 사람은 역시나 도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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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셨죠? 월튼 비서님이 미리 직원분에게 말해주셔서 들어올 수 있었어요.”

목소리의 주인은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병실 안으로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들고 있던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아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어 보드랍고 가는 손가락을 보채듯 그러쥐며 입매를 가늘게 올렸다.

오자마자 큰 그림자를 마주한 도아는 주춤하나 싶더니 이내 손을 들어 올려 단단한 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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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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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도아는 고목을 끌어안던 어린 시우처럼 제 몸을 바짝 가져다 대었다. 졸지에 나무가 되어버린 시우가 피식거리며 얇은 어깨를 토닥였다.

차분한 목소리와 솜털 같은 손짓에 지끈거리던 머리와 답답하던 호흡이 조금씩 진정이 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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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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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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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 불러봐.”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편안해 보였던 도아가 뜻밖의 권유에 턱 끝을 번쩍 들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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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우……. 대표님……?”

시우가 대표님 단어를 기어코 붙인 도아의 콧잔등을 툭 건드렸다. 그녀는 간지러운 듯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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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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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우.”

빨간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도아는 그것이 어색한지 그만 두 볼이 발그랗게 물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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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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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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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 이름. 제정신 아니거나 바람 소리 클 때만 부르지 말고.”

기억을 더듬던 도아는 무언가 생각난 듯 시우의 허리를 더 단단히 끌어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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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어땠어? 일은 할 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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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하고 있어요. 비서 일도 대표님이 조금만 다정하게 해주셨으면 재미있게 했을 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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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정이 있었으니 봐줘.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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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요? 아닌데? 업무 적응하느라 그런가 봐요.”

도아가 양 볼을 힘차게 끌어올리며 대답했지만, 빈 알맹이 같은 그 표정을 시우가 놓칠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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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힘들게 하면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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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자르기라도 하시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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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할 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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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그런 농담 하지 마세요. 정말 하실 것 같단 말이에요.”

도아는 예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시우를 풀어주었다.

사실 오늘 낮에 라운지에서 수군거리던 이야기를 듣지 않았어도, 첫날부터 어렴풋이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던 참이었다. 부모님이 실망할까 칭찬을 안 해줄까 눈치를 보며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첫날, 상사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와 자신의 책상을 가볍게 쓸어 만졌다. 누구든 곧 전략팀으로 올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은 팀장 덕분에 책상은 작은 소모품 하나 치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사무실 사람들과 특별할 것 없는 아침 인사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가슴이 찡해져 입술을 살포시 깨물었다.

비서실에 올라와 혼자 바쁘게 움직이던 시간. 시우에게 상처받는 말들을 들은 날이면 어쩐지 더 답답하고 외로웠다.

누군가와 이렇게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싶었다. 전날 본 영화 줄거리, 새로 오픈한 카페 이야기, 점심 메뉴에 대한 고민. 그런 시답잖은 주제로 대화하는 순간들이 그리웠다.

대표에게 시달리다가 더러워서 관두거나, 겨우겨우 돌아와도 아마 다른 부서로 가겠거니.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이렇게 평화롭게, 사랑까지 움켜쥐고 돌아왔다는 것이 얼떨떨했다.

하지만 행복하던 감상은 회의에 들어가면서 멈췄다.

전략팀의 현재 주력업무는 4호점 오픈이었다. 해당 부서가 따로 있지만 오픈 일정을 안정적으로 맞추기 위해 전략팀을 비롯한 몇몇 팀이 서포트하고 있었다.

특히, 에이치 코리아에서 단독으로 실시하는 커스텀 서비스는 준비 기간이 짧은 만큼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도아라는 사실을 전략팀장이 자랑스럽게 말하며 칭찬했다.

그 내용에 짧게 수군거리던 분위기가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몇 달 전과는 다른 시선을 보내는 몇몇 직원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오늘 직접 두 눈과 귀로 확인하니 생각보다 마음이 무겁기는 했다.

혼자 남은 라운지에서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는데, 사뿐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럽게 도아의 눈길이 문 쪽을 향했다.

곧이어 총총 머리카락을 귀엽게 흩날리는 주혜가 나타났다. 그녀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곳에서, 그것도 도아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하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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