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겨울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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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겨울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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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겨울밤
2022.07.18.
시우가 손목을 들어 올려 시계를 봤다. 앞에서는 답답한 상황만 보일 뿐이었다.
월튼이 로비 데스크로 몇 차례 전화를 걸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휴무였던 보안팀장 역시 연락이 되지 않았다.
파란 눈동자가 뒤를 힐금대며 눈치를 살폈다.
“신호는 왜 이렇게 자주 걸리는 거야?”
비서는 애꿎은 교통상황을 탓하며 턱 끝을 들어 올렸다.
-네. 비서님. 어쩐 일이십니까?
트럭 위로 절반 정도 보이던 신호등 불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때마침 통화에도 성공했다.
상대방은 사내문화팀 팀장이었다. 보안팀에 연락이 닿지 않아 결국 그 팀을 관리 담당하고 있는 부서에까지 연락이 가게 되었다.
월튼은 간결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근무자 번호만 넘겨달라 말했다.
팀장에게 전달하라고 말한다면, 근무자를 혼내느라 시간이 지체될 것이 뻔했다.
바로 알아보겠다는 대답과 죄송하다는 사과가 들려왔다.
통화가 끝나자 차 안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대표는 뒤척임 한 번 없이 숨을 깊게 삼켰다.
차가 또다시 신호에 걸리며 덜컹 흔들렸다.
마음이 급했던 김 기사가 평소답지 않은 실수를 한 것에, 오히려 월튼이 당황했다.
눈이 마주치자 김 기사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고, 비서는 이해한다는 듯 끄덕여 주었다.
핸들을 움켜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바로 앞에 차들만 없었어도 위반했을 것이었다.
짧은 알람음과 함께 근무자 연락처를 담은 메시지가 왔다. 신호도 바뀌었다. 코너만 돌면 회사 빌딩이 보일 예정이었다.
이제 이 팽팽한 긴장감의 끝이 보였다.
월튼은 전화를 안 받는 근무자에게 미친 듯이 화가 났지만, 15층에 아무도 없다는 확인만 오면 이런 근무 태만쯤이야 용서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저 뒤에 말없이 앉아 있는 사람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 것이 분명했다.
“연락처 왔어. 바로 전화할게.”
월튼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차가 부드럽게 회전했다. 평소보다 다급한 핸들링에 시우의 몸이 왼편으로 쏠렸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거슬리는 차창을 내려버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에이치 코리아 로고가 반짝이는 유리 건물을 내다보았다.
몸 안으로 차가운 겨울 공기가 들이닥쳤다. 폐부까지 말라버리는 기분이었다.
15층 유리창을 살폈다. 불이 꺼져 있었다.
그제야 시우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무서운 가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난 시우는 이제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다 잠든 도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빨리 와.’
조르듯 말하는 목소리가 귓가를 채웠다.
‘알았어. 빨리 갈게.’
그녀보다 더 빨리 가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었는데.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쯤,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시우는 다시 한번 건물을 살폈다.
그 사이 차량은 내달리는 방향을 바꾸었다. 이제 회사로고가 없는 건물의 반대편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원이 자리잡은 쪽이었다.
그리고 시우는 순식간에 온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불.
안도감이 깃들었던 짙은 눈동자가 덜컹 흔들렸다.
건물 옥상에 붉은빛이 어리어 있었다. 스쳤던 불안감은 건물 위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던 연기를 놓쳤기 때문이었다.
에이치 코리아 옥상의 난간은 높았다. 게다가 일반 철제난간이 아니라 벽을 쌓아 올렸기에 외부에서 정원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보안을 철저히 여긴 헨리 마커의 방침이기도 했다.
그런 걸 다 감안하고서도, 시우의 눈에는 몹시 선명하게 보였다.
너무 놀라 소음도, 매연도 잊어버린 사이 불이 화르르 몸집을 키웠다. 순식간이었다. 연기가 치솟았다.
“월튼.”
비서가 몸을 돌려 대답하기도 전에 시우가 뒷말을 내뱉었다.
“빨리 신고해.”
“뭘?”
대표의 창백한 얼굴을 확인한 월튼이 그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보았다. 입에서 욕짓거리가 흘러나왔다.
“차 세우세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 중이던 김 기사는 시우의 명령에 홀린 듯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도로 한복판에서 차가 멈추기 무섭게 시우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 대표!”
놀란 월튼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튀어나왔다.
차는 4차선 도로 한가운데 뒷좌석 문이 활짝 열린 채 정차하게 되었다.
“진짜 미치겠네. 기사님, 회사에 불났으니 신고하세요! 당장!”
안전벨트를 풀며 월튼이 말했다. 일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시우를 쫓아갔다.
**
시우가 먼저 회사에 도착했다. 그는 로비에 근무 요원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인상을 쓰며 스피드 게이트로 달려갔다.
보안 키 없이 지나가는 불청객을 막기 위해 유리 게이트가 닫히고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지만, 시우는 개의치 않고 넘어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버튼이 눌리지 않았다. 승강기와 싸움을 할 것도 아니면서 시우는 두 걸음 정도 뒤로 걸어 고개를 젖혔다.
이 건물에 없기를. 있다면 도망갔기를. 미련하게 불이나 끄는 행동을 하지 말기를.
걱정과 짜증이 뒤엉켜 솟구쳐 오르려는 찰나. 뒤쫓아 온 월튼이 소리쳤다.
“한 대표! 미쳤어? 너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보안카드 있어?”
이미 반쯤 미쳐 보이는 대표는 비서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여기저기 서성대거나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라면 어르고 달래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할 텐데.
15층에 도아가 없는 것을 확인해야지만, 그가 제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월튼은 군말 없이 보안카드를 대고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7, 6, 5, 5, 5.
숫자는 5에서 멈췄다.
동시에 건물 전체에 화재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재로 인해 승강기 작동이 중단된 것을 알아차린 시우는 월튼의 손에 들린 보안 키를 잡아뺐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비상계단 철문을 밀었다.
구두가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파장이 일정하고 빠르게 공간을 채웠다.
동시에 들리는 숨소리는 거칠진 않았지만, 순간순간 못 견디겠다는 듯 큰 한숨을 내뱉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두려운 감각이 몸을 조여왔다.
늘 느끼던 괴로움인가? 아니었다.
이제껏 몰랐던, 알고 싶지도 않은 부류의 감정이었다.
‘대표님.’
도아가 자신을 불렀다.
‘한시우.’
환청이란 걸 알았다. 웃는 것 같기도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오묘한 목소리였다.
불안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살갗을 찢고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못 견디게 힘든 그 시간을 지나 시우가 마침내 15층 비상구 문을 열었다.
따르르르르, 귀를 울리는 화재경보음이 섬뜩했다.
스프링클러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발끝이 순식간에 젖었다.
몹시 서늘한 공기와 어둑한 로비가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정원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도아가 회사에 있었다면 분명히 놀라 정원으로 달려왔을 것이었다.
시우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철벅거리는 걸음질로 정원에 다다랐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불길에 죽어버린 나무와 풀잎. 그리고 무언가.
그래도 희망을 품고 있었다. 자신의 노파심일 거라고. 보고 싶은데 연락이 안 돼 마음이 불안해진 것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런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선 끝에 온몸이 붉게 젖어 있는 사람이 들어왔다.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의식이 없는 사람.
“도아…….”
그것이 도아란 것을 알아차린 순간, 시우의 머릿속에서 섬광이 폭발했다.
**
“아아아아악!!!”
“당신 뭐야.”
영희는 대답을 하려고 했으나 손목이 끊어질 것 같아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거센 악력에 손이 달달 떨리며 펼쳐졌다. 쥐고 있던 유리 조각이 떨어지자 시우는 더 매섭게 손을 비틀었다.
“도둑은……이……요!”
발음이 뭉개져 알아듣기 힘들었다.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대답 따위를 들을 여유가 없었다.
시우는 영희를 던져버리다시피 놔버렸다. 힘에 밀린 영희가 크헉, 소리를 내며 옆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시선은 다급히 도아 쪽으로 넘어갔다.
자신이 함부로 만지지도 못하던 얼굴이었다. 그 위로 상처와 축축한 피, 빨간 불빛이 엉겨 붙어 있었다.
시우가 미간을 좁히며 다급하게 도아를 끌어안았다.
차갑게 식어 있는 몸을 알아차린 눈동자가 삽시간에 커졌다. 온기 없이 얼어붙은 몸은 산 사람 같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추어 버린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그사이 불은 또다시 옆 나무로 옮겨붙으며 몸집을 키웠다. 회색 연기가 더 매섭게 밀려왔다.
시우는 눈꺼풀을 들어 올려 재로 변해 힘없이 떨어지는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그때, 품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아였다.
“한시우.”
힘없는 목소리가 점멸해가던 시우를 붙잡았다.
고개를 내려 도아와 눈이 마주쳤는데, 어이없게도 그녀는 봄꽃처럼 따사롭게 웃고 있었다.
“안 늦었네.”
솜털 같은 숨결이 콧잔등에 닿고서야 시우는 숨을 제대로 내쉴 수 있었다.
“미안해.”
시우는 입술을 짓깨물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잔기침을 몇 번 내뱉은 도아가 뿌연 연기로 뒤덮인 하늘을 바라봤다.
“불을 끄려고 했는데…….”
“괜찮아.”
“정원이…….”
“너만 무사하면 그걸로 됐어.”
흐려져 가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말하자, 시우가 대답했다.
도아는 처음 보는 그의 표정이 조금 낯설었다. 사색이 되어 물끄러미 자신만을 바라보는 검푸른 눈동자가 몹시 슬퍼 보였다.
고요하고 깊은 겨울밤을 그대로 담고 있는 색이었다.
도아는 힘겹게 손을 올려 시우의 한쪽 뺨에 가져다 대었다.
“괜찮아. 울지마.”
이미 정신이 몽롱해졌던 도아는 그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제대로 본 것일지도 몰랐다.
“응.”
시우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끝으로 도아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칼바람이 방향을 바꿔 두 사람을 덮쳤다.
시우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도아를 감싸 안고는 굽혔던 무릎을 폈다.
아까보다 더 단단하게 안아 들고 스프링클러 물줄기가 쏟아지는 로비로 들어섰다.
때마침 비상구 문이 열리며, 대표를 뒤쫓아 온 월튼이 나타났다.
그는 매우 숨이 차 보였고, 무엇보다 엉망이 된 15층을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불바다가 된 정원과 골을 때리는 경고음이 세상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서 있는 월튼을 시우가 불렀다.
“월튼. 어서 문 열어.”
빨리 내려가야 한다는 고갯짓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
따가워진 눈을 비비며 월튼이 다시 문을 밀었다. 시우가 연기를 뚫고 나와 막 계단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사장님! 사장님 맞아요?”
허리춤을 강하게 부여잡는 힘과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