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첫 눈
(68/85)
제68화. 첫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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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첫 눈
2022.06.24.
회사 근처에 프랑스 가정식 레스토랑이 새로 문을 열었다. 저녁 시간이 되자 노란 조명이 따뜻하게 가게 안을 밝혔다.
“자기야. 이거 먹어 봐. 아.”
“대박. 자기가 주니깐 진짜 맛있다.”
빨간 토마토 소스를 입에 묻힌 우진이 빙그레 웃자 주혜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도아가 자신을 자극해 싸움이 벌어진 날, 지옥 불 앞에 서 있는 듯했다.
너무 화가 나고 무서워 울고 소리치는 것만으로 응어리가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비상계단에 우진이 등장한 순간, 정확히는 그가 온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게 바뀌었다.
이보다 극적일 순 없었다.
우진은 왕자님이 분명했다. 절망에 빠진 자신을 구원하러 온 왕자님.
처음에 이 비서님이 너무 예뻐서 마음이 갔던 건 사실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생각나는 건 주혜 너였다고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고백에 주혜는 다시 울어버렸다.
왜 조금 더 빨리 말 안 해줬냐고. 자신이 너 때문에 지금 어떤 짓까지 한 줄 아냐며 솜뭉치 같은 주먹으로 그를 툭툭 때렸다.
그러다 우진과 눈이 마주쳤고, 간질거리는 숨결이 서로의 뺨 위에서 머물렀다.
우진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고, 주혜는 눈을 감았다.
즉흥적으로 시작된 입맞춤이 꽤 길게 이어졌다.
다 잘 될 것 같아졌다.
“아직 사과는 안 했지?”
“무슨 사과?”
“이 비서님한테 미안하다고 말할 거라고 했잖아.”
사탕 같은 달콤한 회상에 빠졌던 주혜가 우진의 질문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할 거야.”
“얼른 해. 나랑 하기로 약속했잖아.”
“언니가 날 피해서 아직 말을 못 했어.”
우진의 키스는 마법 같았다. 마치 저주에 걸렸던 공주가 온전한 정신을 되찾았던 것처럼.
도아를 향해 시기를 쏟아내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진정되었다. 그리고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도아가 가끔 거슬리기는 했지만, 성격 좋고, 예쁘고. 곁에 두기 참 좋았다.
이도아가 이렇게까지 싫은 건 아니었는데.
사과를 하긴 할 거였다. 그러니깐 조금만 더 마음의 준비를 한 후에.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네가 도아 언니를 좋아하니깐 내가 화가 나서 그런 거잖아.”
“에? 왜 또 내 탓을 해?”
“내가 고백했을 때 받아만 줬어도 내가 그런 소문은 안 퍼트렸지!”
주혜가 테이블을 탁탁 내려치자 물잔이 가볍게 흔들렸다.
냅킨으로 입가를 닦던 우진이 귀엽다는 듯 따스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
차창 밖을 보는데, 새로 생긴 가게에 주혜와 우진이 앉아 있었다.
주혜와는 회사에서 몇 번 이야기 나눌 타이밍이 있었는데, 그녀가 노골적으로 자신을 피했다.
사무실 앞에서 싸우던 날, 철천지원수를 바라봐도 그보다는 낫겠다 싶은 눈빛이었다.
하지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순한 양이 되어 나타났다.
저래서였나.
콧방귀가 튀어나와 도아는 이만 시선을 돌렸다.
“그러길래 잘라버리라니깐.”
운전자석에서 낮은 음색이 들렸다. 목소리가 짓궂었다.
도아는 눈초리를 가늘게 만들었다가 얼마 못 가 가볍게 웃었다.
“됐어요. 뭐 잘됐죠.”
“너그러우셔라.”
단호하게 말하는 어투는 부드러웠다.
“대표님은 어땠어요? 제가 메모장에 써놓은 험담을 봤을 때요. 정말 화 안 났어요?”
앞을 보는 눈동자에 붉은 불빛이 반사됐다.
화가 났던가.
아무리 그 순간을 되짚어보아도 그때 느꼈던 감정이 그런 종류는 아니었다.
당황해서 달아오른 도아의 모습이 주는 쾌감이 오히려 선물 같았다.
그 핑계를 대며 생각했다. 어쩔 수 없다고. 네가 기어코 나를 자극하니 이렇게 돼버렸다고.
“화났다고 하면, 사과의 선물이라도 주시려고?”
“원하신다면요.”
누르던 갈망을 견딜 수 없는 밤이었다.
“괜찮아. 그날.”
나를 안아줬으니. 시우가 뒷말을 삼키며 입매를 늘렸다.
“저도 이제 괜찮아요. 정말.”
숨을 고른 도아가 비슷한 어투로 말했다.
가게를 한 번 더 힐긋 보며 웃음이 한가득인 주혜의 얼굴을 관찰했다.
물론 그 상황을 떠올리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나긴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아마 그날 시우의 위로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편안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 소중한 시간과 정성을 옆에 있는 시우에게 오롯이 보내고 싶었다.
“대표님이 괜찮다고 했잖아요.”
신호에 멈추어 선 차가 출발할 쯤 도아가 수줍게 웃었다.
고개를 돌려 그 얼굴을 바라보던 시우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몇 번의 계절이 바뀔 동안 자라난 흑갈색 머리는 오늘따라 길어 보였다. 위로 휘어진 속눈썹, 반듯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 부드럽게 이어지는 턱 끝과 목선. 그리고.
더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운전에 집중하려는데 도아의 목소리가 또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럼, 내일 부산으로 가시는 거죠? 4호점 개점식 하고 바로 미국으로 가는 건가요?”
“응. 개점 다음 날 부산에서 바로 출국해.”
도아는 비서도 아니면서 머릿속으로 빠르게 일정을 정리했다.
내일 오전 비행기로 부산에 도착. 다음 날 4호점 오픈. 그 후 일주일간 미국 출장. 중간중간 출점과 본사 방문을 위한 준비, 초청 일정과 인터뷰 등.
빈틈이 보이지 않는 스케줄이었다.
“아프면 안 돼요. 잠도 잘 자고, 식사도 거르지 말고요.”
노파심 가득한 잔소리에 시우가 피식거렸다.
“걱정 마. 건강검진 결과 잊었어? 나 건강해.”
“네. 그랬었죠.”
대표는 병원에서 나온 결과지를 보여주며 자신은 정말 아프지 않다고, 이제 병원도 정기적으로 다닐 것이니 걱정 말라 말했었다.
그 이야기에 안심이 되면서도 뒷좌석에서 힘들어하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매우 건강해 보이는 시우의 뺨을 쓰다듬듯 매만졌다.
이제 힘들지 말아라. 다소 유치한 주문을 외우며 싱긋 웃었다.
“그럼 언제 오세요?”
“금요일 저녁에 입국할 거야. 너무 늦은 시간 아니면 만나러 갈게.”
“무리하지 말아요.”
시우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고양이를 길들이는 듯한 그 손길에서 벗어났다.
“대표님이랑 비서님, 두 분 자리 비우시는 동안 제가 비서실에 올라와 있기로 했어요.”
“내가 그러라고 했어. 정신없었을 텐데, 비서실에서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있어.”
“하하, 감사합니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저도 농땡이 피우는 거 좋아해요.”
“좋은 자세야.”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도심 산 중턱의 레스토랑으로 가던 길이었다.
좁은 오르막길을 오르는 검은 차 위로 하얀 겨울 첫눈이 떨어졌다.
“눈이에요!”
도아가 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감탄했다. 창문을 내려 고개를 빼내고 짙푸른 하늘을 바라봤다.
검푸른 곳에서부터 흰 뭉치가 모이고 흩어지며 떨어졌다.
코끝에서 시큼. 눈가에서 시큼. 얼굴에 닿는 감촉이 좋았다.
웃으며 내뱉은 뽀얀 입김이 느릿하게 공중으로 퍼졌다.
도아가 손을 뻗어 활짝 펼치자 유난히 크고 예쁜 눈송이 하나가 살포시 손바닥에 앉았다. 눈 결정 모양이 맨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대표님. 이거 보세요.”
조심스럽게 운전자석으로 그것을 가져가 대단한 거라도 보여주듯 속살거렸다.
보석 같아요. 도아가 말하자 귓바퀴에 따뜻한 숨이 닿았다.
시우는 별다른 대꾸 없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내렸다 들어 올렸다. 이어 인적 없는 길목에 차가 멈추었다.
목적지에 다 온 건가 싶어서 도아가 고개만 뒤로 돌려 눈 내리는 바깥을 살폈다.
그 사이, 뾰족하고 앙증맞은 눈송이가 하얀 손바닥 위에서 살랑거리다 후두둑 녹아버렸다.
종잇장 같은 손은 여전히 시우의 눈동자 안에 담겨 있었다. 물기 남은 손바닥에 분홍기가 한가득했다.
시우는 핸들을 쥐었던 손으로 그 꽃대 같은 손목을 잡고 입가로 가져갔다.
끌림에 놀란 도아의 눈동자가 커지려는데, 시우의 입술이 손바닥에 닿았다.
“지금 뭐.”
하세요? 라고 물으려는 찰나, 매끈한 것이 손바닥에 남아 있는 물기를 핥았다.
당황한 도아가 손을 빼내려 하자 시우가 더 세게 움켜쥐며 잡아당겼다.
“원래 저녁을 먹이려고 했는데.”
바짝 다가온 숨결에 입술을 달싹였으나, 바로 앞에 자리 잡은 눈빛이 뜨거워 곧 말문이 막혔다.
“안 되겠어.”
고개가 틀리며 순식간에 입술 사이가 벌어졌다. 더운 숨이 도아를 덮쳤다.
흡.
거센 키스와 다르게 머리카락 속으로 엉켜 든 손의 움직임은 부드러웠다.
바짝 경직되었던 근육들은 열감에 조금씩 늘어지더니, 곧 녹을 듯 흐물거렸다.
달칵. 안전벨트를 푼 시우가 더 바짝 도아에게로 다가왔다.
보다 깊이 들어온 입맞춤에 도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보고가 길어지네. 비서님이 밤에 화상회의가 있다고 했는데. 오늘 못 보면 열흘 넘게 못 보는 건가?’
한산한 사무실에서 도아가 구름 낀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비서실에서 필요할 물품을 챙기고, 이미 다 처리한 업무 파일을 들춰보고. 시간은 속수무책으로 흐르는데 핸드폰은 잠잠했다.
총명하던 눈동자가 초점 없이 흐릿하게 변했다.
시우는 11시까지 회사로 돌아가야 하니 아마……. 함께 저녁 먹고, 카페에서 이야기 나누겠지.
그래도 일찍 만난다면, 짧게라도 시우의 품에 파고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다.
어쩔 수 없었다. 잘난 한시우의 몸까지 마음에 드는 걸 어쩌겠나.
그런데, 이미 응큼한 바람은 물 건너간 듯했다.
등을 의자에 기대며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한 도아가 진득한 호흡을 내뱉었다.
내가 너무 욕심을 냈구나 싶었다. 사실, 얼굴만 봐도 너무 좋은데.
미간을 찌푸리며 저녁이라도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중얼거리는 순간, 드디어 네모난 전자기기가 위풍당당하게 진동했다.
“대표님.”
몇 시간 전의 짧은 욕망을 떠올린 도아가 애틋하게 시우를 불렀다.
시우는 옅게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눈빛은 다정했으나 그의 손짓은 더 이상 다감하지 않았다. 달아오른 숨소리가 시트에 부딪혔다.
입술에 립스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도아가 매달리듯 시우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눈송이가 소리 없이 뿌옇게 변한 차창을 덮었다.
“……웠어요.”
“응?”
“할까 봐 아쉬웠어요.”
“뭐가 아쉬웠는데?”
“정말, 저녁만 먹고 헤어질까 봐 아쉬웠어요.”
단단한 목울대에 얼굴을 파묻은 도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일순 멈칫한 시우가 바짝 몰아붙이던 몸을 일으키며 더운 숨을 개웠다.
늘 단정한 비서가 그렇지 못한 눈빛으로 뭉근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주, 내일 출장을 못 가게 하려고 작정을 했지.
끝이 말린 긴 머리카락을 만지며 시우가 허탈하게 실소했다.
이어 다시 상체를 기울인 그가 손을 뻗어 조수석 안전벨트 마저 풀었다. 그리고 도아를 가뿐하게 자신의 허벅지 위로 끌고 왔다.
놀라 눈이 동그라졌던 도아는 가쁜 숨을 몇 번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과 콧방울, 뺨. 짧게 입을 맞추며 웃었다.
“한시우”
벚꽃잎 떨어지던 봄날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내 거.”
반말하는 모습까지 아주 마음에 든다.
시우가 도아의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서로의 입술을 깨물며 장난치다가 다시 부드럽게 얽혀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