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7화. 이별 (77/85)


제77화. 이별
2022.07.25.


감길 듯 말듯 눈을 껌뻑이던 도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떨어졌다.

시우가 우드 블라인드의 슬랫을 들추어 창밖을 확인했다. 눈 내리는 도로에 동그란 가로등 불빛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겨울밤은 길었다. 여름이었으면 푸르게 변했을 하늘이 아직 조용했다.

다시 의자로 돌아온 시우는 협탁에 올려두었던 노트북을 집어 들었다. 작은 키보드 소리가 적당한 기계음과 포근하게 겹쳐졌다.

어두운 방 안에 얕게 퍼져있는 스탠드의 불빛, 식물이 좋아할 만한 온도와 습도, 도아의 규칙적인 숨소리.

이 고요한 시간이 조금 더 이어져도 좋겠다 싶었다. 병원에서 환자를 간병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시계를 확인한 시우가 통화하기 위해 이만 손잡이를 잡았을 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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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세요?”

돌아본 곳에 토끼처럼 자신을 올려보는 도아가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계획을 바꾸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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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안 가.”

나가려던 시우는 여유롭게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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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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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악몽을 꿔서……. 대표님은 안 주무시고 일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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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헨리 대표한테 매일 하나 보냈어.”

악몽에 시달린 하얀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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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비서님이 어떡하면 편하게 잘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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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해 줘요. 대표님 어릴 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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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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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듣고 싶어요. 왠지 오늘은 말해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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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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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위해 뭐든 해줄 것 같은 눈빛이에요. 한시우 대표님.”

능청스러운 대답과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미소였다. 그 얼굴 위로 쓰러졌던 도아가 선명하게 겹치다 흐려졌다.

시우는 달보드레한 뺨 위에 보이는 할퀸 상처와 손목에 남은 퍼런 멍 자국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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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봤어.”

그런 밤이었다. 꽁꽁 싸매던 것들도 홀린 듯 말하게 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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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부터 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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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살았던 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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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여유롭던 얼굴이 무표정하게 바뀐 건 찰나였다.

집집마다 훌륭한 정원이 있고, 친절한 이웃들과 멋진 나무가 가득한 마을.

어머니 목소리, 아버지 미소, 행복했던 자신.

아직도 그 시절의 햇빛과 향기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어머니의 병환을 지켜보던 순간들. 아버지와의 이별. 할머니와 함께 시작된 낯선 곳에서의 생활.

혼자가 되어 멍하니 바라보던 하늘과 흔들리던 풀잎들.

너도 곧 부모님처럼 될 거야.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 시우는 그때마다 포기하듯 대답했었다.

물방울 같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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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표님은 괜찮으실 거예요.’

무더운 여름날에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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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울지 마.’

화염이 뒤덮인 세상에서 자신을 꺼내주던 손길.

머릿속에 맴도는 목소리를 향해 소리 없이 대답했다.

그래. 괜찮을 거야.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올린 시우가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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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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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따금 생각해. 나의 선택이 너무 이기적이지는 않았나. 혹시라도.”

내가 떠나고 네가 혼자 남게 될까 봐. 또다시 시커먼 상념에 빠질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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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요. 이기적으로 생각해줘서……. 그래서 저는 오히려 고마워요. 대표님이 고백 안 했으면 내가 덮쳤을 거야.”

어느새 몸을 일으킨 도아가 따스하게 웃으며 시우를 품에 안았다. 그는 기꺼이 가녀린 몸에 기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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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행동을 보면 상당히 납득이 가는 대답이네.”

잠기운이 묻어 있는 향기가 오늘따라 더 포근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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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시간이 짧거나 길거나 상관없이 곁에 있고 싶어요. 언젠간 혼자가 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건 가정일 뿐이고,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일이니깐요. 난 정말 괜찮아. 그러니 당신도 이제 힘들었던 기억을 조금씩 놔줘요. 그리고 저랑 함께 다른 기억을 채워가요. 할 수 있죠?”

허리를 세운 시우의 눈빛이 도아의 얼굴에서 멈췄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잔뜩 힘을 준 모습이 평소보다 훨씬 다부져 보였다.

도아와 함께 하다 보면 가끔 그런 기분이 들곤 했다.

늘 현재 같았던 기억은 정말 과거가 되고, 지금, 이 순간만 생생해지는 기분.

그래서 부모님의 무덤을 떠나기 전에 그런 말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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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두 분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놓아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느릿하게 턱 끝을 내린 시우는 짧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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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해볼게. 할 수 있을 거야.”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이도아 선생은 말 잘 듣는 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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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백 점. 잘했어요.”

손가락 틈으로 짙은 머릿결이 부드럽게 감겼다. 아이처럼 웃던 도아의 표정이 사라진 건, 자신을 바라보는 시우의 시선이 조금 전과는 다르다는 걸 알아차리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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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대표님……?”

그러니깐, 눈동자가 조금 야한 것 같았다. 이제는 제법 많이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볼 때마다 온몸을 긴장시켰다.

시우가 손을 뻗어 도아의 눈물 자국을 닦았다. 그리고 뺨으로 입술로 천천히 파고들었다. 손길이 닿자 두 볼은 차가 우려지듯 붉게 변해갔다.

도아가 장밋빛 입술 끝을 힘주어 오므려 부자연스럽게 침을 삼켰다.

다가오는 숨결에 가슴이 쿵쿵쿵 더 요란하게 요동치는 순간, 진동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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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시우는 시선만 내려 핸드폰을 확인했다.

에이치 퍼니처 그룹 헨리 마커 대표였다.

한국 대표가 전화한다고 했으나, 감감무소식이니 직접 연락을 해버린 성격 급한 아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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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가 없으시네.”

시우가 한숨을 내뱉으며 허리를 세웠다. 그사이 도아는 놀라 멈추었던 숨을 내뱉으며, 앞가슴을 꾸욱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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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오래 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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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게 많으실 거야. 한 시간 정도? 자고 있어.”

시우가 고개를 가볍게 틀어 상대방의 입술을 쪽, 살포시 적시자 가녀린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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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와야 해요. 보고 싶으니까. 기다릴래요.”

두 뺨이 장밋빛으로 변한 도아가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촉촉해진 입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달콤했다.

한층 따뜻해진 눈길로 도아를 내려보던 시우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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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으니까, 기다렸단다.’

그러다 불현듯 스친 기억 하나에 발걸음이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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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야.’

이어 비현실적인 목소리가 귓바퀴를 맴돌았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어린 시우가 뒤돌아봤다. 눈앞에는 어머니의 병실이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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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불렀어요?’

기다란 호수가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는 인사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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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내일 또 올게요. 안녕.’

실망한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무서운 모습만 다시 확인한 시우는 눈을 질끈 감으며 병실을 떠났다.

그녀가 살아 있는 것은 기적이었다.

시우가 내일 또 온다고 말하면 딱 그만큼만 더 견디며 버텼다고 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시우가 보고 싶으니 괴로운 시간도 참았다고.

그 이야기를 아버지가 해주었었는데, 잊고 있었다.

어머니가 없는 세상이 너무 슬퍼서, 어쩌면 죄책감에 지워버렸던 이야기였다.

자신에게 괴로움이 되어 남는 시간이, 사실은 누군가에 빛과 같은 시간이기도 했다.

성인이 된 시우가 몸을 돌렸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는 도아의 미소가 검은 눈동자를 채웠다.

도아가 손을 흔들자, 시우는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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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올게. 기다려줘서 고마워.”

 

**

아직 잠잠하기만 한 밤의 끝자락. 시우는 중간층에 조성된 야외 공간으로 나왔다. 장미가 피었던 덩굴이 담벼락에서 눈을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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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대표님. 일이 생겨서 바로 전화를 못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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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는 무슨. 아저씨라고 부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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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럴게요. 아저씨.”

몸이 회복된 헨리 대표는 화재사건, 4호점 오픈, 미국 출장에 관한 이야기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시우는 바람 한 자락 맞으며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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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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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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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튼이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네 걱정을 많이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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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남 걱정하는 재미로 사는 친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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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도 잘 안 가려고 한다던데. 정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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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지금도 병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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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정적이 흘렀다. 아무래도 못 믿는 눈치였다.

시우는 상대방의 답변을 기다리며 주머니에 넣었던 왼손을 빼내었다.

난간 상판 위에 뽀얗게 쌓여 있는 흰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 손가락을 한줄기 곡선을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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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만나면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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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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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튼한테 이야기를 듣다 보니 혹시 네 부모님 때문인가 싶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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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지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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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아팠던 건 정말 유감이다. 그때 지섭이나 나나 가족을 돌보기에는 너무 바빴어. 매출과 투자는 감소하는데, 경쟁은 치열해졌으니. 괴로워했어. 가족들을 충분히 보듬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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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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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섭이가 병으로 죽었다고 알고 있다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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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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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나는 아니라고 믿어. 경쟁사 사람이 공동대표실로 침입한 흔적이 있었거든. 난 독살을 주장했지. 부검을 하고 싶었지만, 지섭이 어머니가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처럼 소리를 치셨어. 내 아들 몸에 칼 하나 댈 수 없다고. 내 아들을 죽인 건 에이치 퍼니처라고.

시우는 회사 이야기를 꺼내면 신경질적으로 변하던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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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 CCTV가 있던 것도 아니고, 보안을 신경 쓸 정도로 큰 회사도 아니었으니. 내 입장에서는 석연치 않게 마무리되었단다. 지섭이의 사망은 과로로 인한 지병 악화 정도로 조금 늦게 기사화되었단다. 투자자들이 투자를 철회할 수 있는 상황이었거든. 그 틈을 노리는 회사들이 많았어.

헨리 마커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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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섭인 몸도 정신도 너무나 건강했지. 네 어머니도 정말 강한 분이었어. 그러니 그 힘든 시간을 버틴 거 아니겠냐. 당연히 알고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월튼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쩌면 네 할머니가 정말 아무 말도 안 해 줬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우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저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지금과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되돌릴 수도 없는 일에 후회와 미련을 증식시키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랬다면 이도아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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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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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조금 더 오래 있을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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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들어오고? 너 미국 오면 주려고 마이애미에서 요트까지 하나 사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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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있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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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왕 하는 거 더 열심히 해서 다른 아시아 나라까지 넓혀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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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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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나는 이제 검사받으러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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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세한 사항은 다시 보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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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다.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시우는 자신이 눈 위에 그려놓은 휘어진 곡선을 다시 확인했다.

어둑한 곳에서 목을 조였던 뱀을 닮아 있던 그것이 함박눈에 덮여 사라져 있었다.

고개를 들자 새벽빛이 물들기 시작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헨리 마커가 오늘 전해준 이야기는 적어도 단 하나의 사실만은 분명하게 해주었다.

도아와 함께 오래도록 행복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 그것이면 충분했다.

시우는 지난날을 떠올리며 짧게 조소를 흘렸다. 까마득히 먼 곳에서 사뿐히 내려오는 눈이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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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말 이별이야. 다시 오지 마.”

낮은 목소리가 느긋하게 퍼졌다.

시우는 울고 있던 어린 자신과 부모님의 그림자를 하얀 눈송이 사이로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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