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 새로운 땅
아르센과 엘로이즈의 여정에 있어 가장 큰 적은 마수도, 약탈자도 아닌 지루함과 피로였다.
식물 하나 없어 사막이나 다름없는 서쪽 평야는 말 그대로 황량한 대지만이 펼쳐진 공간이었고, 눈이 없지 않은 이상 위험한 적이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할 수가 없었으니까.
애초에 생태계라 할 만한 것이 없었던 탓에 만날 수 있는 생물 자체가 거의 없었고, 따라서 두 사람은 그 어떤 충돌도 없이 계속 달리고 또 달렸다.
영지에서 혹시 쫓아올지 모를 추격대를 따돌리고자.
식사 역시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건빵과 말린 채소, 육포가 유일하게 허락된 식사 메뉴였다.
농담으로도 맛있다고 할 수 있는 식사는 아니었지만, 최대한 가볍고 보존성이 높은 식량만을 가져온데다 물도 아껴야 하니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마지막으로 잠자리, 즉 수면 문제 역시 그들을 괴롭혔다.
다행히 추위는 엘로이즈의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이 사막 같은 황야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기에 밤이라고 마음 놓고 잠들 수는 없었다.
마수가 밤에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그들은 이미 상식 밖의 세계로 나와 있었기에.
체력이 좋고 밤눈이 밝은 아르센이 불침번을 서고, 낮에는 엘로이즈가 앞에서 방향을 잡아주는 상태로 반쯤 졸며 달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지루하고 피로하며 식사와 잠자리마저 끔찍한 여행을 몇 주일간 반복한 끝에, 그들은 마침내 숲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치 영지와 영지 밖의 경계처럼, 황야와 숲은 칼로 자른 듯 경계가 나뉘어 있었다.
숲을 본 순간 두 사람이 너무 기뻐 서로 얼싸안은 것은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을 일이리라.
그리고 숲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센은 마수 앞에 주저앉은 채 살해당하기 직전인 사람을 볼 수 있었다.
* * *
“후욱, 훅.”
리노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려 노력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이미 동료들은 모두 흩어졌고, 지금 이 자리에 남은 것은 그 한 명뿐.
그와 사냥꾼 동료들을 모두 압도한 강력한 마수가 제발 다른 사람을 쫓기만을 바라며 엎드려 있는 것이 현재 그의 상황이었다.
‘제발!’
사건의 발단은 동료 중 한 명이 눈꽃여우라는, 그 신체 일부가 정력제로 이름 높은 마수를 발견하면서 벌어졌다.
처음에는 그냥 식용으로 쓸 수 있는 거대 쥐 몇 마리나 잡자고 나온 사냥이었건만, 위험하지 않으면서 가치가 높은 마수인 눈꽃여우를 보고 다들 눈이 뒤집혔다.
눈꽃여우는 극히 드문 비공격적 마수였기에, 덤벼드는 사냥꾼들을 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망치는 눈꽃여우를 열심히 쫓고 쫓다 보니 원래 계획보다 훨씬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좀 위험한 곳까지 오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 순간 뿔에서 번개를 뿜어내는 거대한 사슴 하나가 나타나 그들을 습격했다.
동료 한 명이 타죽는 모습을 본 사냥꾼들은 즉시 활을 쏘고 창칼을 휘두르며 응전했다.
하지만 사슴의 검은 털가죽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고, 빠른 움직임으로 물러서며 번개를 두 번 더 뿜어 두 명의 동료를 죽였다.
결국 그 모습을 본 사냥꾼들은 대적할 수 없는 적임을 인정한 뒤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후 콰릉거리는 소리가 울리기를 몇 번, 리노는 제발 그 사슴이 살육에 만족하고 돌아갔기를 바라며 수풀 속에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발굽을 보며, 그는 자신의 삶이 여기서 끝났음을 직감했다.
‘니미럴.’
슬쩍 고개를 들자 발굽 위로 쭉 뻗은 검은 다리와 몸통, 그리고 아직도 파지직 하고 소리를 내는 두 뿔이 보였다.
사슴은 마치 벌레 보듯 무심히 리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노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살려주십쇼.”
사슴의 뿔에서 빛이 강렬하게 일어나는 순간, 리노는 두 눈을 감으며 자신의 한 많은 생애를 되새겼다.
죽은 부모와 형제자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 것도 잠시.
무언가가 푹 쑤셔 박히는 소리와 함께 마수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얼굴에 피가 튀는 것을 느끼며, 리노는 눈을 떴다.
“어?”
공포의 제왕과도 같던 사슴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리고 있었으며, 강철보다 튼튼한 가죽을 뚫고 투창 하나가 옆구리에 박혀 있었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리노가 놀라 감탄을 터트리자마자, 저 멀리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엎드려!”
냉정히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은 놀라울 정도로 날카롭게 리노의 귀를 파고들었다. 리노는 즉시 그 명령에 따라 엎드렸다.
리노가 엎드리고 정확히 일 초 뒤, 쾅 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몸 위로 무언가가 튀는 것이 느껴졌다. 리노는 폭발로 인해 멍해진 귀를 감싸 쥐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앞에는 몸이 산산이 으스러진 사슴의 시체가 있었다.
멍하니 서서 그것을 내려다보던 리노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았군.”
젊은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처음으로 보인 것은 영지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탈 수 있는 금속으로 된 기승수, 진.
그중에서도 생전 처음 보는 모양의 진에 올라탄 기사가 앞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검푸른 금속으로 만들어진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의 모습은 위풍당당하기 짝이 없었고, 심지어 뒤에서 햇살이 비치며 후광처럼 번쩍여 그를 신화 속의 존재처럼 보이게 했다.
그 모습에 리노는 자기도 모르게 경도되는 것을 느끼며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구,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님···저는 리노라고 합니다. 마수 사냥꾼입니다.”
“사람이 마수에게 공격당하고 있으면 구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 기사 아르센이다.”
이 위풍당당한 기사는 태도조차 고결하기 그지없어, 리노는 너무 감동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을 뻔했다.
리노의 이런 추태를 막아준 것은 기사의 뒤에서 나타난 검은 로브를 쓴 사람이었다.
다른 모양의 진을 타고 온 그를 직시하는 순간, 리노는 오싹한 혐오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사님, 저, 저분은 대체···?”
기사는 리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바닥을 적신 마수의 피를 보더니 말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지. 피 냄새를 맡고 마수가 올 테니까.”
* * *
[진짜 황야 너머에도 사람이 있네.]
[당연하지.]
[근데 생각보다 우리랑 똑같이 생겼어. 황야 너머에 사는 사람은 뿔이라도 달렸을 줄 알았는데.]
[그럼 사람이 아니라 마인이잖아.]
아르센은 엘로이즈와 귀걸이를 통해 대화하며 눈앞에 있는 사냥꾼, 리노를 내려다보았다.
근처에 있는 개울에서 몸을 씻은 그는 선망에 찬 눈빛으로 아르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혹시나 해서 묻겠는데, 나르비크 영지 사람 맞나?”
“네, 맞습니다! 근데 그런 걸 물어보신다는 건···혹시 기사님은 다른 영지 출신이십니까?”
다른 영지 사람을 보는 게 신기하다는 듯한 리노의 표정을 보며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영지의 최근 사정에 대해 물을 생각이었기도 했고, 애초에 아르센과 엘로이즈의 복식 자체가 이 근방 사람들과는 달랐으니까.
“멀리서 왔지. 아주 멀리서.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나르비크가 어떤 영지인가는 별부르미를 통해 들었지만, 그 정보는 십 년 전 기준.
아무 변화도 없을 수 있는 시간이 십 년이지만 반대로 모든 것이 변할 수도 있는 시간인바, 혹시 변한 것이 있는지 확인할 기회였다.
별부르미의 설명에 의하면 나르비크는 먼 옛날 영주 가문이 내분으로 전멸한 이래 여러 기사가 함께 통치하고 있는 영지로, 정확히 표현하자면 기사를 수장으로 한 폭력 조직들의 항쟁과 협잡 아래에서 굴러가는 무정부 사회라고 할 수 있었다.
빈틈을 보이는 순간 서로를 물어 죽이는 야수의 세계와 같은 곳.
이에 비하면 벨루안은 대단히 발달한 사회체계를 가진 선진국이라 할 수 있으리라.
“혹시 나르비크가 통일됐나?”
“설마요! 높으신 분들은 언제나 싸우고 또 싸우죠. 기사란 서로 죽이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니까요. 나르비크가 통일되는 건 달이 땅에 떨어지기 전까진 불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리노의 다소 냉소적이기까지 한 태도에서, 아르센은 나르비크를 통치하는 조직들에 대한 그의 반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소속된 조직이 없나 보군.”
자신이 너무 과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는지, 리노가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기사님께 한 말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기사님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죠, 당연히요.”
“아니, 들은 이야기는 있으니 이해한다.”
리노가 감사하다며 몇 번 고개를 조아리더니 말했다.
“따로 소속된 조직은 없습니다. 조직원은 집안부터 제대로 되어야 하거든요. 저는 그냥 하루하루 마수를 잡아다 먹고 사는 사냥꾼일 뿐입니다.”
“바깥의 독기를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인데, 그 정도 취급밖에 못 받나?”
“나르비크에서 저 정도 되는 놈은 흔합니다.”
사람이 독기를 이겨내고 밖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신체를 단련하고 마력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 기본 전제였고, 이는 벨루안에서는 병사가 되기 위한 최소조건이기도 했다.
단순히 몸을 단련하기만 해도 마력이 쌓인다면 농부나 대장장이도 마력을 쌓을 수 있었을 터.
하지만 신체 단련은 마력을 쌓을 그릇을 만드는 것일 뿐, 정말 마력을 쌓아 독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격렬한 투쟁이 필수였다.
팔라토는 이에 대해 ‘상대를 해치고자 하는 의지가 마력으로 쌓인다’라고 말했다.
즉, 병사를 키우기 위해서는 몸을 단련시키고 계속해서 대련하며 마력을 쌓아야 했다.
벨루안 기준으로 이런 과정을 거쳐 단련된 병사는 특권 계급으로 여겨질 정도였건만, 나르비크에서는 이런 사람이 널렸다는 의미였다.
전문 병사가 아니라면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는 벨루안과 달리 어려서부터 살아남고자 서로 다투고 죽이기까지 하는 황폐한 환경이 만든 부작용이리라.
‘일단 별로 달라진 건 없군, 다행인지 불행인진 모르겠지만.’
아르센은 리노에게 들은 정보를 차곡차곡 머릿속에 메모했다. 일단 지금까지 들은 내용으로 봐서는 과거와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또 한 가지, 꼭 확인해야 할 내용이 있었다.
“마법사에 대해선 어떻지? 보다시피 내 동행은 마법사인데, 데려가면 문제가 될 거 같나?”
“글쎄요···마법사님 혼자라면 아무래도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기사님이 옆에 계신다면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리노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아르센을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다소 부담스러워,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슬쩍 돌렸다.
“나르비크에선 힘센 놈이 법인데, 아까 그놈처럼 무시무시한 마수를 투창 한 방에 잡는 기사님 앞에서 누가 감히 뭐라 하겠습니까? 영지 안에서 기사라고 힘주는 놈들은 꽤 있어도, 막상 밖에 나가서 그 정도 마수를 잡아올 정도의 기사는 드무니까요.”
“영지 안에 마법사가 있나? 보통 사람들은 마법사를 보면 어떻게 반응하지?”
“마법사를 부리는 기사가 있다고는 합니다만,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다들 마법사를 꽁꽁 감추길 좋아하거든요. 다른 기사에게 납치당하기라도 할까 봐 그런지···생각해보면 애초에 마법사를 볼 일 자체가 거의 없어서, 마법사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거 같습니다. 저도 이번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법사를 보는 겁니다.”
“마법사가 보인다고 당장 돌을 던져 죽이거나 집에 불을 지르려 들지는 않을 거라는 의미군.”
아르센이 고개를 주억이던 중, 엘로이즈가 신호를 보냈다.
[역시 내가 밖에서 머무는 편이 나을까?]
[아니, 일단 영지에 들어가는 쪽이 나을 거 같아. 어차피 사야 될 물건이 많으니. 하지만 안에서는 항상 나랑 꼭 붙어 있어. 혹시 다른 기사가 납치하러 올지도 모르니까.]
[응. 걱정하지 마, 한시도 안 떨어지고 꼭 붙어있을게.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어지간하면 도망칠 수 있으니까.]
[그건 알지. 그냥 걱정돼서 얘기했을 뿐이야.]
엘로이즈와 대화를 나누는 한편, 아르센은 리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아르센과 엘로이즈는 당분간 이 영지에 머물러야 했고, 그동안 생활을 도울 현지인이 필요했다. 주의를 끌지 않으려면 함부로 밖에 나갈 수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가 우연히 구해준 이 사냥꾼은 아르센에게 은혜를 입은데다 마법사에 대한 편견도 없었고, 마침 소속된 조직도 없었다.
“당분간 나르비크에 머물러야 할 거 같은데 혹시 내게 고용될 생각 있나? 보수는 나쁘지 않게 쳐주지.”
“네? 그건···저를 기사님의 조직에 받아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리노는 상상도 못 한 행운을 접한 사람처럼 활짝 웃었지만, 아르센은 고개를 저으며 거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아니, 나는 평생 나르비크에 있을 생각이 없다. 여기서 몇 가지 일만 처리하고 떠날 생각이야. 그동안 간단한 교섭을 돕거나 잡일을 처리해주는 정도면 족해.”
“그러시군요···.”
리노는 대단히 실망했는지 고개를 축 늘어트렸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아르센이 다시 제안을 던지자 리노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아니면, 아예 나와 함께 떠날 생각 있나? 나는 모험이 끝나면 내 고향 벨루안으로 돌아갈 생각인데, 아마 거기가 나르비크보다는 훨씬 살기 좋을걸.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면 별 수 없지만.”
물론 두 마리 쥐새끼, 어쩌면 한 마리가 된 쥐새끼를 먼저 치워야겠지. 아르센은 그 말을 속으로 집어넣었다.
어차피 유적을 발굴해 얻는 유물을 얻는다고 해서 그걸 혼자 다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제 아르센에게도 동료와 부하, 세력이 필요했다. 별부르미는 아직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이들이었으니까.
믿을 만한 사람인지는 함께 지내며 알아봐야 하겠지만, 어쩌면 리노가 그 첫 번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