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1화. 다시 봄날 (81/85)


제81화. 다시 봄날
2022.08.08.


차창으로 떨어지는 햇빛이 지나치게 따사로웠다.

주차장을 나온 아람이 선글라스를 쓰기 위해 얼굴을 기울이자 귀걸이가 반짝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무심히 보던 그녀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고개를 더 빳빳하게 치켜들었다.


“나는 잘못한 게 없어.”

작게 읊조리는 혼잣말이 끝났을 때, 신호등을 건나가는 도아를 발견했다. 벌컥 불쾌감이 치솟았다.

양손 가득 가죽 샘플을 들고 지나가는 그녀의 얼굴이 지쳐 있는 저와 다르게 너무나 화사해 보였다.

함께 걸어오는 사람과 뭐가 재미있는지 까르르거리며 웃음 지었다.

처음부터 느꼈지만, 저 비서의 걸음은 한시우와 닮아 있다.

단정하고, 깔끔해 더 거슬렸다.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옷깃과 머리칼을 스쳤다. 친구를 향했던 눈길이 그 반짝임을 따라 자연스럽게 아람 쪽으로 향했다.

도아가 자신을 알아본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도아는 헐거워진 미소를 그대로 담은 채, 차 안에 있는 아람을 향해 살포시 고개를 내리며 인사했다.

처음 보았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맑고 눈부신 미소였다.


‘저 비서는 무엇을 거슬리게 해서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을까. 불쌍해라.’

‘이 비서님. 시우가 다음에도 힘들어하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줘요. 시우를 잘 아는 건 나니깐. 우린 안 지 10년도 넘은 사이거든.’

자신이 그녀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었던 순간들이 하나하나 떠오르자, 단단하게 던져버렸던 감정 뭉치가 조금씩 허물어졌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허둥지둥 시선을 돌렸다.

빵! 경적 소리가 크게 울리고서야 아람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자칫 감정에 휩쓸릴 뻔했던 그녀는 긴 한숨을 흘리며 시트에 등을 바짝 밀착시켰다.


“이제 와 달라질 건 없어.”

한시우를 놓쳤고, 그 과정에서 안 좋은 일이 벌어졌지만 결코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래야만 했다.

차는 속력을 높여 빠르게 달리다 곧 다른 차들 사이에 섞여버렸다.


 

**

갈색 눈동자에 봄기운이 완연한 옥상 정원이 들어왔다. 화재 사건의 흔적은 말끔히 사라진 후였다.

따뜻한 햇빛이 내려앉은 풍경이, 시우와 처음 마주쳤던 날과 비슷했다.

이제는 지나간 그날의 고요한 눈빛, 바람, 향기가 떠올랐다.


“뭐해요? 안 들어오고?”

띠릭. 생각이 멈춘 건 복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면서였다.


“월튼 비서님!”

정원을 빤히 바라보던 도아는 고개를 돌려 빙그레 웃었다. 손에는 전략팀에서 준비한 보고자료가 들려 있었다.


“다른 분들은요?”

“김 기사는 자동차 점검 갔고, 한 비서는 반차예요.”

“그렇구나. 아, 혹시 권아람 님 오셨었어요?”

복도로 들어온 도아가 발걸음을 멈추며 묻자, 월튼은 부드럽게 시선을 내렸다.


“어떻게 알아요?”

“아까 샘플 받으러 다녀오는 길에 뵌 것 같아서요.”

“맞아요. 인사하러 왔었어요. 아람은 이제 미국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배영희 씨 사건이 본인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느끼는 바가 있으니 견디기 힘들었을 거예요.”

도아는 얼핏 시야속에 들어왔던 아람을 떠올렸다. 선글라스와 화려한 액세서리들로 숨기고, 슴긴 그 진짜 표정을.


“도아 씨?”

월튼이 눈살을 가늘게 만들어 멍하게 서 있는 도아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서야 멈췄던 대화가 이어졌다.


“아. 잠시 생각 좀 하느라. 대표님은 바쁘세요?”

“지금 회의실에서 미팅 중이요. 왔다고 말해줄까요?”

비서가 생긋 웃으며 건넨 제안에 도아의 커다란 눈이 더 커지고 말았다.


“아뇨! 바쁠 테니 내려가야죠.”

“얼마 안 걸리니 만나고 가요. 도아 씨 그냥 내려갔다고 하면 혼나는 건 나일 텐데.”

월튼은 손에 든 파일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너스레 떠는 연기에 도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저 그럼, 정원에서 기다려도 될까요?”

“당연하죠. 정원이 정말 감쪽같죠?”

둘의 시선이 동시에 싱그러운 초록 정원을 향했다.


“네. 처음 보았던 그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져요.”

“그렇죠? 내가 고생 좀 했습니다.”

월튼은 더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대꾸하며 미소를 흘렸다.

그는 알았다. 시우가 정원을 빨리 복구시킨 건 오로지 도아를 위한 일이었음을. 처참했던 현장이 상처가 되지 않도록.

복도가 새하얀 오후 빛으로 물들었다.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두 사람의 구두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

시우가 유리문을 밀자 따뜻한 봄 햇살이 어깨로 떨어졌다. 봄바람이 정원을 누비며 살결을 간지럽혔다.

바로 앞에 있지 않고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것에 애가 탄다.

생각해 보니 우스웠다. 회사 일로 하루 종일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는데, 같은 층에 있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마음이 들뜨고. 또 바로 눈에 안 보인다고 인상을 쓰는 자신이.

한 걸음. 한 걸음.

마침내 도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풀어 내린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물결처럼 떨어지고, 눈동자는 유리구슬처럼 반짝였다.

바람을 타고, 봄향기가 실려 오는 것 같았다.

대표가 바라보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연둣빛 잎사귀를 골똘히 관찰하는 모습이 매우 탐험가 스러웠다.

잠시 그 모습을 감상하던 시우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보폭을 넓혔다.


“도아 씨.”

비서 출신 이도아는 대표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호선을 그린 입매와 검은 눈동자를 확인한 도아가 활짝 웃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만찬 같은 그 표정을 시우는 마음껏 취했다.


“왜 나와 있어. 안에서 기다리지.”

“날씨가 좋아서요. 손님은 가셨어요?”

“응. 조금 전에. 흙 만졌어?”

가느다란 손가락을 잡으려던 시우가 그 끝에 묻은 서걱한 감촉을 느끼고 물었다.


“아. 네! 이리 와보세요.”

급히 손을 털어낸 도아가 무언가 생각난 듯, 그대로 시우를 끌고 조금 더 안쪽으로 데려왔다.


“대표님, 여기 물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아. 맞아.”

그녀가 가리킨 곳에 노각나무가 어린잎을 피운 채 나풀나풀 춤추고 있었다.

오늘쯤 물을 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시우는 별다른 고민 없이 정원 안쪽에 있던 호스릴을 풀어 도아에게 건넸다.

예상치 못한 권유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도아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시우가 물주는 방법을 알려주자 주저 없이 식물들을 향해 물줄기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비서 이도아가 대표의 모습을 신경 안 쓰는 척, 열심히 훔쳐봐 왔기에 가능한 능숙함이었다.


“잘하네. 많이 훔쳐봤나 봐.”

“훔쳐보기는요. 전 원래 일을 잘합니다.”

농담 섞인 칭찬을 도아가 가볍게 되받아쳤다.

그사이, 주변이 상쾌해졌다. 일렁이는 물방울 사이로 빛줄기가 반짝거리며 싱그러움을 더했다. 콧잔등 위에 풀잎 향기가 퍼졌다.


“이번 주말에 리라 디자이너님이랑 저희 가게 가기로 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물을 주던 도아가 자연스럽게 꺼낸 말에 시우가 눈쌀을 찌푸렸다.

자신이 협업하고 싶었던 디자이너가 남자여서 다행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순간이었다.


“왜 나한테는 가자고 안 해?”

“네?”

“나도 인사드리고 싶은데.”

갑작스럽게 물어오는 질문에 하얗던 귀가 붉게 변했다.


“아, 그게…….”

마른침을 꼴깍 삼킨 도아는 손부채질을 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대표님은 바쁘시고, 또……. 가면 저희 부모님 난리 날걸요. 어디서 이런 남자를 구해왔냐면서 서두르실지 몰라요. 물론 저는 좋지만.”

“좋다고? 뭐가 좋다는 건데?”

흔들리던 눈빛은 허공을 배회하다 잠잠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저와는 다르게 새벽 호수같이 평온해 보였다. 아니, 구렁텅이처럼 깊어보였다.

아차 싶었다. 혼자 앞서 나간 것에 창피함이 몰려온 도아는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혼하면 좋다는 뜻이긴 했는데, 그게 그러니깐 결혼하자는 그런 게 아니고요. 아뇨, 결혼을 안 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데…….”

아, 미치겠네. 나 또 뭐라는 거야.

도아는 저 인간에게 또 말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빠져나올 길은 없었다.

잠시 입술을 앙다문 사이, 쏴아 물줄기 퍼지는 소리가 더 크게 퍼져나갔다.

느긋이 한숨을 내쉰 시우가 싱긋 웃었다.


“결혼하고 싶어?”

그의 입에서 평생 나올 것 같지 않은 단어에 도아는 잠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느른한 미소가 오늘따라 비현실적이었다.


“가을에 한가해?”

봄. 여름. 가을. 너무나 가깝게 느껴지는 계절이었다. 호스를 말아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왜요? 그때 결혼하자고요? 너무 빠르지 않아요? 저는 조금 천천히 하고 싶은데!”

도아가 흠칫하며 소리치자, 시우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아니. 미국 가자고. 한가할 때 같이 가기로 했잖아. 그런데 우리 전 비서님은 이미 훨씬 멀리 나갔네.”

상대방의 여유로운 대답에 도아의 얼굴은 아까보다 한층 붉어졌다.

제 바람과 욕망을 너무 쉽게 드러내 버린 것에 대한 창피함이 무자비하게 몰아닥쳤다.

차라리 무감한 표정이면 좋을 그의 표정이 즐거워 보여 더 속이 타들어 갔다.

이 사람의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벌거숭이로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말아요.”

그러다 문득 저 눈동자부터 막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도아는 황급히 그의 눈을 가리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엉겁결에 따라 올라온 호스 헤드는 순식간에 시우를 향해 물줄기를 쏟아냈다.

조각 같은 얼굴과 셔츠가 젖어버린 건 찰나였다. 도아가 깜짝 놀라 재빠르게 손을 내렸지만, 이미 한발 늦은 타이밍이었다.

시우가 하, 실소를 내뱉으며 머리를 쓸어넘기는 동안 도아는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쿨럭.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았다.


“복수한 건가?”

“수건. 수건 가져올게요.”

“괜찮아.”

몸을 돌려 떠나려는 도아를 시우가 급히 잡았다. 그 힘에 당겨진 가녀린 몸이 순식간에 커다란 품으로 들어왔다.


“감기 걸려요.”

재단된 듯 단정한 얼굴선을 따라 내려온 물방울이 목선을 타고 셔츠 사이로 들어갔다.

그것이 뭐라고 도아의 마음이 또 먹혀들어 갔다.


“방금 그거 청혼한 거 맞지?”

“그런 거 아니에요. 대표님, 청혼 뭔지 몰라요? 해본 적 없죠?”

도아의 목소리는 이번엔 절대로 휘둘리지 않겠다 다짐한 듯, 조금 전 보다 훨씬 단호했다.

하지만 속눈썹 사이의 물기를 닦아 내는 손길은 유순했다.


“해봤으면 도아 씨한테 안 좋은 거 아니야?”

그 손길에 선선히 얼굴을 맡겼던 남자는 내렸던 눈꺼풀을 여유롭게 들어 올렸다.

가을에 미국에서 청혼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따뜻한 오후,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그것도 품 안에 있다는 사실은 만족스러웠다.

물 좀 맞은 게 뭐 대수라고.


“청혼은 더 마음을 담아서 해야죠.”

더없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도아가 시우의 옆얼굴을 힘주어 잡아 끌고 와 입술을 맞추었다.

반질반질한 나무껍질 같은 갈색 눈동자.

떨리는지 배꽃처럼 하얗게 물든 얼굴.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천천히 새어 나오는 따사로운 숨결.


“이렇게.”

갑작스런 입맞춤과 함께 지어 보인 여릿한 미소에 시우의 가슴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봄날, 도아를 마주했던 그날처럼.

너는 정말이지.

언제나처럼 제 머리 위에서 놀고 있는 도아를 향해 시우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다시 해.”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듯 명령했다.


“네?”

“잘 모르겠으니깐, 다시 해달라고.”

말간 얼굴로 애를 태우는 도아를 향해, 시우가 입매를 늘렸다. 눈을 가늘게 만들었던 도아는 결국, 봄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한 번만이야.”

다시 봄날, 허리 굽은 나무 위에 새싹이 올랐다.

보드란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며 지나갔다.

새로 돋아난 어린 잎들이 초록 물결을 만들고, 그 안에서 두 사람의 미소가 번졌다.

아주 오랫동안. 잔잔하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