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그럼에도
(79/85)
제79화. 그럼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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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그럼에도
2022.08.01.
15층에 도착한 시우가 정원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파란 하늘로 뻗어 있던 나무줄기는 흔적도 남지 않고 정리되었다. 그러나 나무가 타버린 냄새는 여전히 아스라하게 배어 있었다.
마음 한 켠 내주었던 존재와의 이별. 연기가 구불구불 타오르던 그 장면이 또렷했다.
그럼에도 괜찮았다. 우습게도 우선순위가 바뀌어 버린 지는 오래되었으니.
“와. 몇 주가 지났는데 아직도 냄새가 안 사라지네. 이거.”
대표의 지시사항을 처리하고 올라온 비서가 혼잣말을 내뱉으며 승강기에서 내렸다.
“뭐야? 왜 아직 안 들어가고 있어?”
월튼은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로비에 시우가 있자 흠칫하며 물었다.
“오늘 들어온다고 했던가?”
“오늘? 아! 나무? 맞아. 이따 오후부터 조경작업 시작하고, 며칠 걸릴 거야. 그 뭐였더라? 그거는 수형이 좋은 게 없어서 구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카멜리아, 뭐였는데? 여름에 흰 꽃이 피는…….”
“노각나무.”
“아 맞다. 그거.”
여름 햇빛 아래에서 하얗고 동그란 꽃을 보며 웃던 도아의 얼굴이 알싸하게 스쳤다.
“그건 내가 주말에 직접 가서 고르도록 할게.”
작은 벚나무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일정이 빠듯할 텐데?”
“상관없어.”
간결하게 대답을 마친 시우는 이제 몸을 틀어 복도를 향했다. 보안카메라에 빨간불이 들어와 있었다. 비서가 저를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긴장감이 가득 실린 신입 비서의 인사에 대표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한동안 뒤숭숭하던 회사 분위기도 이제는 제법 안정을 찾아갔다.
“오늘부터 이도아 사원 출근이야.”
완벽한 비서의 모습으로 시우의 뒤를 따르던 월튼이 보고했다.
“알고 있어.”
낮고 묵직한 목소리와 단정한 걸음 소리가 복도를 채웠다.
**
이도아 사원이 몇 주 만에 출근했을 때는 방화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가 회사를 휩쓸고 간 후였다.
일단, 오자마자 진아가 보여준 벽돌 같은 글부터 봐야 했다.
[금요일 밤. 보안 직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방화범이 15층으로 올라가 정원에 불을 지름. 화재를 발견한 직원이 불을 끄려다 다쳤고, 도망가던 방화범과 마주친 대표가 공격받음.]
사원 이야기 때보다는 마음에 들었다. 적당히 간결하면서도 핵심은 전해진 듯 보였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마지막 문장이었다.
[보안 직원이 자리를 비운 이유는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여자친구는 홍보팀으로 추정.]
“이거 김우진이랑 민주혜 맞지? 민주혜는 진짜 도아 씨 끝까지 괴롭힌다. 그치?”
“그런 일 있고도 너무 뻔뻔하게 다녀서 진짜 멘탈 장난 아니라고 생각했어. 언제 남자친구까지 만들었데?”
“보안팀도 직원도 밤에 자리 비우고 그러면 안 되지, 정말.”
어느새 주변으로 몰려온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나무 의자에서 시작한 회사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낸다는 이유로, 에이치 그룹 사옥 곳곳은 나무와 식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직원들은 그 공간을 좋아했다. 그렇기에 15층 정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화내지 않을 이는 없었다.
방화범에게 화를 내던 사람들은 조금 더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나섰고, 주혜와 우진은 그렇게 공공의 적이 되었다.
“정원 정말 예뻤는데, 너무 속상해.”
“대표님도 신년사에서 직접 언급했잖아.”
한시우 대표의 신년사는 작년보다 조금 늦게 진행되었다. 전년도 실적, 올해의 사업 방향 등뿐만 아니라 화재 사건 또한 언급했다.
소문이 이상한 방향으로 부풀려지지 않고 고만고만하게 맴돌고 있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방화범은 어땠어? 무서웠지? 보안 직원이 사과는 했어?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은 회의에 참석할 준비를 안 할 거냐는 팀장의 잔소리로 일단락되었다.
“내가 자기만 보면 너무 미안해. 그날 괜히 일 도와달라고 해서 그런 거 아닌가 싶어서.”
“에이.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없었어도 어차피 그 사람은 올라왔을 텐데요?”
“그래도 적어도 도아 씨는 안 다쳤겠지. 내가 정말 속상해서…….”
“괜찮아요. 정말로요.”
“알았어. 대신 내가 다음에 맛있는 저녁 사게 해 줘. 그나저나 도아 씨, 이 정도면 삼재 아니야?”
진아 대리는 오랜만에 만난 도아가 너무나 반가웠다. 덕분에 15층 회의실로 올라가는 와중에도 수다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삼재요?”
“응. 봐봐? 올해 비서실 차출됐지? A사원 이라고 헛소문 돌았지. 그리고 다치기까지 했잖아.”
“하하. 그런가요?”
도아의 머릿속에 일 년 동안 벌어졌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얼마간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던 도아는 마지막엔 행복한 듯 웃었다.
“그래도, 좋은 일이 훨씬 많았는걸요.”
“정말?”
진아가 거짓인지 아닌지를 캐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초리를 가늘게 만들었다.
도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이도아 씨.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인턴 옆에 앉아 있던 도아는 당황하며 두 눈을 깜빡였다.
회의실 상석에 앉아 있는 대표는 언제나처럼 반듯하고 단정한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자신이 건낸 질문의 대답을 기다리며 짧게 웃어주기까지 했다.
“도아 씨?”
회의실을 메워버린 정적에 초조해진 옆자리 직원이 목소리를 낮춰 도아를 불렀다.
“아……. 네. 이제 괜찮습니다.”
그 목소리를 들은 도아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자신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분명 어젯밤에도…….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
감사 인사가 끝날 즘, 그저 대표님이 직원에게 건네는 안부의 말 정도란 것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전날 밤 일이 떠오른 도아의 두 뺨은 옅은 장미빛으로 물들었다.
“다행이군요. 회의 시작할까요?”
시우는 여유롭고 담담하게 턱 끝을 까닥였다. 시선은 도아의 갈색 눈동자에서 발표자에게로 향했다.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던 도아는 그를 흘겨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네. 시작하겠습니다. 올해 전략팀 사업에 대해 발표하겠습니다. 일단 지시사항과 관련된…….”
발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어둠 속에서 발표를 지켜보던 도아는 간간히 시우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회사에 들어가기 전, 어쩐지 첫 출근을 하는 것처럼 낯설고 긴장되었다. 신호 하나를 그냥 보내버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우가 있으니.
‘우리 딸, 혼자서도 이렇게 잘하다니 정말 대견하구나!’
언제나 갈증이 났었다. 채우려고 노력해도 시들어 있는 기분이었다. 15층 정원에서 보았던, 잎이 주굴주굴하고, 힘없던 그 나무처럼.
그저 칭찬받는 것이 좋아서 묵묵히 열심히 하던 자신에게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진 일 년이었다.
손에 들린 핸드백을 보다 힘껏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제 마음이 채워졌으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그렇게 마음먹으며 보다 단단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결심을 떠올릴 때 즈음, 시선 끝에 익숙한 글자가 들어왔다.
‘르베이 호텔 친환경 비건 객실 사업’
화면을 확인한 도아가 흠칫하며 숨을 멈췄다. 흐트러졌던 집중력이 한순간에 돌아왔다.
“르베이 호텔 그룹에서 이번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준 것에 대한 연장선으로 제안한 사업이며…….”
비거니즘 라이프 스타일의 확대, 자연 친화적인 호텔에 어울리는 비건 가죽, 에이치 코리아의 시그니처 가죽 소파 등.
발표자의 설명에 귀를 기울일수록, 자신이 천지아 회장에게 건냈던 말의 연장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녀가 관심을 보였던 것이 그저 사업가로서 몸에 밴 에티튜드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혹여 또 저런 식으로 내뱉은 말이 있나 싶어 천 회장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빠르게 되짚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갈 때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이상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다음에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네.’
하루빨리 건강해져서 환자복이 아닌 예쁜 옷을 입고 다니라는 말 정도로 이해했는데,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다음 파티 때 초대를 한다는 뜻인가? 더 이브 매장에 새로운 옷이 나왔나?
무슨 죄라도 진 것처럼 조급하게 추리해 보았지만, 결국 회의가 끝날 때까지 명쾌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다음에 시우에게 물어보기로 결론 내린 도아가 짐을 정리하기 위해 일어선 순간, 핸드폰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우진이었다.
**
도아가 고개를 들어 올려 지나가는 새털구름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라 퇴근 시간임에도 하늘이 환했다.
[이 비서님. 저 우진이요. 오늘부터 출근하신다고 들었는데, 끝나고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카페에 들어가기 전, 도아는 메시지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시우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우진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그 카페, 그 자리에 우진이 앉아 있었다.
“이 비서님!”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옆에 주혜가 앉아 있는 정도. 도아는 턱 끝을 들어 올려 두 사람을 확인하고는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야.”
맞은편에 자리 잡은 도아는 적당히 미소 지었다. 어떤 표정으로 둘을 마주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셋이 함께 웃고 떠들던 시간들이 있어서 그런지 편안했다.
“이 비서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우진이 미리 시켜놓았던 따뜻한 커피를 도아 쪽으로 밀었다. 향기가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네.”
도아는 짧은 대답을 끝으로 장미빛 입술을 꾹 다물고 두 사람이 어떤 말을 꺼낼지 기다렸다.
하지만 우진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어색한 한숨만 내뱉을 뿐이었다.
‘이도아 언니는 좋은 말 몇 마디 해주면 마음이 풀리니 걱정할 필요 없어.’
어쩌면 화가 나 있을 이 비서를 걱정하는 우진에게 주혜가 해주었던 말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도아는 그랬으니깐.
그렇게 정적 속에서 십여 분이 흘렀다. 두 사람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잔을 비운 도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일어날게요.”
그 말에 놀란 우진은 그제야 미간을 좁히며 급히 사과했다. 주혜는 여전히 앙증맞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아뇨. 할 말 많아요! 일단……. 죄송해요, 이 비서님.”
사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도아가 싫다고 했음에도 제 감정을 몰아붙였던 것. 그러고선 갑작스럽게 주혜와 사귀어 버린 것. 그날 자리를 비워 다치게 한 것.
우진이 그을음 같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일단 확실한 것부터 정리해야겠다 싶었다.
“진짜 죄송해요. 제가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범인이 올라갔어요. 보안카드 관리도 제대로 못 했고요. 그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어요. 그러면 안 됐는데…….”
스스로가 생각해도 한심하다는 듯 말끝을 흐리던 우진은 이내 끝맺음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주혜가 언니, 작은 소리로 도아를 불렀다.
도아와 시선이 부딪히자 주혜의 눈동자가 요동치듯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