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각자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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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각자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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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각자의 사정
2022.08.05.
도아의 눈빛이 예전과 달랐다. 모르는 사람을 보듯 차분하고 편안해 보이는 것이 어쩐지 더 무섭게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을까, 막연하게 기대를 품었던 주혜는 그것이 한심한 바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르르르르-!’
그날 건물 전체에 울려 퍼지던 화재경보음이 다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우진과 라운지에서 엉겨 붙어 장난을 치던 행복한 순간은 그 요란한 소리가 울리면서 끝났다.
이어 전화가 왔고, 그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진 채 시퍼렇게 질려버렸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우진이 놀라 달려간 후에도 주혜는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손을 교차시켜 팔을 감싼 후 덜덜 떨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불안한 호흡을 내뱉으며 겨우겨우 계단을 내려왔을 때, 아수라장이 된 로비가 눈앞에 펼쳐졌다.
소방대원들은 요란하게 뛰어다녔고, 경찰과 구조대원까지 대기 중이었다. 무전 소리와 사이렌 소리가 골을 흔들었다.
현장 진행요원에게 끌려 건물 밖으로 나간 후에는 그저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건물 옥상에서 불길과 연기가 치솟고 있었고, 구조대 차량이 뒤섞여 있었다.
손에서 피가 날 정도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제발 더 이상 일이 커지지 않기만을 바라고 바랐다.
하지만 곧 구급차가 초록 불을 요란하게 회전시키며 떠나갔다.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주혜는 다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정말 큰일이 난 것 같고, 그 책임이 자신과 우진에게로 쏠리는 것 같아 두려웠다.
그날의 기억이 솟구쳐오른 주혜의 속눈썹이 파르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언니. 우진 씨는 잘못 없어요. 내가 같이 놀자고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예요!”
연갈색 눈동자는 어느새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저를 향해 있는 차분한 얼굴이 꼭 ‘그래서?’라고만 말하는 것만 같아 고개를 돌려버렸다.
주혜가 훌쩍이며 눈꺼풀을 질끈 감자, 두 볼을 타고 굵은 눈물이 흘렀다.
“언니. 내가 미안해요. 다 잘못했어. 소문낸 것도, 언니가 다친 것도 사과하고 싶었어요…….”
도아는 화를 내지도, 위로하지도 않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랑은 다른 언니가 질투 났어요. 원래 모두 나를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언니한테 그것들을 뺏기는 기분이 들었으니까요. 언니가 하는 행동들이 다 거슬렸지만 그래도 언니랑 있으면 즐거웠던 건 사실이야. 그랬는데, 우진 씨가 언니를 좋아한다고 하니깐 너무 참기가 힘들었어요.”
사실 주혜 스스로도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언니의 호의도 한번 꼬아서 생각하고,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어. 소문을 퍼트린 것도, 그래서 그랬어. 그냥 언니가 마음고생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두 눈 마주치며 깔끔하게 사과하고 나서 마음을 털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도아의 얼굴을 보니 감정이 복받쳐 오르고, 그것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말하면 말할수록 자신의 잘못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그리고 이번에 방화범이 올라가게 된 것도 결국엔 우리 때문이니깐 그것도 정말 미안해요. 용서해 줘. 도아 언니. 미안해.”
**
저렇게 우는데, 좋은 게 좋은 거니 괜찮다고 말할까?
도아는 혀끝을 굴리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주혜는 한참을 울다가 앞에 놓인 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되감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몇 번이고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작고 가녀린 어깨를 토닥이던 우진 역시 다시 한번 사과했다. 도아의 부탁을 무시했던 무례한 행동과 근무 중 자리를 비웠던 것.
분위기가 심각하다고 느꼈는지, 이 비서님이 예뻐서 그랬다는 어이없는 농담까지 곁들였다.
이미 카페에 있는 몇몇 사람들은 셋을 삼각관계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친구의 친구와 바람이 났고, 울면서 그 사실을 사과하는 흥미진진한 상황.
그 정도로 둘의 사과는 요란했다.
한없이 어리게만 느껴지는 두 사람과 잘 어울렸다.
도아는 눈꺼풀을 느리게 내리며 등을 가볍게 기대었다.
사실, 시우의 위로 덕분에 이미 마음은 진정이 된 상태였다.
‘마음에도 없는 웃음 지을 필요 없어.’
시우의 핀잔이 가볍게 떠오른 것은, 나는 괜찮으니 울지 말라고 입술을 막 달싹이려는 순간이었다.
사과를 받아주고 싶은 걸까. 다시 한번 고민해보았다.
화재 사건은 어디까지나 실수와 우연이 겹쳐버린, 그저 운이 나빴던 사건일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노력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그 루머에 관한 사과는…….
받아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분명 남아 있었다.
주혜는 진작 시간이 있었음에도 그저 피하기 바빴다.
정말 나한테 미안하긴 했을까? 만약에,
“만약에, 네가 우진 씨랑 사귀지 않았다면?”
“응?”
도아의 질문에 눈물범벅이 된 주혜가 딸꾹질하듯 되물었다.
“그랬어도 나한테 이렇게 미안했을 거야?”
되묻는 도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예상 밖의 질문에 당황한 것은 우진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장담할 수 없어요. 언니가 미웠던 건 사실이니깐…….”
주혜는 턱 끝을 내린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너무 솔직하게 말해버렸나?
불안함에 다홍빛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이미 도도하고 뻔뻔하게 사과하려던 계획은 틀어져 버렸고, 홀린 듯이 마음을 털어 놀고 나니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도아에게 정말 미안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오늘이 아니면 또 사실대로 말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마침 카페 음악이 조용한 곡으로 넘어가며 분위기가 차분해졌다.
그저 잠잠하게 주혜를 응시하던 도아는 짧은 결론을 내리며 픽, 웃음을 흘렸다.
“솔직하네.”
저렇게 솔직한 마음으로 하는 사과였으니, 적어도 이제 뒤에서 몰래 흉보는 일은 하지 않겠다 싶었다.
다시 허리를 고쳐 세운 도아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맞은편으로 내밀었다.
“나도 솔직하게 말할게. 화재 사건은 정말로 괜찮아.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둘 다 회사도 나가게 됐잖아.”
김우진과 민주혜가 수차례 면담 끝에 사직 처리된 것은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회사의 일부가 불타고, 대표가 다쳤으니 아무도 그 처사가 과하다 토를 달지 않았다.
“하지만 헛소문을 퍼트린 건 전부 용서가 안 돼. 정말 미안했으면 바로 사과했을 텐데, 눈치를 보다가 결국 일이 이렇게 되니깐 말하는 게 조금 우습기도 하고.”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주혜가 참기 힘들었던 것이 우진 씨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면서부터라고 했다.
만약에 시우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면, 자신 역시 무척이나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당장은 아니더라도 천천히 이해하기로 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이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나도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것 같아. 당장은 예전처럼 지내기 어렵겠지만 나중에는 또 모르지. 웃으면서 인사할 수 있을지.”
이제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만난다면 그때는 정말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살아. 주혜 너도. 우진 씨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제일 편할 것 같았다. 주혜와 우진이 아닌 나를 위해서.
**
우진과 주혜는 회사에서 나가게 되었고, 봄이 찾아왔다.
그 즈음, 배영희의 징역 소식이 전해졌다.
합의는 없다. 에이치 코리아 대표의 확고한 뜻이 아주 잘 전해진 듯한 판결이었다.
그러나 시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연두빛 정원을 향했던 시선이 천천히 아람에게로 향했다.
“정원이 다 타버렸다고 들었는데, 많이 복구했네? 나무들이 좀 줄은 것 같아.”
오랜만에 보는 아람은 여전히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표정은 여유로웠고, 목소리 또한 당찼다.
“예전만큼 볼 시간이 없어서.”
시우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간단한 안부 인사를 마치고, 배영희와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갔다.
둘의 시선은 다시 유리 벽 너머 새싹 돋은 나무를 향했다.
“정원이 이렇게 된 건 유감이지만, 난 내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사고를 일으킨 건 그 사람 잘못이지.”
찻잔을 막 들어 올린 시우가 짧게 실소했다.
“정말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란 예상을 못 했어?”
“어. 내가 신도 아니고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어떻게 알겠어?”
아람은 어금니를 끄윽 깨물며 대답했다.
“신이 아니어도 짐작할 수 있는 상황들이 있지.”
꼭 자신을 타이르는 것 같았다. 아람은 대답 대신 시선을 피하며 싱긋 웃었다.
시우의 말이 맞았다. 어쩌면 이런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 자택으로 향하던 와중에 핸들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헤어지기 전, 영희의 표정과 말투 하나하나가 어쩐지 불안하고 불길했다.
그리고 그 짐작은 영락없이 들어맞았다.
에이치 코리아 본사 근처에 왔을 때 저도 모르게 말했다.
‘이게 뭐야? 나 때문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떠나는 엠블런스를 홀린 듯 쫓았다.
걱정, 분노, 좌절. 불안하게 요동치는 눈동자 위로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하지만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는 여자를 바라보는 한시우의 표정을 본 순간 알게 되었다.
모든 감정은 모래시계 뒤집히듯 순식간에 변할 수 있단 것을.
더 이상 죄책감이 몰려오지도, 걱정이 되지도 않았다.
아람은 그날의 감정을 단단하게 뭉쳐 가슴 깊은 곳으로 던져버렸다.
“그럼 왜 회사로 왔지?”
“뭐?”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는데, 왜 돌아왔어?”
그랬는데, 한시우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에이치 코리아 대표는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회사 주변 CCTV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살펴보았고, 아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건, 지나가던 길이었을 뿐이야.”
짧게 머뭇거리던 아람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그동안 영희에 관한 진술을 하느라 지쳐 있었고, 그날 이후로 쉽게 잠에 들지도 못했다.
판단력이 흐려졌던 스스로가 혐오스러우면서도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면 모든 것이 정말 본인이 초래한 일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러니깐 앞으로도 본인의 잘못이 아니어야 했다.
이곳에 있어봤자 자신만 불리해질 거라고 판단한 아람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갈래.”
“그래. 나도 곧 미팅이 잡혀 있던 참이었어.”
차라리 화라도 냈으면 좋겠는데. 한시우는 늘 저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게 참 자존심이 상했다.
멀어져야만 했다. 안 그러면 계속 이런 상태로 살아갈 것이 뻔했다.
“나 미국으로 돌아가. 이제 안 들어 와.”
그래, 시우가 나직이 대답했다. 노곤한 봄볕이 차가운 얼굴위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