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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망한 판타지의 기사-6화 (6/200)

5화 - 정착

잘 부탁드립니다

"저 어린 친구는 기사가 맞소, 행정관."

루드의 표정을 읽었는지, 뒤에 있던 기사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는 아르센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기승수를 타고 있었다.

다리부터 머리까지 온몸이 금속으로 이루어진 사족보행 공룡 정도로 보이는 생물.

명백히 생물인 다른 기승수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진을 처음 보는가?"

아르센이 자기도 모르게 그 기승수를 신기하단 표정으로 쳐다보자 기사가 반문했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아르센은 표정을 고치며 변명했다.

"처음 봅니다. 제 아버지는 다른 기승수를 타셨거든요."

"아무래도 변방 성채의 기사라면 그럴 수밖에 없지. 진은 마법사가 관리해주지 않으면 결국 망가지니 말이야."

"아."

기사와 아르센이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듣던 행정관이 끼어들었다.

"그래서...아르센 경, 레녹 경의 아들이라고 하셨는데 혹시 정기적으로 우리 영지와 마수 부산물을 거래하는 동쪽 크라타 성채의 그 레녹 경을 말하는 것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불행히도 최근에 강력한 약탈자들이 쳐들어와 성채가 함락되고 제 아버지이신 레녹 경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어 몸을 의탁하러 왔습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아직 어려 제 몸 하나 간수하기 어려운 상황인지라."

"레녹 경의 자식임을 증명하실 수 있는 증표는 있으십니까?"

"유감스럽게도 없습니다."

"흠..."

상대의 말을 가늠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툭툭 치던 루드 행정관이 옆에 있던 기사를 보며 물었다.

"혹시 고견이 있으십니까, 팔라토 경?"

"나 같은 칼잡이의 의견보다 행정관의 판단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소만? 일단 저 친구가 마력을 각성한 건 사실이오. 거기다 꽤 좋은 잠재력을 지니기도 했고. 적어도 부모 중 한 명이 기사이지 않고서야 저 정도 힘을 타고나긴 쉽지 않지."

팔라토의 조언에 잠시 고민하던 루드는 곧 결정을 내렸다.

신분을 증명하긴 어렵지만 어린 나이에 기사로 각성한데다 말투나 행동거지 역시 나이에 비해 조숙하고 빼어난 것이 교육받은 티가 났다.

여기서 죽이거나 업신여겨 쫓아내는 것보다는 대접해 영지의 기사로 꼬시는 쪽이 이득이라는 판단이 섰다.

물론 영지의 기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영주가 결정할 문제지만 그가 아는 영주는 공짜로 굴러들어온 기사를 놓치고 싶어 할 위인이 아니었다.

"음, 우선 제 권한으로 영주관에 초대하고자 합니다. 아르센 경. 다만 신원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가지고 계신 무기를 맡겨주시고 저희 쪽 병사들과 동행해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아끼는 물건이나 가보도 아니고 약탈자에게서 빼앗은 칼에 불과하기에 아르센은 담담히 옆에 있는 병사에게 칼을 넘겼다.

영주관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팔라토 경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런데 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언제 각성한 건가? 기사치고는 체격이 작은데."

"이제 열 살입니다. 최근에 각성했고요."

"부럽군. 아무래도 어릴 때일수록 좋은데 말이지. 나는 스무 살이 다 되어서야 겨우 각성했거든."

그렇게 투덜대듯 말하며 팔라토가 자신의 투구를 벗어 안장에 걸었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턱수염을 기르고 유난히 곱슬머리가 두드러지는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유쾌한 인상을 주는 목소리와 달리 광대뼈가 도드라지고 뺨이 푹 들어가 우울해 보이는 생김새였다.

"아마 좀 있으면 고생 좀 하겠군. 각성하고 나서 몇 달 동안은 키가 엄청나게 크거든. 성장기에는 더더욱. 뼈마디가 욱신거리지 않을 날이 없을걸세."

그 말을 듣고 나서 생각해보니 새삼스럽게 팔라토도 레녹 경도 모두 2m가 넘는 장신임을 깨달았다.

레녹 경이 키가 컸던 것은 아들인 필루스도 키가 컸기에 그냥 집안 내력인 줄 알았는데, 설마 기사가 되면 키가 커지는 것이었을 줄이야.

"제가 제 아버지밖에 기사를 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 기사들은 모두 키가 큽니까?"

"물론. 나도 기사 중에선 꽤 작은 편일세. 내가 지금까지 본 제일 큰 기사는 키가 아홉 어림이 넘는 거 같더군."

대충 270cm 이상이라는 말이니 이 정도면 같은 사람이긴 한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어쩌면 자네는 한참 성장기인 어린 나이에 각성했으니 그 기사만큼 클지도 모르겠어."

"제발 그 정도까지 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대화를 나누며 그들은 농지를 넘어 여기저기 집이 세워진 마을 쪽으로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은 낡긴 해도 제법 말끔한 옷차림에 영양상태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아르센은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성채가 이 세상 기준으로 얼마나 끔찍한 곳이었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성주관을 제외하면 세기말 거지소굴이었던 그곳에 비해 여기는 마수도 약탈자도 나타나지 않는 평범한 중세 농장 같았다.

행정관과 기사, 병사들의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조아리며 굴종을 표현했다.

비교적 병사나 가신, 일반인 사이에 거리감이 적었던 성채에 비하면 신분의 차이가 훨씬 두드러지는 모습이었다.

'잘 됐군.'

평민으로 산다면 모를까 아르센은 이제 기사로 살 예정이었으니 전혀 나쁜 일이 아니었다.

신분제가 없었던 전생의 관념에 얽매일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아르센은 팔라토가 타고 있는 기계형 기승수, 진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 진이라는 건 생물입니까?"

"나도 잘은 모르네만, 마법사들 말로는 마법생물이라고 하니까 생물인 것도 같긴 한데...일단 먹고 마실 필요는 없으니 생물이라 보긴 좀 애매하군. 기사가 자기 마력만 제공해주면 계속해서 움직일 수 있고 지치지도 않지. 거기다 진과 기사는 정신이 연결되어 있어서 내가 원하는 행동을 바로 지시할 수도 있어. 진이 있어야만 진정한 기사라고 하는 게 괜한 이유가 아니야."

그 말과 함께 팔라토가 타고 있던 진이 네 발을 탭댄스 하듯이 촐싹대며 몸을 흔들었다.

"이렇게 말이지. 아...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자네 부친을 모욕하려는 의도는 아니네. 변경의 성채를 통솔하는 기사들은 인류의 평화를 위해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는 숭고한 분들이니 말이야. 성채는 규모가 작아서 마법사가 없는 경우가 많으니 진을 수리하기도 어려울 테고."

"맞습니다. 제가 살던 성채에도 마법사는 없었죠."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하는지 다소 변명조에 가까운 팔라토의 말에 아르센은 담담히 동조를 표했다.

레녹 경을 진짜 아버지처럼 생각한 적이 없으니 그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전혀 화가 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팔라토는 나름 위로해주는 의미에서 레녹 경을 비롯한 변방 성채의 기사들을 '숭고한 선구자' 정도로 묘사했지만 실제로 그런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성채의 기사들은 대부분 영지 같은 곳에서 정치적인 실수로 밀려났거나 사회적으로 용납하기 힘들 정도의 문제를 일으켜 추방된 것에 가까웠다.

아니면 영주에게 복종하고 선배 기사들에게 굽실거리기 싫어서 작고 추레한 곳에서나마 왕 노릇을 하고 싶었거나.

'그 인간이야 살았건 뒈졌건 알 바 아니지.'

레녹 경이 아르센에게 아버지로서 해 준 일은 정말 목숨만 붙여준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르센의 기억 속에서 레녹 경은 그를 한 번도 아들로 여긴 적이 없었으며 무언가를 해준 적도 없었다.

그가 아르센의 이름을 모른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으리라.

만약 아르센에게 환생 전의 기억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정을 갈구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전생에 아버지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은 아르센은 굳이 현생의 못난 아버지에게까지 애정을 찾지는 않았다.

그나마 그 쪽에서 기사 혈통을 물려받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대외적으로 최소한의 존중 정도나 해주면 될 것이다.

마을을 지나 큼지막한 영주관의 대문을 넘자 행정관 루드가 하녀 한 명을 불렀다.

"쉴라! 여기 이분은 귀한 손님이시니 몸에 맞는 깔끔한 옷을 준비하고 목욕과 식사, 쉴 곳을 마련해 드려라."

"네, 행정관님."

아르센은 하녀를 따라 목욕을 하고 새 옷을 갈아입은 뒤 다시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따뜻하고 맛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지금보다 더 어린 시절 하녀들이 가끔 맛있는 음식을 챙겨주긴 했지만, 그 챙겨준다는 것이 대충 구워낸 마수 고기 정도였다.

그에 비해 지금 그에게 대접 된 식사는 갓 구운 따뜻한 빵과 닭고기 스튜, 과일 파이였으니 비교할 수가 없었다.

뒤에 항상 무장한 병사 두 명이 따라다닌다는 점만 빼면 최고의 호사라고 할 만했다.

씻고 배불리 먹으니 잠이 밀려왔지만, 아직 잠들기에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마침 때맞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루드 행정관이었다.

"아르센 경, 영주님께서 보자고 하십니다."

"알겠습니다."

아르센은 대답하고 냉큼 일어서서 가려고 일어서는데 정작 행정관이 안내할 생각은 하지 않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왜 그러나 하고 보고 있으니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아르센 경을 모욕하려는 의도는 아니라고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만. 혹시 영주님을 뵐 때의 예의에 대해서 부친께 배우셨는지?"

"아니요. 전혀 배운 게 없습니다. 행정관님께서 가르쳐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아르센의 말에 행정관은 영주를 만나며 해야 할 몇 가지 미사여구와 행동, 해서는 안 되는 행동에 대해 주의를 주었다.

다행히 그다지 많은 종류는 아니어서 금방 숙지할 수 있었다.

애초에 영주가 기다리고 있으니 긴 시간을 내서 복잡하게 가르쳐 줄 시간도 없었겠지만.

고대의 마법이 담긴 말끔한 대리석으로 된 복도를 지나, 몇 번을 돌은 끝에서야 영주의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행정관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영주님, 아르센 경이 영주님을 뵙고자 왔습니다."

"들여보내게."

굵고 낮은 목소리와 함께 문을 열며 행정관이 한 걸음 물러섰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큼지막한 의자에 앉아있고 그 뒤에는 조금 전 보았던 팔라토와 처음 보는 여자 기사가 서 있었다.

"영주님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레녹의 아들 아르센입니다."

"벨루안의 영주인 누트일세. 그래, 크라타 성주...레녹 경의 아들이라고?"

"네, 맞습니다."

놀랍게도 영주는 기사가 아니었다.

그동안 막연하게 성주들이 기사니까 영주도 당연히 기사이리라 생각했던 아르센이었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동네 깡패야 싸움을 잘해야 보스가 되지만 거대 마피아 조직의 보스가 싸움을 잘할 필요까진 없지 않겠는가.

조직의 규모가 커지고 부릴 수 있는 무력이 강해질수록 개인의 힘을 쓸 필요성이 적어지는 법이다.

"레녹 경은 젊은 시절에 우리 벨루안에서 기사로서 수행했다네. 혹시 알고 있나?"

"아...예, 지나가던 얘기로 들었습니다."

"그는 나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기도 했다네. 좋은 사람이고 좋은 기사였지.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만 않았어도...흠, 레녹 경의 생사가 불명이라 들었는데."

"약탈자들이 성채를 침략할 때 마침 사냥을 나가신 상태였는데 그날 저녁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보통은 늦은 오후 정도면 돌아오셨는데도요. 성채에 계속 머무르기가 너무 위험해서 나왔기 때문에 그 뒤로 어떻게 되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부디 그가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오길 기원하겠네. 자네가 레녹 경의 아들인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거 같군. 어린 시절의 레녹 경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 닮았어. 그 친구도 어렸을 땐 여자깨나 울렸단 말이지."

즐거운 과거를 회고하듯 낄낄거리며 말하는 영주의 태도도 신선하지만, 그가 말한 내용이 더 충격적이었다.

아르센이 기억하는 레녹은 항상 술에 취해 시뻘건 얼굴을 한 털북숭이 중년 아저씨였으니까.

레녹 경이 여자깨나 울렸다는 말을 듣고 바람둥이가 아니라 강간범이라 그런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래도 나름 곱상하니 괜찮은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식으로 자라게 되리라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앞으로 얼굴 관리 좀 해야겠군.'

"그럼, 레녹 경이 돌아올 때까지만 임시로 몸을 의탁하고 싶은건가?"

질문하는 영주의 눈이 날카로웠다.

이 질문은 다시 말해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무위도식하러 온 거냐?'라고 따져 묻는 셈이었다.

고작 어린아이 한 명 먹여 살리는 데 예민하게 구는 걸 보아 넓은 영토를 가진 영지라고 해도 자원이 넉넉하지는 않은가 싶었다.

"영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이 영지에서 기사로서 수행을 쌓고 봉사하고 싶습니다."

이 세계에서 힘없는 자가 얼마나 무력하고 비참한지는 지난 십 년의 세월로 충분히 느꼈다.

약탈자, 마수, 그 외의 많은 위협 속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지내는 것은 몰아치는 파도 속에서 나무판자 하나를 붙들고 살기를 기원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르센은 힘과 권력을 원했다.

모두에게 존중받고, 그 누구도 자신을 해치거나 무시할 수 없도록.

아르센의 말에 누트 영주는 가만히 턱을 괸 채 다른 손으로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팔라토 경."

"말씀하십시오, 영주님."

"이 친구가 기사로서 자질이 꽤 괜찮다고 했었지?"

"기사의 잠재력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니 함부로 판단할 것이 못 되지만, 잘 키우면 라뮌 경 정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벨루안 영지에서 가장 강한 기사의 이름이 나오자 누트의 입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사실 자질이 별 볼 일 없는 기사라 해도 기사 자체가 워낙 희귀한 인재이기에 무시할 수 없지만, 재능있는 기사는 그중에서도 귀했다.

"아르센. 벨루안 영주의 이름으로 자네를 팔라토 경 밑에서 기사로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겠네."

그러면서 인장반지를 낀 왼손을 내밀었다.

잠시 뭘 원하는 건지 몰라서 아르센이 가만히 서 있자 아르센의 뒤에 서 있던 루드 행정관이 헛기침하더니 귀에다 작게 속삭였다.

면담 시의 간단한 예의를 가르쳐줬을 뿐이지 충성을 맹세하는 법 같은 건 가르쳐주지 않았으니 아르센이 그런 예절을 알 리 없었다.

"영주님에게 무릎 꿇고 충성맹세를 하십시오. '제 이름을 걸고 배신당하지 않는 한 결코 배신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그의 속삭임을 들은 아르센은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맹세의 말을 읊었다.

솔직히 촌극에 가까운 요식행위라 생각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이런 의식에 크게 지배받으니 따라주는 것이 마땅했다.

"레녹의 아들 아르센이 이름을 걸고 맹세하니 영주님께 배신당하지 않는 한 저 역시 절대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나 벨루안의 영주인 델로스의 아들 누트가 말하건대, 너 아르센은 나와 영지를 배신하지 않는 한 나의 이름 아래에 보호받을 것이다. 전능하신 르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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