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에필로그.2
(83/85)
제83화. 에필로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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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에필로그.2
2022.08.15.
“이제 그만 일어나. 열두 시 넘었어.”
차가운 감촉에 도아의 속눈썹이 움찔거렸다.
하얀뺨을 쓰다듬던 손길이 간질거리던 머리카락 몇 올을 귀 뒤로 넘기고는 귓불을 살짝 눌렀다.
나른하면서도 다정하게 느껴지는 이 시간이 이제는 익숙했다.
도아는 이런 것이 당연해진 일상이 몹시 좋아 속으로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분 탓이라 믿었다. 기분이 들떠 이렇게 울렁거리는 거라고.
그러나 얼마 못 가 의학적으로 자신의 속이 굉장히 안 좋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숙취였다.
“으으. 대표님, 아니 시우 씨, 나 진짜 속이 너무 안 좋아요.”
도아가 잠이 덜 깬 얼굴을 베개 시트에 파묻으며 웅얼거리자 시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알아. 그래도 이제 일어나, 이 주정뱅이야. 콩나물국 끓여 놨어.”
“콩나물국?”
힘들다며 응석부리던 도아는 따뜻한 국물이 있다는 소식에 홀린 듯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느다랗게 찌푸린 눈길이 시우의 얼굴에 닿았을 때, 문틈으로 요리 냄새가 새어 들어왔다.
“맛있는 냄새…….”
따뜻한 국물이 들어가면, 요란한 속이 진정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일어날 거지?”
가만히 남편을 바라보던 도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얼굴에는 행복이 깃들어 있었다.
시우가 자신보다 요리를 훨씬 잘한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 어려웠다.
그 어울리지 않는 행동의 원인이자 결과가 오로지 자신의 미소라는 것 역시 그랬다.
도아는 얼떨떨하기만 한 순간을 다시 경험하기 위해 팔에 힘을 주어 상체를 일으켰다.
**
“아. 살겠다.”
도아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제 앞에 놓인 유리컵을 잡았다. 바위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방에서 나온 건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한 대표님. 나중에 회사 관두면 레스토랑 하나 차리시죠.”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지켜보던 시우가 손을 뻗어 비어있는 유리잔을 천천히 채워주었다.
“글쎄. 너 말고 다른 사람에게 이런 정성을 쏟고 싶지는 않은데.”
“그럼 저만을 위한 레스토랑을 만들면 되겠어요.”
“그건 괜찮은 것 같네.”
도아는 그저 하는 말 이라고 결론지었지만, 그가 하는 말은 진심이었다.
요리를 하는 것이 시간 낭비라는 것은 일찌감치 깨달은 바였다.
하지만 아내의 기쁨을 위한 대가라면 그런 계산적인 말들은 무의미했다.
외부 보고가 잡혀있던 어제도, 혹시나 도아가 자신보다 먼저 집에 들어올까 서둘러 일을 마쳤다.
푸른 새벽녘에는, 자신의 세상에 도아를 한가득 채우고 작은 행동 하나하나 놓치지 않았다. 그러다 제 품으로 아내를 끌어안고 허리를 매만지며 온기를 느꼈다.
“다음 주에 병원 가죠? 일 년 만에 가는 것 같은데, 기분이 어떠세요?”
달콤한 목소리가 아침 일을 떠올리던 시우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녀의 눈길은 자신이 선물했던 작은 화분을 지나, 테이블 끝 쪽에 놓여 있는 달력을 향해 있었다.
“이제 괜찮아. 일 년 넘도록 공황도 안 왔고, 약을 찾을 만큼 힘들지도 않았어.”
“정말 다행이에요. 저도 반차 신청해뒀으니 같이 가요.”
도아의 미소는 비서로 마주했을 때보다 훨씬 따뜻했다.
그래, 짧게 대답하는 시우의 웃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람이 떠나고 월튼은 새로운 신경정신과 전문의를 알아보았다. 사랑을 찾느니 마느니 오지랖 부리던 자신을 후회하며, 조금 더 냉정하게 에이치 코리아 대표를 도와줄 사람을 수소문했다.
시우는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고, 의사의 실력은 훌륭했다.
아무 고민 없던 어린 시절의 그날처럼, 평온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안정감의 원인이 제 눈앞에서 연신 물을 마시는 주정뱅이란 것이 새삼 신기했다.
“얼마나 마신 거야.”
시우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한번 컵에 물을 따랐다.
무엇이든 네가 필요하면 채워주겠다고, 너는 나에게 더 큰 것을 채워주었다고. 그런, 늘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일 년 만에 만났거든요. 친구가 워낙 술을 좋아했던 친구라서 그냥 따라서 조금 마셨는데. 우리 결혼식 때도 왔었어요.”
“그게 다가 아니지.”
“그럼요?”
“나한테 고백 거절당했을 때 소개팅 하라고 했던 친구잖아.”
시우는 커피잔을 느긋하게 내려놓으며 잠잠하게 말했다.
당황한 것은 오로지 도아 뿐이었다. 뜻밖의 대답에 머금고 있는 미지근한 물을 삼키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뭐지?”
꿀꺽. 겨우 물을 넘긴 도아가 마른기침과 함께 되물었다. 가슴이 질끈 조여오는 건 기분탓이라 믿었다.
“어제 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도아 님. 그러길래 적당히 마셨어야지.”
식사하는 내내 온화한 눈길로 아내를 바라보던 시우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제가요……? 그럴 리 없는데. 저는 주사가 집에 가서 잠자는 건데.”
“그럼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겠어?”
“아시다시피 예전 그날은 저에게 굉장히 힘든 날이었으니, 어제는 술 마신 김에 좀 투덜거렸나 보죠. 구구절절 말한 게 아니라.”
“참나.”
이상한 답변을 내놓은 도아는 삐딱한 시선을 못 본 척하기 위해 수형이 근사한 올리브나무로 고개를 돌렸다.
그 행동이 멈춘 건, 시우를 힐긋 보는 시선이 벌어진 셔츠 사이에 닿아 버리면서였다.
“제 주사 걱정하시기 전에 대표님 옷부터 좀 여미세요. 단정하지 못하게 이게 뭐예요?”
그녀가 눈가를 찌푸리며 목소리를 키웠을 때 두 뺨에는 붉은빛이 감돌았다.
“뭐가?”
“단추도 안 잠그고 있잖아요.”
“아, 이거?”
시우가 턱 끝을 내려 유난히 깊게 파인 자신의 셔츠를 확인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 가만가만한 태도에 한숨을 내쉰 도아는 의자를 뒤로 빼며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 남편의 곁으로 다가갔다.
“밖에선 그렇게 고고하신 분이 이런 거 하나 눈치 못 채셨어요?”
상체를 낮춘 후, 다정한 핀잔을 내뱉으며 남편의 느슨한 옷자락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어? 단추를 안 잠근 게 아니고, 떨어졌네요? 다른 옷으로 입지 그랬어요.”
남들이 그저 기분전환용으로 마시는 맥주 양에 취해서, 주말 아침을 다 날리고 말았다. 그것이 미안해 도아는 더 뻔뻔하게 잔소리했다.
“누가 보면 일부러 뜯어 버린…….”
말끝이 흐려진 건, 어쩐지 이 옷깃이 조금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면서였다.
‘뭘 이렇게 꽁꽁 싸매고 있어.’
어눌한 자신의 목소리가 귓전 가득 울렸다.
‘난 이 안에 있는 게 더 좋아.’
얇고 보드라운 셔츠가 파르르 떨렸다. 아니, 도아의 손끝이 떨렸다.
“헉.”
생각할 겨를도 없이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술 취한 자신이 시우를 벽으로 밀치고는 속삭였다.
‘취하니깐 더 잘생겨 보이네.’
그리고 투두둑 그의 옷을 힘주어 뜯었다. 제일 위에 달려있던 두 개의 단추가 힘없이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구르르. 굴러가는 단추알맹이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컸다.
한 번 시작된 전날의 기억은 목걸이를 발견했던 날처럼 매섭게 도아의 머릿속을 채워나갔다.
‘도아야. 이도아.’
아내의 저돌적인 모습에 조금 당황한듯한 남편의 목소리는 덤이었다.
‘너는 목소리도 너무 좋아.’
도아의 얼굴은 어느새 울긋불긋 달아올랐다. 입술을 하얗게 변할 정도로 질끈 물며, 속으로 탄식했다.
미쳤어. 안돼. 안돼. 더 이상 떠오르지 마.
전류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떨리는 손끝은 어느새 단추가 있었던 자리만 매만지고 매만질 뿐이었다.
비싼 옷인데 단추는 뭐 이리 허술하게 달아놓은 건지.
“이도아.”
애꿎은 바느질 탓만 하고 있는 사이, 시우가 도아를 불렀다.
“네……?”
“왜 그래?”
자신을 향하고 있는 눈동자는 오늘따라 더 짙은 빛을 띠었다.
‘내 아내는 취한 모습도 여전히 귀엽네.’
기억 속의 시우는 분명히 그렇게 말해주었다. 지금도 분명 다정하기는 했지만……. 조금 얄미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니요……. 그냥 정말 속이 풀려서, 그게 신기해서.”
그럴 리 없다. 내가 이렇게까지 밝혔을 리 없다.
도아는 단추가 뜯겨저 나간 후, 벌어진 부끄러운 짓을 애써 짓뭉개버렸다.
“옷은, 다른 거로 갈아입고 올게.”
“그냥 입고 있어도 돼요…….”
“아니, 난 꽁꽁 싸매는 걸 좋아해서.”
그가 벌어진 앞섶을 모으며 가슴팍을 가리자 도아의 얼굴이 식탁에 놓여 있는 장미보다 더 붉게 변했다.
지이이잉.
사랑하지만 가끔 정말 너무 얄밉다고.
도아가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원망의 눈길을 보내는 와중에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
“오 신이시여. 내 구세주들. 감사합니다.”
어정쩡한 자세로 문을 열어준 월튼의 얼굴은 이미 수척해져 있었다. 그러나 눈동자만큼은 안도와 희망이 깃든 채 반짝였다.
그의 아내는 출장으로 해외에 나가 있었다. 주말 아침부터 혼자 정신없이 아이를 돌보던 월튼은 그만 욕실에서 미끄러지며 허리를 삐끗하고 말았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통증이었다. 상체를 일으키는 것조차 어려워 식은땀을 쏟아내듯 흘려야 했다.
아빠의 부탁으로 핸드폰을 들고 욕실로 들어온 5살 첫째는 아빠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하고는 놀리기 바빴고, 두 돌이 안 된 둘째는 배고픔에 울기 시작했다.
구급차를 부르려던 월튼은 계획을 바꿔, 자면서도 외울 수 있는 친구의 번호를 눌렀다.
그 호출에 불려온 시우와 도아가 현관 앞에서 다소 창백한 낯빛으로 서 있는 사이, 열린 문틈으로 잠옷 차림의 어린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시우 삼촌!”
당황과 걱정이 어느정도 실려있던 시우의 눈빛은 움직일 수 있는 월튼의 상태를 확인한 후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해졌다.
그리고 강아지같이 웃음 짓는 아이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주이. 안녕.”
귀빈을 응대할 때 만큼이나 깔끔하고 단정한 인사였다. 그 모습에서 아내와의 휴일을 방해한 비서를 향한 짜증을 찾기는 어려웠다.
월튼이 우리 공주, 우리 공주 노래를 부르는 첫째 딸 주이는 한시우를 좋아했다. 잘생겼다는 다소 허무한 이유로.
아빠가 아픈 것을 미처 모르는 아이는 시우가 오랜만에 집에 놀러 온 것이 그저 좋았다.
차분하려고 노력했지만, 다섯살짜리가 그 흥분을 감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십여 분 후, 월튼은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밤에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실 거니 그때까지만 버텨주면 된다는 희망적인 말을 남겼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여덟 개의 눈동자가 멀뚱히 문을 응시했다.
시우는 주이의 작은 손을 잡고 있었고, 도아는 품에 둘째 주한이를 안고 있었다.
이제 어쩐다?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기도 전에 주한이가 울기 시작했다. 그에 질세라 주이도 배가 고프다며 시우의 팔을 흔들어 당겼다.
“삼촌! 나 배고파! 배고파!”
“으아아아앙.”
“시우 씨. 콩나물국이라도 끓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삼촌! 주이 콩나물국 잘 먹어! 주한이도 좋아해!”
“그래. 알겠어. 도아야 무거우니깐 내가 안을게.”
시우가 도아를 향해 손을 뻗자 주이가 발을 구르며 시우에게 매달렸다.
“주한이 말고 나 업어 줘요! 주이!”
“주이야, 안 돼. 시우 삼촌은 요리해야지. 시우 씨 나 괜찮으니까 어서 부엌으로 가요. 나 거실에 있을게.”
그곳으로 도아의 시선이 쏠린 사이 주한이가 허리를 세우며 바둥거렸다. 아기를 놓칠까 도아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짧은 찰나, 서로를 바라보던 둘은 시련이 왔음을 동시에 느꼈다.
길고도 긴 하루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