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칭찬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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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칭찬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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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칭찬 말고
2022.07.29.
날이 밝고 제일 먼저 찾아온 것은 천 회장과 리라였다. 둘 다 술 냄새가 풀풀 풍겼고, 해장이 필요한 몰골이었다.
처음 파티에서 만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친숙한 모양새에 도아는 그만 웃어버렸다.
새벽에 얼마나 놀란 줄 아냐며 호통치는 천지아 회장의 모습은 뉴스에서 보던 것과는 정반대로 너무나 따뜻해 보였다.
두 사람이 에이치 코리아 사옥의 화재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새벽녘이었다.
아들이 또 구설수에 올라 속이 단단히 상했던 천 회장은 리라를 불러냈다.
자정 깨부터 시작된 한탄은 몇 시간이고 이어졌다.
‘회장님. 그만 드세요. 이제 곧 해가 뜰 거라고요.’
‘밤은 길어. 젊은 게 벌써부터. 쯧.’
리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시 깨끗한 글라스에 레드와인을 채웠다.
베이스를 가볍게 잡고 돌리자 볼 안에 담긴 붉은 액체들이 동그랗게 회전했다.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천 회장은 와인을 한 모금 넘기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메모지를 뜯어 무언가 열심히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뭘 그렇게 열심히 적으세요? 아드님 욕이라도 적고 계세요?’
‘덕담.’
‘덕담이요? 갑자기?’
‘와인이 좋으니 와인 잘 마시는 한 대표 생각이 나고, 자식들이 속 썩이니 우리 웬수가 한 대표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겠다 싶고. 그러다 보니 이놈 결혼할 때 무슨 말을 해줄까 정해놔야겠다 싶어서. 주례는 내가 할 거거든.’
천 회장이 인자하게 웃으며 종이를 건넸다. 리라는 유난히 꼬부랑거리는 그 글자들을 유심히 읽어 내려갔다.
한 줄 한 줄. 애정이 가득 담긴 글귀였다.
‘이런 주례를 받으면, 분명 행복할 거예요.’
‘그럼 행복해야지.’
‘진짜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리라야. 너도 봤잖니. 비서가 힘들어서 속상했다잖아. 거기다가 선물도 사주고, 너도 둘이 사귀는 사인 줄 착각했다며. 이건 확실해. 내가 세월의 내공이 얼마인데.’
‘그렇게 꼰대가 되는 거예요. 회장님.’
‘뭐?! 이게 오냐오냐 해주니깐.’
천 회장이 리라의 손에 들린 메모지를 뺏어가며 걸걸하게 외쳤다.
리라가 잔을 잡으려다 실수로 엎지른 것은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을 때였다.
쨍그랑 소리에 알딸딸하던 정신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대리석 상판은 깨져버린 와인잔과 와인으로 순식간에 엉망이 되고 말았다. 깜짝 놀란 리라가 다급히 리넨 냅킨을 펼쳐 테이블을 정리했지만, 붉은 액체가 새하얀 러그를 물들인 후였다.
난감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때마침 김 비서가 들어왔다. 천 회장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새파랗게 질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회장님. 에이치 코리아 사옥에…….’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어댄 천 회장은 지쳤는지 소파에 몸을 눕듯이 기댔다.
“하필 와인이 깨져서 시뻘건 거야. 너무 불길하더라고. 이 비서는 혼자 있었다면서? 놀랐겠어.”
“그러게요. 정말 무서웠겠어요.”
“괜찮아요. 늦지 않게 구조대가 도착해서 많이 다치지 않았어요. 두 분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도아는 감사 인사를 전하며 리라의 안색을 살폈다. 월튼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이후부터 놀랐는지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파티 때가 불현듯 떠오른 도아가 먼저 바람을 쐬고 오자고 제안하자 리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와 둘만 남은 병실에서, 이마에 손을 올리고 있던 천 회장이 낮게 키들거렸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뭐가 말씀입니까.”
“어느 대표가 비서를 병간호하고 있어?”
혼자 히죽이던 그녀는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우는 천 회장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창가로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부드럽게 웃었다.
“글쎄요. 이상할 거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김 비서님 식중독으로 입원했을 때 회장님도 계속 병실을 지키셨다고 들었습니다. 인간미 넘치는 천지아 회장이라고 기사도 내셨죠?”
“얼씨구? 너 임마!”
툭.
꾸깃한 종이 쪼가리 하나가 떨어진 건 천 회장이 삿대질하기 위해 주머니에서 손을 급히 빼냈을 때였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놀란 천 회장의 주름이 한껏 깊어진 사이, 시우가 느긋하게 허리를 굽혀 구겨진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그저 쓰레기라고 생각했던 종이에는 자신과 도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게 뭘까요. 회장님.”
그녀는 무안한지 평소보다 큰 소리로 웃으며 그냥 한 번 써본 것뿐이라 둘러댔다.
깜빡임 한번 없이 축복과 안녕의 글귀를 읽어 내려간 시우는 턱 끝을 들어 하얀 백발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천지아 회장이 좋은 분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좋을 것 같았다.
이렇게 훌륭한 분이 앞길을 축복해 준다면.
시우가 횡설수설하는 그녀를 향해 나른하고, 평온하게 미소지었다.
“좋은 글귀네요.”
그 대답에 천 회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만 깜짝였다.
**
적당한 햇살이 눈꺼풀을 기분 좋게 덮었다.
“으음.”
눈을 찌푸리며 베개에 얼굴을 비비던 도아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뒤엉켜 있는 머리가 부스스 따라 흔들렸다.
“뭐야? 여기가 어디야?”
하얀빛이 눈동자 위에서 부서지고, 한 뼘 열린 창문으로 상쾌한 찬 공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눈부심에 홀린 사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정돈해주는 손길이 닿았다.
“어디긴, 내 방이지.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중저음의 목소리는 다감했다. 도아는 그제야 자신이 퇴원하고 시우의 집으로 왔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괜찮습니다.’
시우는 병실에서 단정하게 거절하는 도아를 가볍게 무시했다. 손을 움켜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렇게 대표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하하. 깜빡했어요. 뭐 보고 있었어요?”
"별거 아니야.”
시우가 곧장 노트북을 덮었지만, 시선이 아래쪽에 있었던 도아는 자판과 화면 틈에 보이는 영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도 볼래요.”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킨 도아가 시우의 오른편에 들려 있는 노트북을 잡기 위해 버둥거리며 팔을 뻗었다.
“보면 힘들기만 할 거야.”
“괜찮아요.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저도 알 권리가 있어요!”
못 미덥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도아는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결국 시우는 졌다. 보송한 콧방울을 가볍게 툭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기 힘들면 바로 말해.”
“네. 바로 말할게요.”
도아가 반듯한 어깨에 얼굴을 바짝 붙이자 시우는 짧게 멈칫하다 영상을 재생시켰다.
로비에 도착한 아람과 영희의 모습, 이야기 나누는 우진과 주혜.
아무도 없는 로비에 되돌아온 영희가 데스크에 올려둔 보안 카드를 집어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장면.
“그러길래. 잘라버리라니깐.”
“그러게요. 대표님 말 들을 걸 그랬어요.”
이채가 도는 영희의 눈동자가 마치 자신을 보고 있는 듯했다. 이야기로 전해 들었을 때보다 섬뜩했다.
15층에 올라와서는 정원과 복도를 자기 집 안방처럼 편하게 활보했다. 도아는 복도 문을 열어두었던 것에 한 소리를 들을까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정원으로 달려가는 자신이 나오고 영희가 뒤를 쫓았다. 그 후 연기가 자옥해져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도아가 알고 있는 사건의 진상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정원에서 벌어진 일이 담기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것을 보고 시우가 가슴 아파하는 건 싫었다.
“이게 다야.”
“가만히 있어 봐요. 뒤에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잖아요.”
도아가 이만 노트북을 덮으려는 시우의 손을 잡으며 행동을 저지하는 순간, 화면이 바뀌었다.
비상구 문이 열리며 주변 연기가 날아갔고, 영희가 휘두른 유리 조각에 시우가 어깨를 맞고 피를 흘리는 장면이 나왔다.
“대표님. 다쳤어요? 왜, 왜 안 피했어요?”
사색으로 뒤덮인 도아를 향해 시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방화를 일으킨 사람보다, 방화를 일으키고 사람을 공격한 것이.
한 명보다는 두 명을 공격하는 것이.
이왕이면 한 회사의 대표를 노렸다는 것이.
더 괜찮았다.
정원은 카메라가 없지만, 비상계단 앞은 아주 선명하게 잘 녹화되는 곳이니. 증거자료를 남기기에도 좋았다.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
도아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시우의 옷자락을 들춰 내렸다. 봉합되어 있는 상처에 놀랐는지 표정이 조금 전보다 훨씬 심각해졌다.
“이제 다치지 말아요. 약속해요.”
“약속해.”
시우는 화가 단단히 나 보이는 도아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화나는 장면만 있는 건 아니야.”
“네?”
시우가 다시 재생시킨 영상에는 사건 발생 몇 시간 전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통화하면서 정원으로 나가는 비서의 모습. 기다란 손가락이 스페이스 바를 눌러 정지시켰다.
“예쁘지? 비서인데, 대표한테 거짓말하는 중이야.”
“이건. 그게…….”
영상 속 자신은 정말이지 너무나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처음 시우에게 지어 보이던 그런 가면 같은 웃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바보 같아 보이기까지 한 그 표정에 도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머릿속까지 저린 기분이었다.
내가 통화를 할 때 저런 표정을 지었었구나. 부끄러움이 몰려온 도아는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하?”
“이제, 그만 볼래요!”
노트북을 뺏어 다급히 다른 쪽으로 옮겨버렸다.
두 눈 뜨고 순식간에 무기를 빼앗긴 대표는 시선을 이만 창가로 돌렸다. 아침 빛이 환했다.
“더 잘래? 아니면 아침 먹을래?”
노트북을 아예 침대 밑으로 넣어 버린 도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선택지가 영 별로였다. 만약 잘 거라고 하면 편히 쉬라는 이유로, 아침을 먹는다고 하면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시우가 방을 나갈 것이 분명했다.
“다른 보기는 없어요?”
도아가 배시시 웃으며 묻자, 시우는 도아의 뾰족한 턱 끝을 가볍게 잡아 들었다.
"날 가지고 놀아도 좋고.”
유혹하듯 입술이 부드럽게 포개졌다.
“그게 제일 마음에 들어요.”
“아직 힘들 텐데, 할 수 있겠어?”
“무슨 생각하시는 거세요? 저는 대표님이랑 이야기하면서 놀 거였는데요?”
“또. 또. 애를 태우지.”
미간을 좁힌 시우가 고개를 기울여 잠시 장난기 실린 얼굴을 감상했다.
"무리하지 마. 며칠 안 지났잖아.”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서 괜찮아요. 그리고…….”
도아는 짧게 뜸을 들이다 뒷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저도 애타요.”
아직은 안된다고 말하려던 시우는 부드러운 한숨을 내쉬며 허무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사라지기도 전에 입맞춤이 깊숙이 들어왔다. 그동안 멈추지 못할까 스치듯 부딪쳤던 입술은 그 한마디에 고삐가 풀렸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에 도아의 발끝이 곱아 들었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자신의 품 안에 파고들어 오는 뜨거움이 좋았다.
너무 밝아, 도아가 몽롱해져 가는 정신을 비집으며 말했다.
잘 보여서 좋은데, 시우가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그 한마디에 도아의 두 뺨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만 봐.”
가느다란 손가락이 검은 눈동자를 가렸지만 시우가 곧 가볍게 저지하며 웃었다.
“예쁘잖아.”
아침 햇빛이 내려앉은 그 얼굴을 본 순간, 도아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미소짓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예뻤고, 자신 역시 그것이 잘 보여서 너무나 좋았기에.
도아는 포기하며 입을 맞췄다.
“이제 칭찬 말고, 사랑이나 줘요.”
“원하신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