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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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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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정
2022.06.20.
“그럼 민 팀장은 결국 관두기로 한 거야?”
“난 회사에서 많이 봐준 거 같아. 잘려야 하는 거 아냐?”
“감봉도 몇 개월 됐다고 봤는데?”
“몇 가지 일들도 더 있었다며! 난 우리 회사에 저런 사람 있는 거 싫어.”
“쉿쉿. 조용.”
인사팀장이 지나가자 쑥덕거리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두툼한 손으로 안경을 고쳐 끼우며 아무것도 안 들린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지나갔다.
인사이동 시즌에 맞춰 사내 인트라넷에 공고가 올라왔다.
사건이 벌어진 날부터 불면증이 도졌던 민 팀장은 덜덜 떨며 게시글을 확인했다.
서울과 먼 곳. 전혀 상관없는 업무를 하게 되었음에도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시우와 면담을 한 이후부터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 사건이 벌어진 날, 헤드헌팅에서 괜찮은 곳을 제안해 쫓기듯 수락했다.
현 직장에서 잘리는 것은 이미 채용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도 뒤집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이제 한시름 놓았지 싶었다.
걱정되는 것은 주혜였는데, 어쩐 일인지 자신보다 더 씩씩하게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직 고모에 대한 배신감이 가시지 않았는지 서로 데면데면하는 중이었다.
창밖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나뭇가지가 앙상했다.
회사는 어느 때보다 바빴다. 다음 주면 4호점 오픈이고, 사업 보고를 위해 대표가 직접 미국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신제품 라인업이 공개되고, 연말에 진행되는 가장 큰 세일 기간까지.
그러나 직원들은 활기찼다.
에이치 코리아의 장점은 워라벨이 보장되는 것. 일이 힘들면 휴가와 보상이 기대 이상으로 제공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민 팀장은 젊은 대표가 꼴 보기 싫으면서도 은연중에 괜찮은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도는데, 활짝 웃으며 지나가는 도아가 보였다.
비서실로 가라는 말을 전했을 때 얼빠진 사람이 되었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민 팀장은 자리로 돌아와 도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신이 비서실로 보냈던 그 회의실에서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
민 팀장의 얼굴에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가 완연했다.
“내가 저번에 그렇게 말해서 많이 놀랐죠? 조카가 뭔지. 그러면 안 됐는데.”
괜찮습니다.
도아는 그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고모와 조카가 너희 둘 같지는 않아.
도아는 가볍게 웃는 것으로 짧은 대답을 대신했다.
두 사람을 자르겠다는 시우를 말린 건 자신이었다.
대표가 여태껏 처리했던 방식과 다른 행보를 가는 게 싫었다.
그게 전부였다. 두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우를 위해서.
웃음기 사라진 도아의 잠잠한 표정이 회의실 유리면에 고스란히 비쳤다.
사과받으면 그러시지 말라고, 자신은 괜찮다고 말할 줄 알았던 사원이 가감 없는 표정을 짓자 민 팀장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뭐. 이제 와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도아 씨가 비서 업무를 제일 잘할 것 같다고 여러 명이 추천을 했었어. 그래서 올라갔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야.”
물론. 도아를 콕 집어 여론몰이를 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게 그거라 판단했다.
“초반에는 대표님이 전략팀이랑 같이 움직이는 경우가 많아서 자연스럽게 비서실 업무가 그쪽으로 넘어갔지. 덕분에 전략팀은 지금도 승승장구 중. 그것과는 별개로 대표님은 수행비서들이 문제만 일으켜서 아주 골머리가 아팠을 거야.”
사원의 기분에 쩔쩔매는 상황이 짜증 났지만, 그래도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고학번 선배처럼 설명을 이어나갔다.
“팀장님. 혹시, 어떤 문제였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렇게 구구절절 쏟아지는 비하인드스토리를 듣던 도아가 드디어 눈빛을 바꿨다.
뒤늦게 아차 싶었던 민 팀장은 곤란한 얼굴을 지어 보이며, 누가 오지도 않을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치부라고 생각이 되었지만, 따지고 보면 비서들이 잘못을 한 것이 왜 자신의 탓인가?
대표도 사람을 채용하는 게 얼마나 까다로운 일인지 잘 안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상황을 잘 마무리해보자고 결심한 차였으니 이왕이면 앙금 없이 떠나고 싶었다.
고민을 마친 그녀는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고는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듯 몸을 앞으로 당겨 앉았다.
“월튼 씨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새로운 비서가 왔는데 어학 실력이 많이 부족했어. 인터뷰 때는 어디서 외어온 건지 우리도 깜빡 속았어. 월튼 씨가 한국말을 워낙 잘하니 인수인계할 때도 발견을 못 했지. 하지만 대표님은 본사랑도 연락을 많이 해야 하는데 비서가 영어를 못 하니 실수가 생기고, 혼나고. 이게 반복되다 관둔 거지.”
“그다음 비서는 남자였는데, 클럽에서 대표님을 사칭하고 다녔어. 대표님이 언론에 얼굴을 노출하지 않는 편이라 가능했지. 결국 소문이 돌았고, 덜미가 잡혔어.”
세상에, 도아가 자신도 모르게 내보낸 소리에 민 팀장은 아직 놀라긴 이르단 듯 코웃음을 쳤다.
“다른 비서는 회사 다니면서 SNS 마켓을 했는데, 15층 정원에서 제품을 촬영했나 봐. 대표님이 그걸 보고 화가 안 나?”
민 팀장은 상체를 더 깊숙이 숙였다.
“대표님한테 고백했다가 거절당해서 관둔 비서도 있었어. 채 비서라고 연예인 뺨치게 예뻤는데. 관둘 때 대표가 자기한테 치근덕거린다고 말해서 너무 놀랐거든. 알아보니 그 반대였어. 다행히 채 비서가 고백한 타임이 출장 갔을 때라 다른 직원이 목격해서 오해가 풀렸지. ”
‘소문에 의하면 대표가 치근덕거렸다고 하더라고요.’
우진이 재미로 알려주었던 이야기가 도아의 머릿속에 떠오르고, 뒤이어 자신이 들어왔던 수많은 소문이 겹쳐왔다.
음식을 먹지도 않았는데 명치끝이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도아 씨?”
“아, 네. 제가 놀랐나 봐요.”
“아무튼 그렇게 계속 운 나쁘게 안 좋은 사람들만 들어왔어. 대표님도 거의 포기상태였지. 새로운 사람 오면 그만큼 신경 쓰이니깐.”
도아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 후에 몇 가지 이야기가 더 전해졌는데 그저 네, 네, 앵무새처럼 대답했다.
자리로 돌아오는 도아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늘 의문이긴 했었다. 성격이 좀 뭐 같기는 해도 소문만큼 나쁜 사람은 아닌데 왜 비서들이 자주 관두었는지.
호기심이 해결돼 개운하다기보다는 늘 정원에 혼자 서 있는 시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과 같은 결핍은 없어 보이고, 권력에 익숙한. 좋게 말하면 완벽하고 나쁘게 말하면 오만한 사람인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외로웠을 것 같다고.
[부모님은 어릴 적 돌아가셨다]
그에 관한 기사를 볼 때 짤막하게 발견했던 내용이었다. 과연 그 한 줄로 끝낼 수 있는 일이었을까.
혼자서 무서워 울지는 않았을까. 두렵지는 않았을까.
도아는 숨이 빽빽해져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도아 씨. 단정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어쩐지 더 듣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
큰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월튼이 보고했다. 파란 눈동자가 영롱하게 빛났다.
깔끔하고, 완벽한 비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결하게 일정을 전하는 사람이 도아가 아닌 게 시우는 가끔 못마땅했다.
짙은 속눈썹이 이만 모니터를 향했다.
“알았어. 나가 봐.”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는데.”
“왜. 육아휴직이라도 하려고? 그럼 도아 씨 올라오라고 하고.”
가벼운 농담을 건넨 시우가 몸을 뒤쪽으로 기울였다.
“나 없었을 때 3호점에서 큰 사건 하나 있었다며.”
이른 봄날, 도아가 건넸던 흉기 난동 사건 파일이 너무나 쉽게 떠올랐다.
“아아. 있었지, 흉기 난동 사건. 다 해결됐어.”
“그 피의자가 너한테 직접 사과를 하고 싶어 하는데.”
“내가 그 사람을 왜 만나. 그때 놀라 쓰러졌던 사람한테나 사과하라고 해.”
그 사건으로 쓰러졌던 사람은 의식을 잃으며 머리를 부딪쳤고, 몇 주 동안 중환자실 신세를 져야 했다.
보고받았던 사진이 끔찍해 온종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날 비서 이도아가 집으로 찾아와 아주 정신머리를 흔들어 놓기까지 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었다.
다 해결된 일이었다.
피의자는 몇 개월의 형을 다 채웠고, 다행히 쓰러졌던 고객 역시 의식을 되찾아 지금은 일상생활이 가능하였다.
모든 피해보상을 회사가 하긴 했지만, 대처방식으로 인해 브랜드 이미지가 좋아졌기에 결코 손해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월튼의 말에 시우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생수병을 기울여 한 모금 만에 절반을 비웠다.
“피의자가 배영희 씨라는 분인데, 그분이 지금 치료를 받고 있나 봐.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래.”
“그래서?”
“이게 난 잘 모르겠는데. 강박증의 한 종류라고 하더라고. 이 원인을 해결해주는 게 큰 도움이 된다고 하네? 그 담당 의사가 한 번만 만나서 사과를 들어달라고 부탁을 했어.”
위축된 목소리로 보고를 마친 월튼이 시선을 스리슬쩍 키 큰 식물로 옮겼다.
자신 역시 처음에 아람의 연락을 받고 거절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화해하게 도와준다고 말했던 것을 들먹이며, 이건 환자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어느새 점점 홀린 듯 설득되었고, 그러다 결국 자신만 믿으라며 철없는 약속까지 하고 말았다.
제 품에서 놀고 있는 요정 같은 딸 아이를 안으며 이러다 아빠 잘리는 것 아닐까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이는 시우 삼촌은 착한 삼촌이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용기를 주었다.
“내가 그런 사정 하나하나 봐줄 의무는 없어.”
“그러지 말고, 한번 시간 내주는 건 어때?”
“안 만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오 분이면 될 일이야. 내가 진짜 틈새에 티도 안 나게 일정 끼워 넣을게.”
호수 같은 눈을 가진 비서는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질 기세였다.
‘월튼이 온다고? 걔는 일 처리가 좀 물러. 정에 너무 휩쓸리기도 하고.’
천 회장의 말이 불현듯 떠오른 시우가 숨을 깊게 마셨다.
“그 의사 이름이 뭐야.”
“어……. 그게. 의사 이름이……. 지금 중요한가?”
“이름.”
“그……. 아람 씨. 권아람.”
“거절해.”
단호하게 명령을 마친 시우가 위로 떴던 눈을 아래로 내리고, 일을 하기 위해 허리를 고쳐 세웠다.
“야! 아람 씨가 진짜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병원 싫어하는 너 때문에 바쁜 시간 쪼개서 직접 오고, 솔직히 덕분에 편했잖아? 둘이 데이트하라는 것도 아니고. 너랑 나, 환자랑 의사 이렇게 네 명이 같이 보는데 그게 뭐 어려워?”
월튼의 감동적인 연설이 끝나자, 집무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지이이잉.
그때, 시우의 전화가 진동했다.
[도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월튼은 액정에 뜬 화면을 보자마자 핸드폰을 낚아채듯 집어 들었다.
인질이 되어 지잉지잉 거리는 핸드폰을 움켜쥔 월튼이 승기를 쥔 듯 미소 지었다.
“빨리 잡으라고 해. 한 대표님?”
시우는 어이가 없어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보고에서 부탁에서 협박까지. 아주 가지가지 하는 비서를 보며 잘라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사이 전화기는 잠잠해졌다. 가늘게 떴던 눈빛을 이만 거둔 시우는 손을 뻗으며 말했다.
“딱 십 분만 보는 거로 해.”
대표의 허락이 떨어지자 비로소 비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요정 같은 아이와 닮은 웃음이었다.
시우 삼촌은 착한 삼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