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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망한 판타지의 기사-20화 (20/200)

19화 - 축제 전야

잘 부탁드립니다

원정으로부터 몇 주 후, 다리가 완전히 나은 아르센은 다시 연무장에서 본래 하던 훈련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지금 하는 것은 대련으로, 상대는 여전히 팔이 덜 나은 팔라토였다.

본래는 아르센이 연습용 검을 들고 팔라토는 맨손으로 대련할 정도로 차이가 났지만, 최근 그 차이는 제법 좁혀져 둘 다 연습용 검을 들게 된 상태였다.

한쪽 팔을 쓰지 못하기에 팔라토의 기량이 떨어진 것도 있고, 아르센의 기량이 눈에 띄게 상승한 것도 있었다.

"가겠네!"

간단히 공격의사를 표한 팔라토가 아르센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렀다.

아르센이 그 공격에 의식을 집중한 순간 세상이 느려지며 공격 역시 느릿한 속도로 날아왔다.

공격의 흐름에 맞춰, 그리고 느려진 자신의 몸에 맞춰 아르센은 정확한 타이밍에 팔라토의 검을 쳐냈다.

팔라토는 노련한 기사답게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다리를 뻗어 아르센을 견제했다.

키 차이가 나는 만큼 팔라토에게 있어서는 미들킥이지만 맞는 아르센의 입장에선 하이킥에 가까웠다.

완벽하게 공격 범위 안에 들어와 보통은 피할 수 없을 일격이었다.

하지만 특기를 활성화한 아르센은 이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기에, 아슬아슬하게 목을 꺾어 날아오는 발차기를 피했다.

"큭!"

진짜로 세게 차면 위험하니 어느 정도 조절했겠지만, 그걸 고려해도 살벌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뺨을 스쳐 지나가는 날카로운 바람에 이를 악문 아르센은, 몸을 숙인 자세 그대로 팔라토의 디딤발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팔라토는 한쪽 발이 뜬 자세 그대로 뒤로 몸을 튕겨 공격을 피해냈다.

그렇게 한 합을 나눈 뒤, 아르센은 위에서 내려 베는 공격을 가해온 팔라토와 검을 맞댔다.

정확히는 검을 맞대는 척하다 정확한 타이밍에 사선으로 꺾어 몸통을 노렸다.

둘의 검이 거의 동시에 서로의 몸에 닿았다.

다행히 연습용 검인데다 둘 다 연습복을 입고 있었기에 상처를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무승부군!"

팔라토는 유쾌한 목소리로 말하며 검이 닿았던 부분을 쓱 털어냈다.

"아뇨, 제가 졌습니다. 팔라토 경은 한 손에다 원래 쓰시던 손도 아닌데요."

아마 온전히 오른손을 쓰는 팔라토였으면 서로 찌르는 게 아니라 거기서 한 번 더 검을 비틀어 아르센의 공격을 묶어 버렸을 것이다.

아르센은 새삼 정식 기사들과의 격차를 체감했다.

특기를 사용해 엄청나게 느린 시간을 체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측 당하거나 수 싸움에서 밀려 생각만큼 이득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확실하게 움직임을 보고 계산해 들어간 건데도 간신히 무승부가 고작이지 않았나.

이와는 반대로, 왼손으로 무승부이니 자기가 졌다고 말하는 아르센을 보며 팔라토는 감탄했다.

어린 나이에 기사로 각성한데다 무훈까지 세웠으니 오만해질 법도 하건만, 이 어린 기사의 꾸준한 향상심은 가끔 존경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실 둘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이런 조건이라 해도 무승부를 한 번 만들어 낸 것이 대단한 일이었다.

"특기 사용도 꽤 능숙해진 거 같군. 솔직히 그 발차기는 못 피할 줄 알았는데."

"정확히 충돌하는 순간에만 쓰고 있습니다. 오래 유지하면 피로해져서요."

시간을 느리게 인식하는 특기를 무한하게 계속 사용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특기는 전투 중에 오래 유지할 경우 지속해서 정신적인 피로를 유발했다.

최대로 버티면 1분 정도일까, 그나마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한 합 한 합의 격돌 직전에만 사용하는 것이었다.

전투의 흐름이 끊긴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특기의 사용 시간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아무튼, 잘하고 있네. 이대로라면 분명 훌륭한 기사가 될 수 있을 걸세."

과거 팔라토는 아르센의 가능성을 최대한 성장할 경우 영지 최고의 기사인 라뮌과 비슷한 수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린 나이, 타고난 마력, 성채에서 혼자 영지까지 걸어올 정도의 독기를 고려한 평가였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변했다.

뛰어난 무술 재능과 향상심, 거기다 강력한 특기까지 겸비한 만큼 제대로 단련하며 성장한다면 인근 모든 영지를 통틀어 적수가 없는 위대한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팔라토의 새로운 평가였다.

혹시 자만할까 싶어 절대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이후로도 두 사람은 몇 번이고 검을 나눴다.

대부분 팔라토가 이기긴 했지만, 한두 번 정도는 아르센이 이기기도 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그러고 보면 내일이 추수 축제인 거 알고 있나?"

"들어보기는 했습니다."

대충 듣기로는 한 해의 수확을 마치며 신나게 춤추고 먹고 마시는, 심플하기 짝이 없는 중세 스타일의 축제였다.

이날만큼은 야간통행을 금지하는 규칙도 없으므로 밤부터 새벽이 되도록 즐겁게 논다고 했다.

그리고 열 달 뒤에는 아이들이 많이 태어난다는 쓸데없는 이야기도 덧붙여져 있었다.

"우리 영지에서 가장 큰 행사라네. 한 번 즐겨 보게나."

* * *

"결심했어, 내일 축제 때 청혼한다."

즐거운 점심 식사 도중, 제노비아가 주먹을 꾹 쥔 채 다짐하듯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시간에 밥을 먹는 게 기사 두 명뿐이었기에, 그 말을 들은 것은 아르센 하나였다.

빵을 한 입 찢어먹은 아르센이 대답했다.

"그동안은 왜 안 하셨습니까?"

"그야..."

휙휙 고개를 좌우로 돌려 확인한 제노비아가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카민은 자기 주관이라곤 쥐뿔만큼도 없는 놈이라서, 맨날 내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라온단 말이야. 그래서 어지간하면 카민이 청혼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지."

그렇게 대답한 제노비아는 갑자기 제 분을 못 이긴 듯 탁자를 쾅쾅 두드렸다.

진심으로 두들겼다면 나무 탁자가 박살 나고도 남았겠지만, 식탁이 멀쩡한 걸로 보아 그러지 않을 정도의 자제력은 아직 남은 듯했다.

"내가 결혼하자고 해서 결혼하면 카민이 그러고 싶은지 아닌지 알 수가 없잖아...딱히 마음 없는데 내가 하자고 해서 결혼해주는 거면 어떡해?"

정말 사서 걱정을 한다고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아르센이 카민과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기에 뭐라 말해주기 애매한 주제였다.

아니, 애초에 이런 걸 열 살, 이제 생일이 지나 열한 살이 된 어린애에게 상담해서 어쩌겠단 말인가. 애늙은이란 평가를 자주 받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저기서 듣자하니 카민 경 쪽도 마음이 있어 보인다는 거 같던데요."

"나도 알아. 다 들리니까."

제노비아가 자기 귀를 툭툭 치며 대답했다.

"근데 정작 카민의 본심은 모르잖아. 다들 그럴 거라고 짐작하고 있을 뿐이지."

딴에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아르센이 보기에도, 카민은 항상 매사에 관심 없는 표정으로 제노비아의 옆에 붙어 다닐 뿐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거나 애정을 표시하는 일은 일절 없었다.

마치 그림자처럼 군다고나 할까.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기에 사회가 유지된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 이렇게 서로를 피로하게 하기도 했다.

"아...심란하다, 심란해. 그냥 술 먹고 취해서 돌진할까."

"보통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시도는 실패로 끝나던데요."

"시끄러워, 꼬맹이가 뭘 안다고."

그럴 거면 왜 물어봤냐고 응수할까 했던 아르센은 대답을 아끼며 닭고기 스튜를 한 입 퍼먹었다.

"적어도 인상적인 청혼 대사 정도는 준비해놔야 하지 않을까요?"

그 얘기를 들은 제노비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참을 고민했다.

거의 2~3분 가까이 그렇게 허비하고서 몇 마디 고백 멘트를 읊었는데, 그나마 나온 것들은 하나같이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카민, 넌 나의 별이야. 부디 나와 결혼해주겠어? 카민...널 사랑했어, 예전부터 계속...아! 못 해 먹겠네 정말!"

"진심을 전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미사여구를 너무 붙이려고 하지 말고, 솔직하게."

"그럴 거면 그냥 '야, 결혼하자!'하면 그만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제노비아가 수프를 후루룩 들이마셨다.

아르센은 그 말을 반쯤 흘려들었다.

'설마 진짜 저러진 않겠지.'

* * *

아르센은 아마 이 영지에서 엘로이즈와 가장 친한 사람일 것이다.

또래 친구는커녕 부모나 형제, 그 외의 누구에게든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자랐던 소녀는 작은 친절에도 쉽게 마음을 열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엘로이즈에게 혐오감을 가지지 않는 루덴조차 말랑말랑한 친애의 정 따위를 주는 법은 몰랐기에 그녀는 애정에 굶주려 있었다.

사실 아르센은 반쯤 떠밀리다시피 그녀를 챙기게 되었지만, 자그마한 친절에도 기뻐하는 엘로이즈의 태도를 보며 조금 더 신경을 쓰게 됐다.

자신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즐거워하며 감격하는 사람을 싫어하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엘로이즈와 친해진 덕분에 얻게 된 것도 많았다.

우선 글을 읽고 쓰는 법부터 시작해서 마법사와 관련된 많은 정보를 얻었다.

덤으로 아르센과 친해짐으로써 엘로이즈의 정서가 안정되어 전처럼 다른 사람들을 겁주거나 난동을 부리는 일이 사라졌고, 이로 인해 반사적으로 아르센의 명성이 올랐다.

말하자면 엘로이즈라는 맹수를 완벽하게 조련한 조련사로 대우받게 된 것이다.

"이번에 하려던 건 성공했어?"

"응! 루덴도 내 마법이 완벽하다고 그랬어. 나보고 천재라고 했다니까."

아르센은 듣자마자 엘로이즈의 말이 허풍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 루덴이 엘로이즈를 천재라고 칭찬해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가 몇 달간 교류해본 바에 의하면, 루덴은 칭찬으로 어린아이에게 오만을 불어넣느니 가혹한 독설로 마음을 꺾을 사람이었다.

실제로 옆을 흘깃 보니 책을 읽고 있던 루덴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비틀어진 게 한마디 해줄까 고민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 한 번 보여줄 수 있어?"

"잠깐만, 자..."

두 눈을 질끈 감고 정신을 집중하더니, 곧 엘로이즈의 두 손 사이에 붉은 구체가 생겨났다.

거기서 수십 마리의 작은 나비들이 나타나 화려하게 춤추며 아르센과 엘로이즈의 머리 위를 수놓더니 다시 구체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사라졌다.

"...어때? 예쁘지?"

"응, 굉장해. 이제 마력을 조절하는 것도 완전히 익숙해졌나 보네."

"그렇지? 이거 하려고 진짜 힘들었어."

마법으로 저런 화려한 형상을 만들어내는 행위는 당연히 실용성이라곤 쥐꼬리만큼도 없지만, 마력을 제어하는 수련으로서는 상당히 가치가 있다고 했다.

아르센이 칭찬해주자 엘로이즈는 기쁨에 찬 표정으로 다리를 동동 굴렀다.

'귀엽긴 한데 조금은 부담스럽단 말이지.'

아르센이 엘로이즈와 너무 친해진 탓인지, 둘을 약혼시키자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마당이었다.

아직 열 살, 이제 생일이 지나 열한 살짜리인 애들을 데리고 뭐 하는 짓이냐고 하고 싶지만, 이 세계에서는 이 정도 나이면 결혼을 약속하는 게 큰 흠도 아니라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마법을 보여준 후, 십자말풀이를 풀고 있던 아르센에게 엘로이즈가 불쑥 물었다.

"센은 축제 가고 싶지 않아?"

"나? 뭐, 그냥. 너는? 축제 가 봤어?"

"응, 가보긴 했어."

작년 추수 축제는 끔찍했다.

루덴은 축제 따위 관심 없다며 일축했고, 같이 갈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하녀 한 명을 데리고 축제를 보러 갔었다.

어디든 돌아다닐 때마다 수십 명의 시선을 끄는 것은 전혀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엘로이즈가 어딜 가든, 춤추며 축제를 즐기던 사람들은 그것을 멈추고 엘로이즈를 불편하게 쳐다보았다.

'왜 네가 여기에 있느냐'라는 식으로.

그날 방에 돌아와서 베개를 붙들고 엉엉 우는 것으로 엘로이즈의 작년 축제는 끝났다.

때문에 아르센에게 축제에 같이 가 줄 수 있냐고 물어보려다가도, 자기 때문에 제대로 축제를 즐기지 못할까 싶어 말을 꺼내기가 저어되었다.

가게 된다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정말 멀리서 구경만 해야 할 테니까.

엘로이즈가 애매하게 어물거리자, 루덴이 불쑥 입을 열었다.

"둘이 같이 가보던가."

그렇게 한 마디를 툭 던진 루덴은 방 한쪽에 있는 상자를 열더니 검은 로브 하나를 꺼냈다.

꽤 많이 사용한 물건인지 옷감이 약간 너덜너덜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아르센은 그 모습을 보고 잠깐 사악한 마법사들이나 입을만한 옷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여행할 때 입던 옷이다. 입으면 마법사 특유의 존재감이 확실하게 줄어들지. 누군가 직접 쳐다보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하는 경우에는 효과가 거의 없어지지만, 멀리서 구경만 하는 정도라면 괜찮을 거다."

"...이런 게 있었어? 지난번에는 왜 안 줬어?"

"축제 보러 간다고 얘기도 안 하고 갔는데 어떻게 주겠냐?"

너무나 맞는 말을 들은 엘로이즈는 대답하지 않고 로브를 받아 걸쳤다.

당연하지만 건장한 체격의 루덴에게 맞는 물건인 만큼 엘로이즈에게는 크다 못해 땅에 질질 끌리는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어딜 가든 눈에 띄겠는데요."

"아쉬운 대로 이렇게라도 해야지."

결국 그 자리에서 바늘과 실을 이용해 간단한 수술에 들어갔다.

로브 밑단을 통째로 위에다 올려 살짝 꿰매는 식으로 입어보니 모양새는 좀 웃기긴 해도 돌아다니기엔 문제가 없어 보였다.

루덴은 나름 뭔가를 만드는 사람이라 그런지 이런 방면으로도 손재주가 굉장히 좋았다.

"좋아, 됐다."

"내일 언제 만날까?"

축제를 즐기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지, 엘로이즈의 두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벌써 마음은 축제 한복판에 간 것마냥 이리저리 발을 동동 구르며 어지러운 방 안을 뛰어다녔다.

"내가 방으로 데리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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