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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에필로그.1 (82/85)


제82화. 에필로그.1
2022.08.12.


새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천천히 흘러갔다.
 
아치형 창문으로 쏟아지는 오후 햇빛이 도아의 뺨에 닿았다.

피부는 언제나처럼 반짝였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 머리는 조금 자랐다.


“여기 정말 마음에 들어요.”

도아는 계속 보아도 질리지 않는 풍경을 다시 한번 감상하며 말했다.

붉게 물든 나무가 멀리 보이는 설산과 어우러져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그 아래 자리 잡은 에메랄드빛 호수도 한몫했다.


“다행이네.”

생각에 잠긴 듯 보였던 시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다 좋았어요. 대표님이랑 이렇게 여행 오는 게 처음이니깐. 그리고 못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왜?”

“너무 바빠 보이기도 했고, 가을에 미국 가자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왜 있잖아요? 다음에 밥 한번 먹자. 이런 거.”

시우가 들고 있던 잔을 느릿하게 내려놓자, 월계수 잎이 그려진 커피잔이 소서에 닿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그것도 괜찮네.”

“무엇이요?”

“그렇게 헐겁게 약속을 잡았으니, 몇번이고 떠올렸을 거 아니야. 그 약속이 진짜인지 아닌지.”

“아니거든요. 자주 떠올리지는 않았어요.”

“정말?”

“정말!”

도아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어색한지 시우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도아야.”

애써 어색함을 지우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네. 대표님.”

“왜 쉽게 들킬 거짓말을 하고 그래?”

“제가요? 아닌데요. 대표님이야말로 저한테 숨기는 일 있는 거 같은데요?”

“내가?”

“네. 여행 내내 생각이 많아 보여요. 업무 때문에 신경 쓰이는 점 있으면 예정보다 일찍 한국으로 돌아가도 돼요.”

단호하게 대답하는 모습에 시우가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업무 때문에 신경 쓰이는 건 없어. 일찍 돌아갈 마음도 없고.”

“그럼, 다행이고요. 저만 즐거우면 미안해질 뻔했어요.”

“나도 즐거우니 빨리 돌아가자는 말은 하지 마.”

그 말에 안심한 듯 도아는 조금 전보다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무리한 거는 알아요. 월튼 비서님이 저번에 부인이랑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요. 열흘 정도 일정을 비워야 해서 힘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럼, 내가 뭐 때문에 무리해서까지 이곳에 왔을 것 같아?”

“그야 휴가는 누구나 다 기다리는 거니깐?”

“아니야.”

“그럼 좋아하는 여행지여서?”

“그것도 아니고.”

“그럼요?”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직원이 양해를 구하고 창문을 열었다. 호수물과 흙냄새가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실려 왔다.

시우는 바람에 흔들리는 도아의 옷자락을 응시하다 말을 이었다.


“여기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유명호텔이지. 예전에 업무차 방문했다가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공허했어.”

“지금은요?”

“지금은, 좋아. 무리해서 온 보람이 있을 만큼.”

시우가 팔을 뻗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을 당겨 잡았다.


“네가 없던 시절의 나는 웃음도 없고, 여유도 없었어. 그저 기운 소진될 때까지 버티는 그런 시간. 하지만 이번엔 달랐어. 내가 누군가와 올 여행을 계획하고, 네가 웃는 모습을 떠올려. 온전히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받아들일 수 있었고. 넌 나에게 그런 존재야.”

숨기려고 필사적인 도아의 잔잔한 떨림이 전해졌다.


“나는 그런 너를 사랑하고 있어.”

다정하게 미소 짓는 모습과 담담한 고백에 도아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사랑’

시우의 입에서 처음 듣는 단어였다.

그런 단어를 쓰지 않아도, 그의 눈빛과 행동만 보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기에 굳이 말해달라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나 기뻤다.

황홀과 설렘이 깊숙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

그 말을 해주어야 하는데 마음이 요동쳐서인지 입술은 떨어지지 못하고 파르르 떨릴 뿐이었다.

시선 역시 그의 콧잔등에서 입술로, 가슴팍으로 힘없이 내려갔다.


“떨지 마.”

점점 떨어지던 시선을 붙잡은 건 약간의 울림이 느껴지는 시우의 목소리였다.

반듯한 음색에 도아는 홀린 듯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다.

당황한 도아를 한참 바라보던 시우는 눈이 마주치자 한숨을 옅게 내쉬었다.


“지금 긴장 되는 건 나니깐.”

시우가 도아의 손등 위에 포개 잡았던 손을 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비친 도아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는 갔다. 애초에 긴장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부모 없이 자라고, 젊은 나이에 대표직을 맡으며 쉽사리 얻어지는 것은 없었다.

위기의 순간마다 침착하게 일을 처리해 나가곤 했다.

오래 생각하고 준비했던 일. 늘 그래왔던 것처럼 침착하게 처리하면 되는데. 이게 뭐 이리 어려운지.

예상치 못한 스스로에, 긴장된다는 헛소리까지 한 참이었다.

오래 보아도 아름다운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던 시우가 부드럽게 입매를 올렸다.

그리고 준비해 두었던 케이스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결혼하자.”

시우가 커다란 손으로 케이스를 열자, 그 안에 담겨있는 다이아링이 오후 빛 아래에서 반짝였다.

 

**

시선은 한동안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반지에 머물렀다.

떨리는 숨을 몇 번 내뱉은 도아가 드디어 시우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도아는 겨우 그 다섯글자를 내뱉은 후,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결혼하자고 했어.”

낮고 묵직한 음색이 또박또박 귀에 박혔다.

역시 잘 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가을에 오자던 여행을 정말 오게 될 줄 몰랐다. 자신이야 휴가 일정을 미리 조절하면 그만이었지만, 시우는 바빠도 너무 바빠 보였다.
 
함께 여행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행복했는데, 프러포즈라니.

생각해보니 청혼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햇빛이 유난히 따사로웠던 봄날에.


“너무 갑작스러운 거 같은데……요.”

“갑자기 아냐. 오래 생각한 거야.”

대답을 들은 도아는 몇 분 전보다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요즘 들어 이따금 마음이 복잡해졌다.

처음엔 그저 한시우가 좋았고, 아무리 싫어하려고 노력해도 결국 모든 것이 그를 향했다.

그런 그와 사귀게 되고 나서 마냥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이 행복이 끝나버리면 어쩌나 무섭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잠시 그 순간들이 떠오른 도아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입술을 뗐다.


“결혼하게 되면 대표님도 저도 많은 게 달라질 거예요.”

“알아.”

프러포즈 받았다고 감동의 눈물을 흘릴 성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적잖이 당황한 표정을 직접 확인하니 마음이 깎여 내려가는 듯했다.

시우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


“삶이라는 건 영원하지도 계획처럼 되지도 않아. 나는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이라면 나는 환영이야.”

수변공원에서 고백하던 날부터 이미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고, 크기를 키울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뭐든지 열심히 하려는 네가, 차갑게 대해도 꿋꿋하게 버티던 네가, 좋아한다고 말하며 두 뺨은 붉히던 네가.

모두 다 좋았다.


“네게도 변화가 오겠지. 내가 최선을 다해 지켜줄게. 아주 크고, 단단하고, 포근한 나무처럼.”

“나는…….”

시우가 호수처럼 반짝이고 있는 반지에 시선을 꽂았다 다시 도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내가 바라는 건 없어. 네 옆에 있고 싶을 뿐이야. 칭찬과 사랑을 넘치도록 주면서.”

눈빛이 부딪힌 도아가 고개를 내리며 시우가 했던 거짓말 같은 말들을 가만히 되새겼다.

그리고 자신이 걱정하던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왜 불안하다고 생각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 시작에는 ‘결혼’이 있었다.

자신도 언제부터인가 시우와의 결혼을 어렴풋이 그리게 되었다.

이 사람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아쉽다. 함께 있고 싶다.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다.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아니면 어쩌지? 결혼을 하게 되면 회사는 계속 다닐 수 있을까? 서로의 형편이 너무 다르지 않나?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꼭 행복이 끝나버릴 것 같아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상념을 끊어내곤 하였다.

도아는 턱 끝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조금 전 피했던 검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 뒤에 감춰진 자신의 마음만은 확실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은 그를 원했다.


“나도……. 그런 변화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요.”

그냥 대답만 하면 되는 건데 뭐가 이렇게 떨리는지. 도아는 시우 앞에서 혼날까 바짝 긴장하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 짧게 미소 지었다.


“아니, 사실 더한 것도 괜찮아요. 당신만 내 옆에 있어 준다면.”

그리고 그 미소는 서서히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런 말 들었다고 눈물 흘릴 성격이 아닌데, 어쩐지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정말 좋아요.”

대답을 들은 시우역시 처음보다 더 부드럽게 웃었다.

도아의 대답을 듣기까지 꽝꽝 얼어붙었던 몸이 그 한마디에 녹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잔잔하게 퍼지는 피아노 선율과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다시 귀에 들어왔다.

**

몇개월 후, 두 사람의 결혼식은 제주도에서 조용히 진행되었다. 거대한 나무가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원예 종묘와 정원이 어우러진 곳이었다.

꽃과 나무 향기가 버진로드를 채웠고, 피아노 삼중주 연주가 새소리와 함께 울려 퍼졌다.

새하얀 실크 웨딩드레스를 입은 도아와 깔끔하게 떨어지는 턱시도를 입은 두 사람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천 회장은 그토록 바라던 축사를 하며 눈물을 훔쳤다.

도아와 시우는 제주도에서 하루 머물고 휴양지로 짧은 신혼여행을 떠났다.

제주도에서 머물렀던 곳은 이국적인 야경을 선사하는 르베이 호텔 스위트룸. 두 사람이 첫 키스를 했던 곳에서 부부가 되어 그때보다 더 긴 밤을 보냈다.

결혼 후, 우려했던 대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렇다고 도아의 삶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여러 사람의 관심이 쏠렸던, 두사람과 관련된 소문들은 몇개월이 지나자 하나로 정리되었다.

대표는 아내를 사랑한다고.

대리 이도아와 대표 한시우가 회사에서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 마주치는 기회가 생기면 직원들은 생전 처음 보는 따뜻한 대표의 표정을 목격할 수 있었다.


“도와 대리님? 오늘도 고생했어.”

막 컴퓨터를 끄며 자리를 정리하는 도아를 향해 진아가 빙그레 웃었다.


“하하. 진아 대리님도요.”

육아휴직을 마치고 돌아온 진아 대리는 처음에는 도아를 어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대표의 아내가 내 옆자리라니. 보통은 사모님이라고 부르던데, 나도 그렇게 불러야 하나?

그러나 이도아 자체가 변한 것이 없었기에 점점 예전처럼 편한 사이가 되었다.

민주혜가 퍼트린 소문을 거들먹거리는 직원들도 있었다.

그건 두 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 적 없는 멍청이들이나 하는 소리라고 진아는 단정 지었다.


“저녁에 뭐 해? 대표님이랑 데이트 할 거야?”

“하하. 아니요. 오늘 늦는다고 하셔서 친구들 만나서 놀기로 했어요. 지방에 있는 친구가 오랜만에 서울 왔거든요.”

“하긴. 워낙 바쁘신 분이지. 하지만 오늘은 우리 남편이 더 바빴을 거야. 종일 육아에 매진했거든. 어서 가서 교대해 줘야지.”

진아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고 있는 개구쟁이 아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도아는 아기를 향해 이모가 다음에 장난감 사줄게, 라고 말하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사를 나왔다.

주말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치 못한 평화로운 금요일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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