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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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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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괜찮아
2022.06.13.
“잘라.”
집무실에 돌아온 시우가 처음 꺼낸 말이었다.
“뭐?”
월튼은 황당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치듯 되물었다.
유리라 디자이너는 천 회장이 보낸 차량을 타고 떠났다. 도아를 걱정하는 리라를 향해 시우는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차분하게 대답해주었다.
차량이 떠나자 그는 웃음기를 지우고 침묵했다. 걸음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깔끔하고 단정했다.
움직임에서 신경질적인 기운이 느껴지지도 않고, 한숨을 연거푸 내쉬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서늘한 기분이 들어 업무 이야기조차 쉬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대표의 살벌한 표정을 보아하니 자신의 눈치에 무한한 칭찬을 보내고 싶었다.
거기서 나불거렸다면 아마 자신도 함께 잘렸겠지.
“누구를?”
부자연스럽게 침을 삼킨 월튼이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바짝 다가왔다.
“둘 다. 회사에서 내보내. 저딴 직원 필요 없으니.”
“야! 이게 그렇게 감정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야?”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한 손으로 어깨를 누른 시우가 인상을 썼다.
“매우 업무적으로 처리하는 거야.”
월튼이 걱정스럽게 시우의 안색을 살폈다.
처음 이곳에 와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까지 몇 년. 골머리 썩이던 사건과 직원은 많았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말한 적 없는 대표였다.
“민 팀장이 그동안 저지른 실수들이야 너도 알고 있고. 채용 건도 비리가 있었는지 다시 한번 알아봐. 오늘 일도.”
그 모습이 당황스러우면서도 꼭 어릴 때 자신과 싸워대던 어린 시우 같아 반갑기도 했다.
“자. 일단 알겠어. 정리해서 보고할 테니까 그때 다시 결정해.”
허무한 듯 픽 한숨을 흘린 월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시킬 일은?”
탁탁. 키보드를 두드리며 잠든 컴퓨터를 깨우던 시우가 기다렸다는 듯 시선을 맞추었다.
**
화면에 뜬 번호를 확인한 도아는 분홍빛 입술을 가볍게 오므렸다 늘린 후 수화기를 들었다.
“네. 팀장님.”
작은 노력 덕분에 적당히 밝은 분위기의 목소리가 나왔다.
-도아 씨, 대표님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는데.
“비서실이요?”
일순 도아의 눈동자가 덜컹거렸다. 대표님이 자신을 불렀나 싶어 당황스러우면서도 알 수 없는 반가움이 밀려왔다.
-응. 월튼 비서님한테 연락 왔는데. 유리라 디자이너가 인사하고 싶어 한다고 잠깐 올라 오라셔.
“아……. 네, 네 알겠습니다.”
하마터면 실망한 목소리를 그대로 흘릴 뻔했다.
시우는 이미 회사에 없을 텐데. 무슨 헛된 기대를 하는 거야.
도아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스스로를 채근했다.
잔잔하던 마음이 술렁거리는 듯한 기분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이 건넨 보안카드와 핸드폰을 대충 움켜쥔 도아가 조용히 복도로 나왔다.
아까 그 소란이 일었던 곳을 지나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한 시간 동안 일을 하긴 했는데 어떻게 했는지 정신이 몽롱했다. 사과 연락이 여기저기서 왔지만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정원.”
승강기 벽에 힘없이 머리를 기댄 도아는 오랜만에 보게 될 정원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무들이 만들어 낸 햇빛의 조각들을. 초록 잎들 사이에 서 있는 시우를. 그 부드러운 시선을.
지그시 감았던 눈꺼풀을 올리자 눈시울이 조금 촉촉해져 있었다.
부모님은 일에 치여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부모님의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단지, 조금 외로울 뿐이었다.
시우가 바빠서 지금 옆에 없지만, 그의 사랑이 의심되지는 않았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지금 옆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철없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았는데. 왜 이러지?”
유치하게 투정을 부리는 마음이 당황스러운 듯 도아는 몸을 똑바로 고쳐세우고 볼 끝을 봉긋 올렸다.
리라를 만날 때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가을이 지나가는 정원이 도아를 반겼다. 상록수와 단풍나무, 색바랜 나무들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정원이 반사된 대리석 바닥에는 여름과 다른 붉은 색조가 곱게 담겨 있었다.
바람을 타고 낙엽들이 하늘 저편으로 날아올랐다. 그것이 진득한 향기라도 풍기는 것도 아닌데, 취하는 기분이 들어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시선은 서편에 몰려 있는 먹장구름에서 상록수 위에 트리 장식처럼 떨어진 낙엽들로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그 나무의 모습이 귀여워 작게 미소 짓는데, 나무 뒤에서 누군가 유유히 모습을 드러냈다.
여유롭고 선선한 분위기의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자 핸드폰을 그러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눈초리를 가늘게 만들어 로비를 응시하던 시우는 도아를 발견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왜 안 들어오고 거기에 서 있어.”
로비로 이어진 문을 열자 가을바람에 시우의 목소리가 실려 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는 단정하고 기품 있는 모양새로 도아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잡고 기다렸다.
“대표님?”
눈이 일순 커졌던 도아는 역광에 사람을 잘못 봤나 싶었는지 고개를 기울여 다시 한번 상대방의 신원을 확인했다.
“왜 이렇게 놀라.”
시우가 다감한 눈빛을 보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깜빡이던 도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조심스럽게 한 발짝씩 앞으로 다가왔다.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는 행동이 진정되어 가는 동안에도 시우의 시선은 오롯이 도아만을 향해 있었다.
마침내 남색 플랫 슈즈가 정원바닥에 닿았다.
시우는 기다렸다는 듯 유리문을 잠그고 멀뚱히 서 있는 도아의 손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이어 가느다란 손가락을 자신의 쪽으로 당겨 정원의 깊숙한 곳으로 끌고 갔다.
도아는 이것이 무슨 일인가 싶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발치에 밟히는 낙엽들과 바람 소리가 꿈결처럼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정원의 가장 안쪽에 도착하자 시우가 몸을 돌려세웠다.
놀랐는지 호흡이 거칠어진 도아의 양 볼이 발그랗게 물들어 있었다. 나무 사이사이를 뚫고 들어온 바람이 그 뺨을 스쳐 시우에게 닿았다.
눈동자에 물기가 자욱이 차 있는 것이 보이면서도 그 모습조차 아름다워 보여 헛웃음이 나왔다.
시우가 도아의 하얀 얼굴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눈물이 가득 찬 눈동자를 마주했다. 꽉 다문 다홍빛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턱을 쓰다듬던 크고 매끈한 손을 올려 눈가를 여미듯 닦아주었다.
뭉근하게 핥는 것도 아닌 그 감각이 견디기 힘들 만큼 간지러워서, 도아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아슬아슬하게 한가득 담겨 있는 물주머니를 누가 찌르고 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눈물이 쏟아져 나올 수는 없었다.
시우의 손에 이끌려 오는 그 몇 걸음 동안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캄캄한 목구멍으로 까슬까슬한 투정이 새어 나오는 것을 욱여넣었다.
그랬는데,
정원이 너무 평화로워서. 시우의 눈빛이 너무 따스해서.
그래서 결국 처음으로 누군가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게 되었다.
**
“선생님?”
누군가 상념에 허우적거리는 아람을 불렀다. 멍한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던 그녀는 고개를 가로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아. 죄송해요.”
지금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배영희 환자. 시우와 만날 수 있는 적당한 핑곗거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난 후부터 이 환자와 대화하면 자꾸만 시우가 떠올라 전문적인 태도가 나오지 못했다. 거기에 월튼의 전화까지.
시우가 너무 탐났다. 그와 가까워지기를 재고 따지며 철저히 계산하고 또 계산하며 옆에 머물렀는데……. 왜 이렇게 된 걸까.
뭉개질 듯한 마음을 달래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늘은 컨디션이 어떠세요?”
“…….”
눈에 띄게 초췌한 모습을 보아하니 처방 약도 제대로 먹지 않는 게 분명했다.
“잠을 못 주무셨어요?”
“새로운 가게…….”
“네?”
“새로운 가게를 연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날 찾아가면 만날 수 있을까요? 사과하고 싶은데…….”
“아뇨. 환자분. 아니, 아니 배영희 씨. 그러지 마세요. 어차피 만날 수도 없을 거예요.”
중얼중얼 이야기를 쏟아내려는 것을 아람이 급히 말렸다.
“만날 수 없다고 어떻게 단정 짓는 거예요?”
“그.……. 새로 가게를 열었으니……. 얼마나 바쁘겠어요?”
영희의 입에서 ‘에이치 코리아’라는 사명이 등장한 적은 없었다. 혹시나 자신이 뒷조사라도 한 것처럼 보일까 봐 시치미 떼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저는 그럼 이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나요? 요즘은 잠도 못 자고, 식욕도 없어요.”
“운동은 하시나요? 하기 싫더라도 몸을 일단 움직이는 게 중요하답니다.”
“매듭이 엉켜 있는데, 해서 뭐해요?”
엉켜있는 매듭을 풀고 싶은 건 아람도 마찬가지였다. 짧게 한 숨을 내쉬었다.
“상대방을 만나면 뭐라고 사과하고 싶으신가요?”
“미안했다고요. 돈도 많이 들었을 텐데 잘 해결해 줘서 고맙고……. 또.”
사과를 한다는 가정만으로 수심이 그득하던 영희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사실 해결 방법이 확실한 마음의 짐은 그것을 풀어주는 게 환자에게 가장 좋은 방법일 수도 있었다.
자신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처음에는 절대 안 되는 일이라고 단정 짓던 아람의 마음은 어느 날부터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기분 좋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하는 목소리 위로 또다시 시우가 떠올랐다.
‘너도 내 이름 아네?’
그때도 매정하게 뒤돌아섰다가 돌아봐 주었다.
‘월튼 브라운이라고 합니다. 저희 대표님의 정신과 주치의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름은 한시우입니다. 아시죠?’
끝났다고 생각하고 살아갈 때도 운명처럼 너는 다시 와주었다.
‘이제 의사로도, 친구로도 찾아오지 마.’
그러니깐, 그렇게 말했어도 아직 괜찮지 않을까.
시우를 만난다.
시끄럽고 요란하던 생각과 감정이 결론에 도달하자마자 평온을 되찾았다.
눈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아람이 다시 예쁘게 웃었다.
“한번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대신 제가 동행하는 걸로 해요.”
“정말이세요. 선생님? 그래도 될까요?”
놀란 영희가 눈동자를 동그랗게 확장시키며 되물었다.
그녀는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라 그것이 조금 걸렸지만, 어차피 자신이 동행할 것이니 괜찮았다.
흥분하며 목소리가 커졌던 탓에 밖에 있던 간호사는 또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문을 열어 상황을 확인했다.
아람은 괜찮다며 우아하게 손짓을 해 보이고는 다시 영희에게 집중했다.
“환자분은 마음이 불안한 상태예요. 제가 그 가게에 연락하고 약속을 잡아볼게요. 상호를 알려주시겠어요?”
“가구 가게예요. 에치 가구.”
아람은 펜을 쥔 손끝에 힘을 주어 꾹꾹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에치 가구면, 에이치 코리아를 말씀하는 거 맞나요?”
“네! 맞아요. 그랬던 거 같아요”
“세상에. 그럼 진작에 말씀해주시지 그랬어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었는데. 제가 그곳 대표와 잘 알아요.”
희망적인 내용에 영희는 고개를 더 세차게 끄덕였다. 눈빛은 별처럼 반짝였다.
“잘 해결될 거예요. 꼭 그래야죠.”
아람은 고맙다고 말하는 상대방에게 잘 풀릴 거라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