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보안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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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보안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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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보안카드
2022.07.01.
시우가 한국에 오는 날이었다.
첫 번째 진동이 끝나기도 전에 도아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대표님!”
달뜬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지금 막 도착했어. 퇴근은 했어?
“네. 했어요.”
위잉. 도아는 프린터에서 나온 인쇄물을 넘겨 보며 대답했다.
퇴근은 거짓말이었다. 시우가 회사에 올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금방 들킬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도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기도 했고.
-일정 있어서 회사 잠깐 들렀다가 가야 해.
“네. 알고 있어요. 저번에 말해주셨잖아요.”
-빨리 마치고 만나러 갈게.
“좋아요.”
하루 종일 시우의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열 밤은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이상하게 당일인 오늘은 시간이 안 가도 너무 안 갔다.
환하게 웃으며 대답 한 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긴 복도를 또각또각 걸었다.
“기내에서 힘들진 않았어요?”
-괜찮아. 조금 답답하긴 하지만.
“다행이에요.”
바람이 차갑고, 하늘에 구름이 가득했다. 도아는 혹시 또 눈이 오려나 싶어 손을 뻗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것도 없는데 괜시리 기분이 들뜬다.
“한시우.”
어느새 붉게 달아오른 뺨에 기대감이 넘쳐흘렀다.
“빨리 와.”
알았어. 빨리 갈게. 낮고 묵직한 음색이 그렇게 말했다.
도아는 전화를 끊고도 한참 동안 정원에서 머물렀다. 찬 바람과 흐릿한 세상마저 너무나 좋았다.
지이이잉.
기분 좋은 바람을 맞은 지 오 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진아였다.
전화를 받으며, 이만 걸음을 옮겼다. 습관처럼 정원 문을 닫으려던 도아는 손잡이를 쥔 채 잠시 망설였다.
열어놓을까? 혼자 있는데 위험하려나?
사뭇 진지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시우도 선선한 것을 좋아했다. 비행기가 답답했다고 말했으니 환기를 좀 시켜놓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직원들은 다 퇴근했을 시간이고, 여기는 보안 키 없이는 들어올 수 없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고민을 마친 도아의 움직임이 조금 전보다 가벼워졌다.
“네. 대리님. 아직 회사예요.”
한 손에 핸드폰을 쥔 채, 정원 문을 고정시켜 로비로 바람이 들어오도록 했다. 그리고 보안을 해제하고 복도 문도 활짝 열었다.
바람 소리가 로비부터 복도 끝자락, 대표 집무실까지 길게 늘어졌다.
우우웅 소리를 내며 울려 퍼지는 것이 꼭 동굴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도아는 잠시 기다란 복도를 돌아보았다.
**
에이치 코리아 본사에서 5분 정도 걸리는 카페에 아람과 영희가 앉아 있었다.
금요일 저녁답게 매장 안은 적당히 소란스러웠다.
아람은 의자에 편하게 등을 기대었다. 낮은 원목 티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커피 컵을 가져가 한 모금 넘겼다.
시우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고민하며 천천히 잔을 비워나갔다.
“선생님?”
영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아람은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구기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대답을 하기 위해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상대방을 보았을 때, 그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영희 씨. 그렇게 좋으세요?”
“네. 그럼요. 너무 감사해요. 선생님.”
수줍게 미소 짓는 영희의 눈동자는 흥분이 가득했다. 아주 재미있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반짝였다.
“사장님이 저 때문에 돈도 많이 썼다고 그랬어요. 그것도 사과하려고요. 힘들었겠죠?”
“영희 씨 사과받으면, 힘들었던 것도 다 잊을걸요? 사과 잘하시고 털어 버리세요. 이제 행복하게 사셔야죠.”
아람의 응원에 영희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흉기 난동 사건을 일으킨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순수하고 무해해 보였다.
평소에는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무릎 튀어나온 바지를 입고 다녔다. 날이 추워지며 그 위에 패딩을 걸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가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늘도 비슷한 착장이었다. 하지만 부스스하던 머리는 제법 깔끔했고 못 보던 스카프까지 하고 있었다.
“저는 촌스러워서 이런 선물 생각도 못 했는데, 역시 선생님께 물어보길 잘했어요.”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와인과 케이크를 바라보며 영희가 웃었다.
사장님께 빈손으로 갈 수 없다며 짜증 날 정도로 징징거리는 것이 지겨워, 결국 아람이 선물을 정해주었다.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에 가서 산 케이크와 와인이었다. 영희의 지갑 사정을 고려하면 이것이 최선이었다.
시우가 마시는 와인의 풍미를 따라올 수 없겠지만 직접 만든 매실 장아찌를 준다던 그녀의 계획보다 몇십 배는 나은 선물이었다.
그리고 환자의 상태를 고려하면, 선물에 이상한 것을 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와인과 케이크는 함께 골랐으니 받는 사람에게 해가 될 요소도 없었다.
영희가 포장 박스에 손을 올리고는 또다시 웃었다.
아람도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선생님은 사장님이랑 어떻게 아세요?”
“같은 대학교 나왔어요.”
“그럼 서로 안지 오래되었겠어요.”
“네. 오래됐어요.”
“우리 선생님처럼 훌륭한 사람이랑 친구라니, 사장님은 복 받았네요.”
영희가 바짝 다가오며 속삭이자 구릿한 냄새가 아람의 콧속으로 침범했다.
콜록. 아람은 티 내지 않기 위해 울렁거리는 속을 헛기침으로 겨우 진정시켰다.
“저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진정된 숨을 겨우 내쉬고, 남은 커피를 모조리 털어 넣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랑 여기서 나란히 앉아 있을 사람이 아닌데. 지금 뭐하고 있는 건지.
한시우가 뭐라고. 내가 왜 이렇게까지.
아람은 자신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시우가 미웠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가지고 싶었다.
벌써 그 비서랑 사귀는 건 아니겠지. 가끔 그런 불안감이 밀려올 때면 늘 생각했다.
한시우는 절대 변할 사람이 아니라고,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이제 가볼까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아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자기 지금 일하는 중?]
[웅. 피곤해ㅠㅠ]
금요일 밤. 직원들이 거의 다 퇴근한 로비는 한산했다. 우진은 피곤한지 어깨를 두드리며 나른하게 하품했다.
[어제 밤에 너무 힘들었어? 난 오늘도 기대 중인데♡]
풉. 진짜 너무 귀엽다.
답장을 확인한 우진은 입술을 쥐어짜듯 누르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겼다.
[오늘은 진짜 각오해. 아, 빨리 퇴근하고 싶다. 오늘 같은 날은 여기서 뭐 하나 싶어.]
[그러니깐. 울 자기 힘들겠다. 배는 안 고파?]
“저기요?”
메시지에 온 정신이 쏠렸던 우진은 로비에 손님이 온 것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아. 네. 죄송합니다. 어쩐 일이시죠?”
손님 두 명이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진은 급히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적혀 있는 스케줄을 살펴보았다.
어쩐지 낯이 익어 힐긋거리는데, 명찰을 확인한 아람이 웃으며 먼저 아는 체 했다.
“김우진 씨.”
길게 늘어지는 입매와 기다란 체인 귀걸이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여전히 귀엽네요?”
그제야 우진은 이 화려한 사람이 낯익었던 이유가 기억났다.
자신과 엘리베이터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손님.
다른 직원들과 대화하다 아람이 등장한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그녀가 대표의 애인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다 요즘 뜸해져 헤어진 것으로 결론이 났었다.
“여기에 적으면 되는 거죠?”
아람은 보안직원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펜을 들어 자연스럽게 개인정보를 적어 내려갔다.
우진은 눈초리를 가늘게 만들어 그 모습을 관찰했다.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제 잘난 맛에 사는 여자 같았다. 자세히 보니 오늘은 어쩐지 조금 긴장감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람이 반듯한 글씨로 자신과 일행의 정보를 적어 내려가는데, 내려놓았던 핸드폰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우진아, 나 지금 회사 앞이야. 입구 쪽 봐봐!]
우진은 흠칫하며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유리 벽 너머에서 자그마한 주혜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얀 코트를 입고 서 있는 모습이 눈사람처럼 귀여웠다.
“다 적었어요. 올라가면 되나요?”
어쩐지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는 듯해 보이는 보안직원을 향해 아람이 딱딱하게 질문했다.
“아! 네네. 이쪽으로 오세요.”
우진이 허둥거리며 스피드게이트 통로를 열었다. 허리까지 오는 유리문이 활짝 열리자 아람과 영희는 서로 마주 보며 싱긋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우진은 턱 끝을 높이 치켜올려 멀리 있는 주혜와 눈을 맞추었다. 잠시만. 입 모양을 최대한 크게 벌려 상황을 전했다.
그는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서야 손에 보안카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보안 키! 잠시만요.”
산만하고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보는 사람마저 정신없게 만들었다.
그것이 제일 못마땅한 것은 우진 자신이었다.
“대표는 왜 회사에 있지도 않으면서 약속을 잡아 가지고. 주혜 기다리게.”
작게 중얼거렸다.
데스크 안쪽에 보관되어 있는 보안카드를 집으며 우진이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로비에 들어온 주혜의 코가 빨갛게 변해 있었다. 우진을 향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한층 급해진 그는 안내를 서둘렀다. 빠른 걸음으로 돌아와 손님을 탑승시키고, 패드에 보안 키를 댄 후 15층의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기 시작했을 때, 아람이 물었다.
“대표님은 미국에서 왔어요?”
그 질문에 우진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대표와 비서가 없는데, 손님이 올라가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와. 나 진짜.”
열림 버튼을 다급히 눌러 겨우 운행을 멈추었다.
“아, 죄송합니다. 지금 비서실이 비어 있어서 올라가실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확인하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 비서님이 당분간 비서실에 올라가 있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월튼에게 먼저 연락을 했어야 했다.
아람이 자신을 쏘아보는 눈빛을 느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빨리 비서에게 전화해 이 불편한 상황을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네. 보안팀입니다.”
우진은 서너 걸음 재빠르게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비서 월튼입니다.
“아. 비서님. 안녕하십니까.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지금 손님분들이 오셨는데.”
-아. 아람이 왔습니까? 저 좀 바꿔 주시겠어요?
월튼의 부탁에 우진은 기다렸다는 듯 전화기를 상대방에게 건넸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아람은 떨떠름한 한숨을 내쉬고는 마지못해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네. 월튼.”
-아람. 왜 전화를 안 받아요. 몇 번을 전화했는데.
“전화요? 아. 무음이라서 몰랐나 봐요. 무슨 일 있어요?”
-지금 인천 쪽에 갑자기 눈이 많이 내려서 도로가 완전 마비되었습니다. 너무 늦을 것 같으니 약속을 다시 잡아야 할 것 같아요.
내용을 전해 듣는 아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작은 다이아가 일렬로 박힌 귀걸이가 너풀너풀 흔들렸다.
대화를 유심히 듣던 영희는 상황을 짐작했는지 손에 들린 와인과 케이크를 시무룩하게 내려보았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한적한 로비를 쭉 훑었다.
정문에 서 있는 조그마한 여자를 한 번. 직원 출입구를 한 번. 엘리베이터를 한 번.
바쁘던 눈길은 우진의 손에서 멈추었다. 얇은 끈, 길쭉한 아크릴 케이스가 반짝거렸다.
영희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보안 카드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