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9화. 열흘 (69/85)


제69화. 열흘
2022.06.27.


첫눈이 벚꽃잎처럼 떨어지는 겨울밤이었다.

결국, 둘은 식사를 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16584977806982.jpg

“도아 씨.”

차에서 내린 도아가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시우가 붙잡듯 불렀다.

어설프게 단정한 비서가 대표의 부름에 몸을 돌려 세웠다.

하늘은 새까맣고, 세상은 하얬다. 그 끝에 도아가 서 있었다.

16584977806993.jpg

“네. 대표님.”

복숭아 닮은 두 볼을 봉긋 올리며 도아가 웃었다.

자신이 어루만지고, 핥았던 뺨인데. 또다시 궁금해 손끝으로 보드라운 촉감을 느꼈다.

굵게 엉킨 눈송이가 살랑살랑 떨어져 촘촘한 속눈썹에 닿았다.

그것이 차가운지 도아는 화난 고양이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선선한 웃음을 터트리며 시우가 매달려 있는 흰 눈을 털어주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물었다.

16584977806982.jpg

“미국, 같이 갈래?”

담백한 물음인데 도아의 가슴이 콩, 또다시 요란해질 준비를 했다.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차에서 물었다면 아마 생각 없이 가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래도 도아는 지금 꽤나 이성적인 상태였다.

임원진들도 함께 가는 그 일정에 자기가 끼면……. 아무리 생각해도 모양이 우스웠다.

16584977806993.jpg

“가고 싶어요.”

도아의 대답에 시우는 숨을 깊게 마셨다.

16584977806993.jpg

“다음에 여행으로 가요. 우리 둘만.”

첫눈에 취한 것도 아닌데 거절이 꼭 수락 같았다.

16584977806993.jpg

“대표님이 살았던 동네도, 좋아하던 나무도 궁금해요.”

16584977806982.jpg

“그래. 한가할 때, 같이 가자. 꼭.”

수줍게 끄덕이는 도아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딱 열흘만 참으면.

16584977807022.jpg

 

**

어린아이도 아닌데 손가락을 접으며 날짜를 확인했다.

일주일 남았다.

르베이 호텔 부산 스위트 룸은 파란 바다와 광안대교가 내려다보였다.

4호점 정식 개점 하루 전, 프리오픈을 통해 최종 점검을 마쳤다.

정식 오픈 당일 날에는 많은 손님이 찾아왔고, 반응은 뜨거웠으며, 높은 매출로 이어졌다.

이제 항공기에 탑승해 미국 본사에 가는 일이 남아 있었다.

뜨는 시간은 30분 정도. 그 틈을 어떻게 알아차리고 천 회장과 유리라가 찾아왔다.

16584977807026.jpg

“뭘 노인네처럼 손가락으로 계산하고 있어?”

16584977806982.jpg

“갑자기 날짜가 헷갈려서요.”

접었던 손가락을 피며 느슨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은 길고 마디가 단단했다.

16584977807026.jpg

“건물을 아주 기깔나게 지어났던데, 돈 좀 썼겠어? 한 대표.”

16584977806982.jpg

“직원들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한 대표는 여유롭고, 품위 있는 자세로 대답했다. 정말 훌륭한 신랑감이었다.

16584977807026.jpg

“얼굴 보니 오픈 매출도 좋은 거 같은데?”

16584977806982.jpg

“당연한 걸 물으십니다. 곧 보도기사 나가니 확인하세요.”

다리를 꼬고 앉은 천 회장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창을 꽉 채운 바다의 풍경이 배 위에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16584977823637.jpg

“비서님은 괜찮으세요?”

천 회장 옆에서 마들렌을 꼭꼭 씹던 리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16584977823637.jpg

“제가 괜히 껴든 건 아닌가 싶어서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리라는 시우의 예상보다 훨씬 더 본인의 임무를 잘 수행하고 갔다. 그 계획을 알 리 없는 그녀는 오지랖을 피운 것 같아 계속 마음을 쓰고 있었다.

리라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도아와 주혜의 싸움 현장에 있었던 리라는 천 회장의 집무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아 씨가 굉장히 힘든 상황이었는데, 한시우 대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보고 있었다고.

신경 쓸 일 아니라고 깔끔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모습이 너무 차가워 보였다고.

둘이 사귀는 사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16584977807026.jpg

“나도 리라한테 들었다. 사업이란 거는 알아보고 조사하면 조금이나마 예측을 할 수 있는데, 사람 속은 알 수 없으니 그게 참 힘들어.”

시우는 감정을 잘 숨기는 아이였다. 아버지인 지섭의 죽음에도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다.

4번째 지점이 오픈한 다음 날이었다. 불신 담긴 예측을 쏟아내던 사람들이 이제는 성공적으로 회사를 이끈다며 칭찬 일색인데, 이렇게나 건조하다니.

그렇기에 천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16584977807026.jpg

“내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하면, 더 속상하지. 너도 그랬지?”

임마. 어서 대답해. 천 회장의 주름진 눈가가 가늘어졌다.

저 건조된 오징어 같은 놈이 어울리지 않게 비서에게 선물을 줬다는 걸 천 회장은 다시 한번 떠올렸다.

눈싸움을 하듯 서로를 빤히 보던 상황은 시우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끝났다.

16584977806982.jpg

“네. 속상했습니다.”

어머. 시우의 대답에 놀란 리라가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입안 가득 들어 있던 마들렌이 목구멍을 막는 기분이었다.

16584977807026.jpg

“그래. 직원들이 많으면 티 내기도 뭐하지. 대표가 거기서 화내면 더 수근거린다고.”

봐라. 내 말이 맞지? 리라를 보는 천 회장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만족한 입술이 호기롭게 휘어졌다.

16584977806982.jpg

“이 비서도 이제 괜찮다고 하더군요. 월튼에게 식사 자리 마련하라고 하겠습니다.”

제주도에서 봤던 익숙한 표정을 확인한 시우가 애써 못 본 척하며 리라에게 제안했다.

16584977823637.jpg

“네 좋아요. 전 이 비서님 좋거든요.”

리라가 도아를 떠올리며 예쁘게 웃었다.

시우가 자신이 협업하고 싶었던 디자이너가 여자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즘, 월튼이 들어왔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었다.

인사를 하는 시우의 어깨를 천 회장이 툭툭 쳤다.

16584977807026.jpg

“나도 도아 씨가 마음에 들어.”

시우는 포기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이 부드러웠다.

창을 꽉 채운 풍경이 제주도 바다 위에서 돌고래를 보던 날과 닮아 있었다.

일주일만 참으면. 시우는 다시 한번 날짜를 떠올렸다.

**

미국에서의 일정은 바빴다. 총괄 대표인 헨리 마커가 예상치 못한 사고로 본사에 올 수 없게 되었지만, 부대표인 로렌이 훌륭하게 일정을 수행했다.

시우는 예정대로 결과 보고를 마치고, 초청 인사들과 함께 몇 개의 지점을 방문하고, 만찬을 즐겼다.

그럼에도 시간은 더없이 더디게 흘러갔다.

시우는 시간이 비고, 시차가 괜찮으면 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특별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잠을 잘 자고 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재미있는 일은 없었는지.

목소리를 듣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오래 붙잡지 않고 놔주었다.

16584977823637.jpg

“자. 키 받아. 차는 지하 1층 주차장 바로 앞에 있어.”

룸으로 들어온 월튼이 테이블 위에 차 키를 올려두며 말했다. 이어 체크 목도리를 풀고 의자에 편하게 기대어 앉았다.

16584977806982.jpg

“수고했어. 헨리 대표는?”

16584977823637.jpg

“괜찮으시데. 병원에서 수술 잘 받고, 아직 면회는 금지. 다 늙으신 양반이 왜 마이애미까지 가서 오토바이를 타시는지.”

16584977806982.jpg

“그래도 다행이네. 다리 쪽만 다치셨다니.”

16584977823637.jpg

“천운이지. 공식 일정은 끝났고, 출국 전에 로렌 부대표랑 식사만 하면 돼.”

시우는 비서에게 출장지에서 하루 정도 시간을 비워 놓으라고 요청했었다.

시우에게 뭐든 해주지 못해 안달 난 헨리 마커가 본사에 있었다면, 상당히 어려운 요구였겠지만.

그는 지금 입원실에 누워 수면제에 취해 있었기에 무사히 일정을 비울 수 있었다.

16584977806982.jpg

“늦게 올 거야.”

16584977823637.jpg

“어디 가는데?”

16584977806982.jpg

“그냥 바람 쐬고 오려고.”

시우는 월튼에게 너도 좀 쉬라는 말을 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차는 도심을 가로질렀다.

고가도로를 지나는 자동차 위로 칸살 햇빛이 드리웠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반듯한 건물들이 보기 좋게 자리 잡은 곳을 지나 주택가가 나오고, 먼지 가득한 공사장도 지나갔다.

한적한 평원을 끊임없이 달렸다. 언제나 고요하기만 하던 눈빛이 유난히 요동치는 듯했다. 길이 울퉁불퉁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시우는 추운 날임에도 창문을 내려 얼음 같은 바람을 맞았다.

하늘은 탁했고, 흙먼지가 자욱했다.

핸들을 쥔 왼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다른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숨을 내쉬고 다시 들이켰다.

고된 시선 끝에 낯익은 동네가 들어왔다. 목적지가 근처였다.

16584977806982.jpg

‘내가 좋아하는 나뭇잎이 갈색으로 변했어요. 그런데 그것도 예뻐요.’

유난히 크고 넓은 집을 지나는데, 어린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커브를 돈 차량이 부드럽게 주행을 이어갔다.

낮은 산과 눈 쌓인 나무가 유난히 평화스러웠다.

눈동자가 풍경을 따라가다 산 가운데 솟아 있는 큰 나무에서 멈췄다.

어린 자신이 부여잡고 엉엉 울던 나무가 아직도 저곳에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달린 차는 인적없는 공원에서 멈추었다.

차에서 내리며 숙였던 몸을 일으키자 롱 코트 끝자락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한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주변은 무서우리만치 조용했다. 시우는 부족한 것도, 더한 것도 없는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


16584977806982.jpg

“저 왔어요. 오랜만이죠.”

차가운 묘지 바닥에 한가운데 활짝 핀 꽃다발이 놓였다.

16584977806982.jpg

“그동안 바빴어요. 원래 5년 정도만 있다가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계속 한국에 있을까 해요.”

비석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시우가 말을 아끼는 사이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듯이 흔들고 갔다.

16584977806982.jpg

“같이 오고 싶은 사람이 있었어요.”

긴 침묵 끝에 시우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슬프고도 아늑했다.

16584977806982.jpg

“정말 고민을 오래 했습니다. 나도 곧 당신들처럼 될 것 같아서,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 있었고. 그런데 마음이 가는 게 참기 힘들어서. 고백했어요.”

비소 같은 웃음이 겨울 공기에 얹혀 실려 갔다.

16584977806982.jpg

“그 사람이랑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다 보면 견딜만해 져요. 어머니랑 아버지의 기억이 옅어집니다.”

시우는 눈꺼풀을 내렸다. 아주 어릴 적,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손을 잡고 놀던 순간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어머니의 미소, 아버지의 웃음소리, 그것이 행복한 자신. 아늑하던 두 사람의 품.

힘없이 들어 올린 눈꺼풀 아래의 눈동자가 촉촉했다.

16584977806982.jpg

“……내가 두 분을 너무 많이 사랑해서 못 놔주고 있었나 봐요.”

발치 아래서 흔들리는 하얀 꽃잎이 꼭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 같았다.

시우는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더 이어나갔다. 검은 눈동자는 깊었고, 얼굴은 편안했다.

입으로 몇 마디, 마음으로 몇 마디. 자장가 불러주듯 다정하게 말하다 이만 가보겠다 인사했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황황한 겨울바람이 귓전을 스쳤다.

1658497787268.jpg

 
지이이잉.

한발 물러선 시우가 이제 그만 떠나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도아]

이상하게 눈이 일찍 떠졌다는 도아는 지난 밤 꿈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전하며, 평점까지 말해주었다.

시우는 그 내용에 웃음을 터트리고, 미국에서 있었던 몇 가지 일들을 말해주었다.

한참을 이야기 나누다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30분이 지나 있었다.

우중충하던 세상이 조금 개인 건 기분 탓이겠지 싶었다.

이제 그만 출근 준비를 해야겠다고 말하던 도아가 대뜸 물었다.

16584977806993.jpg

-그런데 대표님. 보고 싶다고 한 번도 안 한 거 알아요?

한국에서 그녀가 짓고 있을 표정이 또렷하게 그려졌다. 시우는 나직하게 웃으며 구두 끝에 나풀거리는 꽃잎을 바라봤다.

16584977806993.jpg

-빨리 말해!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정한 말은 마음을 키우지만, 더 커져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16584977806982.jpg

“보고 싶어.”

목소리는 다감했다.

대답을 강요하던 상대방은 막상 원하던 답을 얻자마자 당황했는지 별다른 대꾸를 못 했다.

16584977806993.jpg

-……저도요.

그러다 작고 수줍게 한마디 건네고는 도망가듯 전화를 끊어버렸다.

엷게 웃음지은 시우는 몸을 틀어 길가로 나가려다, 돌연 걸음을 멈추고 다시 비석을 내려보았다.

눈빛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맴도는 말을 내뱉기 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겁게 입술을 떼는 동안 겨울바람이 허리를 휘감고 올라왔다.

짧게 몇 마디 더 건넨 시우는 자신이 좋아하던 숲 뒤로 해가 넘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보다 한층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드디어 내일이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