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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빨리 와 (74/85)


제74화. 빨리 와
202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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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과 목에 진득한 액체가 잔뜩 묻은 듯했다.

피일까? 생각하는데, 쌉싸름한 와인 향기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손끝과 발끝에 힘을 주어보니 다행히 움직여졌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쓰러진 몸은 바닥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으켜지지 않았다.

이어 고통이 찾아왔다. 몸뚱아리가 부서질 것처럼 아프고 쓰라렸다. 가쁜 호흡을 따라 가슴이 들썩였다.

붉은 와인이 눈꺼풀을 타고 흘러내려 속눈썹 틈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따가워 인상을 쓰던 도아는 몇 번의 깜빡인 끝에 겨우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눈길이 멈춘 것은 허리까지 오는 데크등 이었다. 정원을 밝히고,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드는 조명. 그것이 네모반듯한 기둥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영희가 매섭게 쳐내린 와인병이 저 조명 기둥에 엇맞으며 깨져버렸고, 도아의 머리는 무사할 수 있었다.

다행이다. 도아가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 찰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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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네.”

까칠한 땅굴을 긁으며 나온 듯한 목소리였다.

영희는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손에는 반쪽짜리 와인병이 들려 있었다.

도아는 눈동자를 조금 움직여 깨진 와인병의 단면을 확인했다.

불규칙하고, 날카롭고, 뾰족했다.

그리고 저것이 곧 자신을 위협하는 흉기가 될 것이라 단정 지었다. 불행하게도 그 생각은 곧 사실이 되었다.

영희는 와인병의 기다란 목 부분을 움켜쥐고 천천히 도아의 얼굴을 조준했다.

피 같은 빛이 얼굴 위에서 희롱거렸다. 뾰족한 유리 단면의 그림자는 이미 도아의 목에 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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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킥킥. 내가 사과 선물로 쥐새끼를 잡았네. 권아람 선생님이 사라고 한 것보다 훨씬 좋은 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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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아람 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람의 이름이 불쑥 등장했다. 도아가 목구멍에 힘을 짜 겨우 말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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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뭔데 선생님 이름을 불러?”

목을 길게 빼며 영희가 되물었다.

오늘 약속. 권아람. 시우가 그녀와 약속이 잡혔다고 말했었다. 월튼과 함께 만날 거라는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어쩐지 귀여워 도아는 장난스럽게 웃었었다.

권아람. 정신과 의사. 아람을 아는 사람. 어쩌면 환자.

짧은 기억을 더듬으며 눈앞에 섬뜩하게 서 있는 여자를 추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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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오늘 권아람 님과 약속이 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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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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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오늘 밤에 일정이 있었는데, 취소되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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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끼워 맞추고 있어? 내가 속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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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워 맞추는 거 아닙니다. 그것부터 내려놓고 이야기 나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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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희는 더 이상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도아를 믿는 눈치도 아니었다.

불길이 번지며 어두운 정원을 새빨갛게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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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하신 상황 이해합니다. 일단 여기서 내려가요. 다 괜찮을 거예요.”

제발. 제발요. 도아가 속으로 울먹이며 기도했다.

그 바람이 전해졌는지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동안 침묵했다.

차가운 겨울이었다. 겉옷 없이 맨바닥의 쓰러져 있는 도아는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더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정적 속에서 잠시 망설이던 도아가 어금니를 깨물며 상체를 일으켰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영희가 생각을 멈추고 다시 경계심을 내보였다. 그리고 이어 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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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 알았어.”

그녀의 시선은 도아의 손가락에서 멈추어 있었다. 불행하게도 손끝이 깨져버린 날카로운 유리 파편에 닿아 있었다.

영희의 눈빛이 희번덕거렸다. 손이 꽝꽝 얼어 붙어 있었던지라 감각이 없었다. 도아는 조금 늦게 상황을 이해했다.

여기에 이런 것이 있는 줄 몰랐다고 말하며 재빨리 손을 떼려 했지만, 영희가 빨랐다.

그녀가 치밀어 오른 분노를 폭발시키듯 발로 도아의 가슴팍을 세게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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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을 줄 알고? 날 찌르려는 거지?”

도아는 넘어가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화분의 가장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한쪽에만 힘이 가해진 화분은 순식간에 기울어졌고, 도아 역시 중심을 잃으며 식물과 함께 넘어갔다.

가녀린 등허리가 다시 바닥에 닿았다. 온몸이 얼어붙어 유리 깨지듯 부서질 것만 같았다.

무거운 부츠에 눌린 도아는 가슴이 짓눌려 숨쉬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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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그만 하……세요.”

도아의 떨리는 목소리가 바람에 묻혔다.

영희가 무릎을 꿇으며 바짝 고개를 내렸다. 붉은 얼굴이 도아의 눈앞을 가득 채웠다.

무서워. 너무 무서워.

두려움이 몰아치며 온몸을 뒤덮자 다시 사지가 부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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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칼만 버리면 다 잘될 거라고 하더니 경찰서로 넘겼다고…….”

중얼중얼 혼잣말을 내뱉던 영희는 한쪽 팔을 높게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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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안 속아!”

갈라지는 목소리로 소리치며 다시 한번 와인병을 세차게 내리쳤다.

붉은 정원에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다시 퍼졌다.

도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귓가에 퍼지는 날카로운 마찰음에 머릿속이 먹먹해졌다.

가까스로 반쯤 나갔던 정신을 되돌리고, 가쁜 숨을 몰아 내쉴 때쯤 깨달았다. 영희의 공격을 피했다는 것을.

만약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면 그대로 맞을 뻔했다.

감았던 눈을 떴다.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힘주어 몇 번을 깜빡이고 나서야 시야가 선명해졌는데, 보게 된 것은 퍼져버린 불길이었다.

당장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일렁임이었다.

봄날, 화분에 걸려 넘어졌던 자리가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여름 날,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들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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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귀룽나무이고, 저건 블루바드입니다. 블루바드는 프랑스어로 큰 가로수길이라는 뜻이고요. 어, 이건…….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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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나무.’

예쁘게 자랐던 나무들이 모두 다 화마에 휩싸였다.

가을 정원에서 괜찮아, 위로하며 자신을 안아주던 순간까지 송두리째 잿더미가 돼가고 있었다.

몸을 짓누르는 고통보다, 두려움보다 더한 슬픔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안 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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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못 피할걸?”

울먹이는 외침 위로 영희가 한마디 더 거들었다. 분노에 찬 도아가 고개를 돌려 영희의 두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빨리 꺼야 해. 해야만 해. 할 수 있어. 아직 늦지 않았어. 도아가 달달 거리는 어금니를 질끈 물었다.

얼굴은 하얗게 질린 주제에 눈빛은 또렷했다. 화가 솟구친 영희는 아까보다 더 세게 병을 쥐었다.

이번에는 숨통을 끊어놔야겠어. 적의를 씹어 삼키며 결심했다.

와인병은 더이상 몸통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날카로운 칼날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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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엔 사람이 없고, 비서는 남자야.”

영희는 상대방의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을 기세로 내려보며 한 번 더 중얼거렸다.

도아는 입술을 깨물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 손을 더듬거려 화분에서 쏟아진 흙을 욱여잡았다.

하나, 둘, 영희가 몸에 힘을 잔뜩 주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셋!

칼날 같은 와인병이 자신의 목을 향해 돌진한 순간, 도아는 가득 움켜쥔 흙을 영희의 얼굴로 있는 힘껏 내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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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헉!”

영희의 목구멍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상체를 뒤로 당기곤 얼굴을 다급히 털었다.

도아가 그 사이, 허리에 바짝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숨돌릴 틈 없이 영희가 붙들고 있는 와인병을 빼내기 위해 양손을 뻗었다.

철근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오른손이 도아에게 완전히 붙잡혔다. 그녀는 엉겨 붙은 흙먼지 때문에 눈도 뜨지 못한 채 남은 한 손을 휘적거렸다.

새까만 손톱이 도아의 얼굴에 생채기를 냈다. 이미 얼음처럼 차가워진 도아의 얼굴은 그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드디어 올가미 같은 손가락을 뒤틀어 와인병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흉기를 망설임 없이 불길 속으로 던져버린 도아는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날려 그녀를 밀쳤다.

도망가봤자 어차피 다리가 후들거려 얼마 못 가 저 여자에게 잡힐 것이 뻔했다. 주위를 재빠르게 훑어 아까 잡지 못한 소화기를 찾았다.

저 사람을 내리쳐야 해. 기절시켜야……. 그래야 내가 도망갈 수 있어.

도아가 한쪽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비틀거리며 완전히 일어서 두세 걸음 뗐을 무렵이었다.

검은 물체가 도아의 허리를 뒤에서 움켜잡았다.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움직임이었다.

안돼. 제발. 도아의 얼굴에 절망이 내려앉았다.

홀로 이곳에 있다는 것이 끔찍하게 무서웠다.

새까만 밤하늘에 나무가 타는 냄새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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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데 혼자 있으면 위험해. 어서 가자.’

술 취해 혼자 앉아 있던 자신을 걱정해주던 시우의 모습이 떠오른 건 환영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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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안 위험해. 나 호신술도 배웠어.’

호기롭게 되받아치던 것이 떠올라 쓰디쓴 조소가 터져 나왔다.

그때는 제 인생에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곤두박질치는 상실감. 그와 동시에 도아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이런 기억이 떠오른 건 기적이기도 했다. 어릴 때 배웠던 동작이지만, 몸이 조각난 듯 아리지만, 상대는 체구가 작은 여자이니 희망이 있었다.

도아가 팔과 어깨를 뒤로 보내 영희의 뒤통수 쪽 머리채를 쥐어 잡았다. 그리고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윽깨물며 앞으로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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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악!”

영희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몸뚱아리가 앞으로 돌려 넘어지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쌀자루라도 떨어진 듯 무겁고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부터 떨어진 영희는 그 충격이 그대로 목과 어깨로 이어졌다.

도아가 떨리는 숨을 연거푸 쉬며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녀는 이미 정신을 잃은 후였다.

됐어……. 끝났어…….

영희로부터 벗어난 도아가 벌벌 떨리는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빨리 불을 꺼야 해. 도움을 청해야 해.

로비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려세웠다. 붉은 불기둥이 도아를 위협했지만, 뛰지 못했다.

몇 초 동안 말없이 정원을 바라보던 갈색 눈동자는 이내 초점을 잃고 말았다.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천천히 기울어져 가는 시우의 정원을 바라보며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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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와.’

자신이 조르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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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빨리 갈게.’

낮고 묵직한 음색으로 시우가 대답해주었다.

**

반딧불 같던 불씨는 낙엽과 나뭇가지로 옮겨가 몸집을 키웠다.

조금씩. 조금씩. 차가운 바람을 타고 퍼져나갔다.

과습으로 잎이 변했던 나무도, 여름에 흰 꽃이 피는 나무도, 가지치기가 되지 않은 나무도. 한입 두입 먹혀갔다.

화마가 시작된 정원은 이제 잿빛 연기가 가득 찼다. 정원으로 이어진 문으로 연기가 흘러들었다.

화재경보기가 울리고 스프링클러가 작동되어 로비에 물을 뿌려댔다.

그 소리에 영희의 눈두덩이가 꿈틀 반응했다.

쿨럭, 기침을 내뱉고 깨질 듯한 머리를 힘겹게 가누며 몸을 일으켰다.

붉게 타오르는 정원을 가로 쭉 훑었다. 시선이 멈춘 것은 정원의 입구 쪽을 봤을 즘이었다.

엎드려 쓰러져 있는 도아를 보고서야 자신이 왜 정신을 잃었었는지가 기억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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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년.”

내뱉는 한마디 안에 살기를 넣었다.

이런 사람은 벌을 줘야 해. 숨통을 끊어버려야 해.

영희는 망설임 없이 뾰족한 것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엎어진 화분 옆에 알맞은 크기의 유리 조각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네발 달린 동물이 두 발로 뛰어다니는 이상한 폼으로 그것을 낚아채듯 잡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도아의 앞으로 걸어갔다.

시커먼 눈동자로 쓰러진 도아의 몸의 이곳저곳을 살피던 영희는 마침내 적당한 과녁 점을 찾아냈다.

저기가 좋겠다. 망설임 없이 손을 조준한 영희가 비명을 내지른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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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아악!!!”

이제껏 내질렀던 소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괴로운 고성이 정원 전체를 흔들었다.

괴로움을 토해내는 영희의 귓가에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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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뭐야.”

너무나 섬뜩해 온몸이 저절로 몸부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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