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저도요
(66/85)
제66화. 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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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저도요
2022.06.17.
“그냥 대표님한테 칭찬받고 싶어서……. 잘했다는, 그 한마디 듣고……. 듣고 싶어서 노력한 건데.”
한참 동안 시우의 품에서 서럽게 눈물 흘리던 도아가 할딱거리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저는 그냥 그래요. 어릴 때도 칭찬 한마디 받으면 그게 꼭 부모님의 사랑인 것 같고, 그걸로 인정받는 기분이 들고. 그래서 여기서도 그냥 열심히 한 건데.”
반짝이며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훔치고, 다시 시우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잘못한 거 없어. 내가 알지. 우리 비서는 뭐든 열심히 하지.”
호흡을 들이마실 때마다 가녀린 어깨가 함께 들썩였다.
“칭찬을 받는 게 좋아서 공부했더니, 그랬더니 점점 더 성적이 오르고……. 그러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등수가 많이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본 실망한 눈빛이. 저는 그게 너무 무섭고 싫었어요. 꼭 부모님이 저를 싫어하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더 그런 상황이 안되려고 노력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는 도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우는 봄날에 자신을 바라보던 비서의 모습을 떠올렸다.
“혼나도 참고, 화나도 참으면서. 맞지?”
단단한 손이 작고 동그란 뒷머리를 달래듯 부드럽게 매만졌다.
“노력해도, 노력하지 않아도 다 괜찮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 때문에 네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마.”
다정한 목소리와 손길이 격양된 감정을 천천히 누그러트렸다.
자신을 누구보다 긴장시켰던 사람 앞에서 이렇게까지 민낯을 드러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폭풍처럼 몰아치던 울음이 지나가자 오물을 씻어낸 듯 마음이 조금 개운해졌다. 도아가 불안한 숨소리를 잠재우며 고개를 들었다.
시우가 크고 긴 손으로 얼굴에 남아 있는 물기를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그 힘을 따라서 매끈한 피부가 쫀득하게 따라왔다.
눈과 코, 귀까지 빨개진 모습이 어린아이가 따로 없었다.
“다 울었어?”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듯이 미소 지었다. 도아는 코를 한번 훌쩍이고는 작게 끄덕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투명해 보이는 눈동자가 시우를 빤히 보다 시선을 급히 돌렸다.
아마 응석을 부린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몰려온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대표님 얼굴을 보니깐 저도 모르게…….”
도아가 단단한 앞가슴을 밀며 멀어지려는 것을 커다란 손이 붙잡아 끌어당겼다.
“실컷 울어놓고 이제 와서 뭘 그렇게 민망해해.”
속절없이 시우의 품에 다시 안기게 된 도아의 속눈썹이 잘게 흔들렸다. 그러나 곧 모닥불 같은 온기가 전해졌다. 포근한 침구에 몸을 뉜 듯 온몸이 나른해졌다.
“괜찮아.”
시우는 나직하게 도아를 달래며 촘촘한 속눈썹, 앙증맞게 솟은 콧대, 물기가 가득한 윗뺨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마음을 적셨다.
우는 사람이 싫었다. 병실에서 눈물 흘리던 어머니가 떠올라 싫었다.
그랬는데, 울음을 꼭 참으며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를 보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였다.
아무 일 없다며 웃어 보이던 얼굴. 조롱거리가 되어 화가 나는 것을 악을 쓰며 참는 모습. 그러다 곪았던 울음을 터트린 지금.
저 품에서 이렇게 마음을 털어놓는 여자가 한없이 사랑스러워 더욱 꼭 안았다.
찬 바람이 닿지 않도록, 슬픔이 번지지 않도록.
어린 자신을 달래주고 싶었던 만큼 꼭 끌어안았다.
**
숲속에 있는 것 같았다. 상쾌한 향기가 가득 풍기고, 모닥불이 켜진 듯 따사로웠다.
그 안락함에 마음이 노곤해졌던 도아가 고개를 황급히 들어 올렸다.
“대표님. 근데 왜 여기 계세요?”
오랜 시간 울음을 쏟아내고, 화가 사그라든 도아는 그제야 시우의 존재를 의심했다.
“그걸, 이제서야?”
엉뚱한 행동에 싱겁게 웃음 지었다.
“아니. 저는 디자이너님이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유리라 디자이너라면 진작에 천 회장님 만나러 갔어.”
“그럼 처음부터 대표님이 부르신 거예요? 왜 디자이너님이 불렀다고 하셨어요?”
“괜히, 이야기 나올까 봐.”
“……그런 거 신경 안 쓰지 않으셨어요?”
“이제 쓰려고. 나는 상관없지만, 도아 씨는 상관이 있을 테니.”
도아는 상대방의 검은 눈동자를 빤히 보다 몸을 돌려 벤치에 앉았다. 시우 역시 그녀의 옆자리에 느긋하게 자리했다.
“4호점 가신 줄 알았어요.”
“취소했어.”
취소?
놀란 도아가 상체를 비틀어 시우의 옆얼굴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왜요? 아까 싸웠던 것 때문에 신경 쓰여서 그런 거세요?”
“그것 때문에 취소한 거 아니야.”
시우가 실소하듯 나직이 대답하자 도아는 괜히 앞서갔나 싶어 허겁지겁 몸을 고쳐 앉았다.
먹구름 지나간 하늘에서 새하얀 햇빛이 떨어졌다.
“그전에.”
“문자 받고 취소했어. 옆에 있어 주고 싶어서.”
선선하게 웃어 보이는 시우의 얼굴 위로 하얀 반짝임이 아스라하게 번졌다. 바람이 차고 매서운 날이었는데, 떨어지는 햇살은 봄볕처럼 따뜻했다.
한시우는 일 처리가 칼 같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누구 하나 때문에 일정을 바꿀 사람이 아닌걸 도아는 알았다.
그런데 왜. 지금도 이렇게까지.
또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아 도아는 핑그르르 시선을 올렸다. 눈동자는 바뀌는 구름의 모양을 따라갔다.
“혹시……. 소문 말고, 올라왔다는 게시글까지 다 보셨어요?”
“응.”
“말도 안 되는 내용 투성인데, 대표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안달 났다는 내용은 맞는 것 같아요.”
도아가 허무한 한숨을 내뱉으며 씁쓸하게 입매를 늘렸다. 그러다 번득 인상을 쓰며 시우를 쏘아보았다.
“그런데 왜 대표님이 저한테 넘어왔다는 소리는 없죠?”
“그러게. 내가 이렇게 빠져 있는데. 그러니깐 헛소문이지.”
투정이 귀여워 시우의 표정이 헤프게 풀어졌다.
바람에 부스스해진 머릿결을 깔끔하게 정돈해주며 기꺼이 비서의 편을 들었다.
“대표가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회사 분위기가 이 모양이냐고 화내도 돼.”
“그러게요. 한시우 대표님. 이게 뭡니까?”
“투정도 더 부려. 내가 비서한테 매정하게 대했던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다 받아줄 테니.”
가벼운 농담에 도아가 대꾸하자 내려보는 시우의 눈빛에 안도감이 실렸다.
마음을 잠재우며 그를 흘깃 보던 도아의 눈동자가 흠칫하며 커졌다.
대표의 옷에 자신의 눈물이 만든 얼룩이 선명하고 크게 남아 있었다.
“옷이……. 제가 다 적셨어요.”
도아는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눈을 질끈 감으며 황급히 일어났다.
시우는 셔츠에 남아 있는 그 괴상한 자국을 확인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사라지는 게 아쉬운 데. 집에 걸어놔야겠어.”
“네? 어디다가요? 마크 로이 작품 옆에다요?”
“마크 로이 작품보다 이게 더 값지지 않을까.”
“농담하지 말고요. 어떡하죠?”
“괜찮아. 나는 옷도 많고, 오늘은 시간도 많아. 그러니깐 바람 쐬러 갈까?”
대표님의 시간을 더 뺏을 수 없다고 말하려던 도아는 충동적으로 계획을 바꿨다.
“좋아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세웠다. 찬 기운을 가득 머금은 머리칼이 나풀거렸다.
시우는 며칠 전보다 편안해 보이는 도아의 미소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도요.”
“응?”
아직 앉아 있는 대표에게 비서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매끈한 두 뺨을 조심스럽게 만지는 손끝은 가늘게 떨렸다.
“대표님도 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이렇게 옆에 있어 주니깐 너무 좋아. 그러니깐 힘들면 꼭 저한테 말해요.”
어린아이보다 더 맑게 웃었다. 해지는 석양빛이 가을의 정원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
불 꺼진 비상계단에 쭈그려 앉은 주혜가 작게 중얼거렸다.
“짜증 나. 짜증 나.”
벌겋게 변한 눈시울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쾅.
무거운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까마득히 먼 발치에서 들려왔지만 상관없었다. 인적이 드문 여기까지 올라올 사람은 어차피 없었다.
주혜는 작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다시 훌쩍였다.
잔뜩 화가 난 고모의 표정,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대표의 얼굴, 술렁이던 구경꾼들. 그리고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도아의 눈빛
시간이 지날수록 수치심은 선명해졌다.
앞으로 회사는 어떻게 다녀야 하지. 그때 동기들 앞에서 이야기하면 안 됐었는데. 오늘 사무실 앞에서 큰소리만 내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날 뭐라고 생각할까?
무섭게 뻗어 나가는 후회와 두려움이 머릿속에서 사방팔방 번져나갔다.
그 지저분한 걱정과 원망이 또다시 도아를 향하려는 찰나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귓가에서 울리는 발소리 때문이었다.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가 점점 커져 이제 제법 가까이에서 들렸다. 그 소리가 목을 조여오는 것만 같아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왜 계속 올라오지?
저 소리의 주인이 왜 여기에 오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주혜가 난간을 꽉 움켜쥐었다.
불행히도 두 다리는 덜덜 떨릴 뿐,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를 마주하는 게 무서웠다.
뚜벅뚜벅.
그 짜증 나는 발걸음이 코너를 돌려는 순간에 주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몸에 힘을 주었다.
“여기 있네.”
목소리의 주인은 숨이 조금 차 보였다.
“민주혜.”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에 검은 정장을 입은 우진이 주혜를 발견하고 밝게 웃었다.
“왜! 왜?”
뒷걸음질 치려던 주혜는 계단에 뒤꿈치를 부딪히며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덕분에 예상보다 더 빨리 우진과 같은 선상에서 눈빛을 교류하게 되었다.
비상계단에 불이 들어오자 주혜는 다급히 머리카락으로 화장번진 얼굴을 가렸다.
“이야기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이 비서님이랑 싸웠다면서요.”
“그래서 뭐요? 저한테 왜 그랬냐고 따지러 온 거예요? 지금? 이도아한테 왜 그랬냐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던 주혜가 힘주어 소리쳤다.
엉망이 된 지금 상황보다 도아 때문에 우진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
우진의 한숨 소리가 자명종 소리 만큼이나 세차게 골을 때렸다.
“아니요. 주혜 씨 걱정되어서 왔어요.”
부들거리는 주혜를 향해 우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굳어 있는 주혜 옆에 털썩 앉았다.
오랜만에 벌어진 소란은 삽시간에 다른 층으로 퍼져나갔다. 보안팀 역시 그 사건을 전해 듣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접하던 우진의 얼굴이 구겨진 것은 그 사건의 주인공이 누군지를 들으면서였다.
이 비서님에 관한 소문이 처음 돌았을 때는 정말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굳이 당사자에게 말해줄 필요도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점점 더 내용은 커져만 갔고, 이 비서님이 걱정되어가는 찰나였는데.
그 소문을 퍼트린 게 주혜였다는 말도 안 되는 소식이 도착했다.
우진 씨!
잘잘못을 떠나 자신을 부르며 해맑게 웃던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어 가뜩이나 울음 많고 여린 그녀가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을지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사무실에 올라갔다가 라운지를 살피다 땡땡이를 피울 때 온다던 이곳이 생각나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전 주혜 씨 편이에요. 그냥 그렇게 정했으니 다 말해요. 왜 그랬어요?”
우진이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앙증맞은 손을 쥐며 달래듯 물었다.
내 편.
조금 전, 사무실 앞에서 그토록 찾아도 보이지 않던 자신의 편이 생겼다.
주혜는 그 사실이, 그리고 그 사람이 우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