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3화. 불씨 (73/85)


제73화. 불씨
2022.07.11.



“윽.”

몸이 틀어진 도아는 곧 영희와 눈이 마주쳤다. 거센 악력에 인상을 썼고, 영희도 따라 표정을 구겼다.


“너. 왜 대답 안 해? 비서 아니지? 비서는 못 온다고 했어.”

“이거 놔요!”

어깨에 올라가 있는 손을 찢어내듯 떨어트린 도아가 거칠게 외쳤다.


“비서 맞습니다. 일단 촛불부터 끄고, 그때 이야기해요.”

“밝고 좋은데 뭐하러?”

선명한 그림자가 만들어 낸 영희 얼굴은 섬뜩했다.


“너, 여기 사장님 해코지 하려는 사람이지?”

“무슨 소리 하세요?”

마음이 다급한 도아를 붙들 정도로 영희의 말은 이상했다. 그녀는 눈동자를 번뜩거리며 바짝 다가왔다.


“비서는 남자야. 여기엔 오늘 아무도 없다고.”

그녀는 가느다란 도아의 손목을 꽉 우그려 잡았다.

깡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마음만 먹으면 부러트릴 수 있겠다고 영희는 생각했다.

도아가 손을 빼려고 애를 써도, 아귀힘이 얼마나 센지 점점 팔뚝을 조여왔다.

그 사이 영희 어깨너머로 보이던 작은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심지가 다 다른 초는 흰 연기를 공중으로 흩날리며 꺼졌다.

그래도 일단 불이 꺼졌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화르르. 정원 안쪽에 있던 불꽃이 크기를 키웠다.


“안돼…….”

안쪽까지 촛불을 꽂아 둔 모양이었다.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손을 뺄 수 없다면 끌고라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신고를 하든 소화기로 끄든 서둘러야 했다.

도아는 손이 붙들린 채 걸음을 힘겹게 옮겼다. 영희는 시커먼 눈동자를 크게 뜬 채 따라 움직였다.

저수지의 물 같은 눈빛이었다. 무섭고 소름이 끼쳤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그 긴장과 두려움을 이겨낼 만큼 도아는 다급했다.

여기는……. 이곳은…….

도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발끝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조금씩 영희를 끌고 왔다.

그래,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상대는 중년 여성인데. 이길 수 있을 거야.

그때 툭, 종아리에 종이가 부딪치는 느낌이 났다. 그리고 이어진 걸음 질에 질척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밟혔다.

도아는 순간적으로 몸에 힘을 풀며 고개를 내렸다.


“케이크?”

자신의 발아래 케이크 상자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밟아 망가진 케이크. 덕분에 구두에 하얀 생크림이 덕지덕지 묻었다.

그 옆에는 기다란 종이 쇼핑백이 엎어져 있었는데 와인 병이 튀어나와 있었다.


“내 거야!!!”

도아가 이해할 수 없는 물건들의 출처를 따져보기도 전에 영희가 고함쳤다.

갈라지는 목소리가 정원을 흔들었다.

흠칫하며 턱 끝을 들어 올리자 창백한 얼굴빛의 영희가 눈을 번쩍였다.

기운과 소리가 엄청났다. 도아는 너무 놀라 숨이 멈췄다.

작고 마른 체구에서 어떻게 이런 괴력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저 왜소한 덩치에 안일해졌던 순간이 후회되었다. 저 사람을 보자마자 신고를 해야 했는데.

기회가 오면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피가 거꾸로 솟은 영희는 더 매섭게 도아의 팔목을 틀어쥐었다.


“네가 내 선물을 밟았어!!! 망쳤어!!!”

눈가에 핏줄이 선명하고, 분노가 가득했다.

나무가 타는 소리와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정원 한쪽이 점점 더 붉어져 갔다.

숨이 어떻게 쉬어지는지 모를 정도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도아를 매섭게 쏘아보던 영희가 잠시 시선을 망가진 선물로 떨구었다.

도아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몸을 날렸다.


“으헉!”

체중에 밀린 영희는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중심을 잃으며 순간적으로 손을 풀고 말았다.

그 순간, 도아가 재빠르게 팔목을 빼내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뜀박질이 아닌 빠른 걸음에 가까웠다.

일단 전화……. 비상구로 가는 게 빠를까. 아니야, 불부터 꺼야 해.

머릿속이 뒤엉켜 우선순위가 매겨지지 않았다. 그러던 도아의 눈에 정원 입구 쪽에 놓인 소화기가 들어왔다.

결심은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정원이 더이상 불타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여기 있는 나무는 제가 직접 고르고 키운 나무들입니다. 보지 못한 나무는 없어요.’

‘여름에 흰 꽃이 핍니다. 그때 봐보세요.’

정원을 바라보던 시우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듯했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화기로 저 여자를 내리치고서라도, 꼭 불을 끄겠다 결심했다.

상체를 내리며 오른손을 뻗었다.

당장이라도 닿을 것 같아 손가락을 까닥였는데, 아직 거리가 있었다.

한 번 더 길게 팔을 뻗자 드디어 소화기의 윗레바가 손끝에 닿았다. 도아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피었다.

이를 윽, 깨물었다. 온 힘을 다해 손잡이를 움켜쥔 순간, 등을 떠미는 매서운 주먹에 몸이 허무하게 기울여 버렸다.


“도둑년.”

영희의 목소리가 어둠을 채웠다.

**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연결음이 끝나고, 안내 메시지가 나오고, 음성 녹음을 위한 신호가 들렸다.

시우는 한참을 핸드폰을 쥔 채로 있다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겨우 손을 내렸다.

도아가 연락을 받지 않았다. 메시지도 확인하고 있지 않았다.

잠들었나.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든 시우가 손가락으로 눈썹을 지그시 눌렀다.

차라리 피곤해서 잠든 것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경인 지역에 갑작스럽게 눈이 내렸고, 특히 인천에 눈 폭탄이 왔다며 뉴스에서는 속보를 내보냈다.

예고 없이 쏟아진 눈발에 눈이 쌓이고 추운 날씨 때문에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자동차들은 힘없이 미끄러지며 추돌사고를 냈고, 도로는 아수라장이었다.

겨우겨우 빠져나와 서울에 진입한 차는 이제 평소처럼 달렸다.

다행히 이쪽 하늘은 흐리기만 할 뿐이었다.

혹시나 사고가 날까 잔뜩 긴장했던 김 기사의 어깨는 아직도 경직되어 있었다.

여기서 기사와 비서를 퇴근시키고, 도아 집으로 바로 갈까.

어차피 도아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걱정이 되어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았다. 단단히 홀린 게 분명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회사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기 위해 업무를 가만 되짚던 시우는 몇 시간 전 도아와 나누었던 통화를 함께 떠올렸다.

퇴근했다고 말하던 도아의 목소리 뒤로 기계음이 들렸다. 아마도 프린트를 하는 중인 듯했다.

그리고 기내에서 힘들진 않았냐고 다정하게 묻던 목소리는 익숙한 잔향으로 울렸다. 이어지던 둔탁한 바람 소리.

도시의 야경 어디쯤을 바라보며 생각을 이어갔다.

도아의 집에는 프린터가 없다. 비서실에서 인쇄를 하고 복도를 걸어 나와 정원에 도착한 모습.


‘퇴근은 했어?’

‘네. 했어요.’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거짓을 말하며 해맑게 미소 짓는 모습을 떠올리자 웃음기 없던 시우의 얼굴에 온기가 돌았다.

이유는 굳이 캐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와 같은 마음이겠지.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한 대표님. 안 피곤해? 커피 한 잔 사서 갈까?”

하품을 크게 한 월튼이 고개를 뒤로 돌려 물었다. 사거리 건너편에 커다란 카페 간판이 보였다.


“아니. 그냥 회사로 바로 가.”

도아가 회사에 있다면 다른 곳에 들를 이유는 없었다.

위치를 알았으니 안심이 돼야 하는데, 어쩐지 마음이 아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회사는 안전한 곳이다. 에이치 그룹은 과할 정도로 임원들의 보안을 신경 썼다.

그 지침은 한국에 있는 시우의 집무실에까지 적용되었다. 15층에 가기 위해선 몇 개의 교차된 보안 방식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시우였다. 그런데도 이성과 감정이 유리되어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보안팀에 연락해서 15층에 사람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해.”

느릿하게 눈을 감아 내린 시우가 명령했다.


“15층? 도아 씨는 퇴근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도 확인해 봐. 김 기사님. 서둘러 주시죠.”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눈동자를 힐끔 들어 올려 대표의 얼굴을 확인한 기사는 다시 바짝 긴장하며 속도를 올렸다.


 

**

도아는 내동댕이쳐지듯 정원 바닥에 엎어졌다. 하얀 살결은 울퉁불퉁한 정원 바닥에 쓸리며 벗겨졌다.

조금씩 피가 차더니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제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다는 것이 더 절망적이었다.

고개를 돌려 소화기를 찾았다.

넘어지며 놓쳐버린 소화기가 데구루루 굴러 화분 틈에 박혀 있었다. 멀게만 느껴졌다.

몸 싸움을 벌이는 사이 커져 버린 불덩이가 정원을 조금씩 좀먹어 나갔다. 나무의 그림자들이 강한 대비를 이루며 얼룩덜룩 요동쳤다.

도아는 떨리는 숨을 몰아 내쉬며 시선을 가까이로 끌고 왔다.

달달 흔들리던 초점은 우뚝 서 있는 영희의 부츠 앞에서 멈추었다.

숨소리를 죽이고 턱 끝을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표정이 너무나 섬뜩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손에 아까 보았던 와인병이 들려 있었다.


“너 뭐야? 왜 비서인 척해?”

“비서가 한 명이 아니에요. 남자도 있고, 다른 사람도 있어요.”

“아니? 여기엔 아무도 없다고 했어. 그러니깐 넌 도둑. 도둑은 혼나야지?”

내려뜬 영희의 눈이 붉은빛으로 빛났다.

도아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어깨를 멈추려 애쓰며 제발,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저. 손님. 일단 불만 끄고. 불만 끄고 이야기 나눠요. 불만 꺼지면, 제가 얼마든지 잡혀드릴게요.”

“잡는 것도, 벌주는 것도 나야. 이런 케이크보다 회사에 숨어든 쥐새끼 잡는 게 사장님한테도 좋겠지?”

“사장님도……. 정원이 이렇게 망가지는 건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닥쳐.”

“대표님 잘 모르시잖아요?”

“뭐?”

영희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씩씩댔다.

깊은 상처에 다리가 욱신거렸다. 도망가면 잡힐 게 뻔했다. 소화기로 영희를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이 싫어한다고요.”

“닥치라고! 어디서 토를 달아!”

그녀가 비명을 빽 지르며 악을 썼다. 갈라진 목소리가 고막을 찢을 것만 같았다.

틈이 보였다. 도아는 신음을 흘리며 몸에 힘을 바짝 주어 일어났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됐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잡을 수 있었다.

순간,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힘에 도아의 몸과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으윽.”

“이게 미쳤나!”

철퍽 소리와 함께 도아의 등이 땅에 완전히 닿았다. 으깨지는 통증이 도아를 덮쳤다. 정신을 부여잡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불씨가 흩날리고 있었다. 시우와 함께 바라보던 벚꽃과 눈이 꿈처럼 지나갔다.

그 위로 영희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찰나의 아름다웠던 기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금니가 멋대로 맞부딪치면서 닥닥 소리를 냈다.

도망가기 위해 몸에 다시 힘을 주려는 찰나, 영희가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지?”

높게 올라간 와인병에 뻘건 불빛이 반사되어 번쩍였다. 그리고 영희는 아래턱에 힘을 바짝 주며 와인병을 내리찍었다.

쨍그랑!

와인병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도아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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