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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망한 판타지의 기사-61화 (61/200)

< 60화 - 산맥 >

유적에서 나온 일행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나르비크의 서쪽에 있는 성채였다.

다행히 이곳의 성주는 아르센의 군대가 자기 성채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했다.

물론 그것은 성주가 누구든 손님으로 기쁘게 맞아들이는 호인이어서가 아니었다,

기사 세 명, 마법사 열 명, 병사까지 합치면 스무 명이 넘는 군대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일 뿐.

이 성채의 기사는 성주 한 명뿐인데다 데리고 있는 병사들을 합해야 열여섯 명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성채에서 보급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성주는 지정된 장소에서 함부로 이동하지 말 것을 ‘권고’했을 뿐, 강경하게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성채는 그들이 오래 머무르기엔 지나치게 좁고 물자도 부족했다.

며칠 머무르는 정도면 모를까, 수십 명이 장기간 머물만한 곳이었다면 이미 이곳의 군대가 그 정도 규모를 갖췄으리라.

결국 아르센의 군대는 적당히 정비를 마친 뒤 다시 여정을 떠났다.

나르비크의 서부에 위치한, 위주 산맥으로.

* * *

위주 산맥은 대륙을 세로로 찢어놓는 듯한 형세를 한, 어마어마하게 길고 험준한 산맥이었다.

몇몇 샛길을 제외하면 사람이 지나갈 수 없을 정도여서, 예로부터 동부와 서부를 가르는 경계로 여겨졌다.

고도가 높아지며 나무들은 점점 키가 작아졌고, 풀이 자라나지 않은 황량한 흙바닥이 생겨났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산맥에도 마수들이 살고 있었다.

일반 동물보다 훨씬 강인한 신체조건을 가진 만큼 마수는 인간보다 산맥의 환경에 큰 영향을 받지 않으며, 따라서 이곳에서의 싸움은 인간에게 더 불리했다.

“쳐!”

병사들은 용맹하게 마수에게 덤벼들었다.

마법이 걸려 충격을 격감해주는 방패와 날카롭고 잘 드는 검을 믿으며.

선키가 2.5m에 달하는 올빼미곰을 향해 돌격하기 위해서는 용기뿐만이 아니라 좋은 무구 역시 필요했다.

“으아아아아!”

아르센은 뒤에서 그 싸움을 관찰했다.

혹시나 병사 중 누군가가 위험에 처할 경우 돕기 위해.

이미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고 수행한 일이기에, 병사들은 꽤 숙련된 몸놀림으로 마수를 사냥했다.

한 명이 앞에서 방패를 흔들며 주의를 끄는 사이 좌우에서 마법 걸린 검으로 베고, 주의가 흐트러지는 순간 정면에서 도발하던 이가 다시 쿡 찌르고······.

리노는 끊임없이 고함을 지르며 이를 지휘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늘 위기 없이 순조롭게 사냥이 진행되지만은 않는 법이다.

“미로! 뒤로 돌아가! 아니, 이 멍청한 새끼야! 너무 가깝잖아!”

어리숙한 병사 한 명이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주변을 돌다 곰의 앞발치기에 얻어맞고 데굴데굴 굴렀다.

다행히 치명적인 타격은 아니었지만, 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방비한 상태가 된 병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아르센은 선 자리에서 바로 투창을 던졌다.

급히 던지느라 많은 힘을 싣진 못했지만, 목 근처에 투창을 맞은 올빼미곰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지금이다! 뒤에서 찔러!”

리노의 명령과 동시에 물러서는 마수의 뒤쪽에 있던 병사 한 명이 마수의 엉덩이를 찔렀다.

가장 취약하고 치명적인 급소.

그 모습을 보며, 아르센은 과거 고양잇과 마수인 칼꼬리를 사냥하던 때를 떠올렸다.

치명적인 급소를 공격당한 마수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이했다.

죽은 마수의 사체 옆에서, 리노는 아르센에게 고개 숙여 잘못을 청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대장님. 이 정도 마수를 상대하는데···.”

“아니, 충분히 힘든 상대였다. 고생 많았다.”

리노를 격려하며 아르센은 혹시 병사 중 각성한 이가 없나 확인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기미가 있는 이는 없었다.

사실 벨루안 영지에서 백 명이 넘는 종자들이 쉼 없이 생과 사를 오가는 사투를 벌이는데도 기사로 각성하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아르센은 아쉬움에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이 녀석부터 정리하고 가지.”

“처음 보는 놈입니다만, 가죽이 질겨서 쓸모가 있어 보입니다.”“알아서 처리해.”

병사들이 힘을 합쳐 마수를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가죽을 벗기기 시작하자, 금방 헐벗은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던 중, 주위를 경계하던 마법사 한 명이 소리쳤다.

“저쪽에서 누군가 접근 중입니다!”

마법사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확실히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는 무리가 보였다.

처음엔 약탈자인가 싶었지만, 잘 제련된 금속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모습에선 문명의 흔적이 느껴졌다.

“병사들인 거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오는 방향으로 봐서는 아마 저희가 잡은 올빼미곰을 쫓아온 거 같습니다.”

옆에서 함께 보던 바즈칼이 맞장구를 쳤다.

누가 온다는 것만 알아차린 마법사와 달리, 기사의 눈으로는 상대를 더 세세하게 볼 수 있었다.

아마 기사일, 유난히 큰 체구인 사람 한 명. 그리고 그를 따르는 병사 일곱 명.

아르센 일행에게 있어 그리 위협적인 상대는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던 바즈칼이 물었다.

“어쩔까요?”

“기다리지. 어차피 이곳 영주는 마법사에게 크게 적대적이지도 않다고 했으니······.”

물론 그게 마법사를 환영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그냥 반갑지 않은 대상이니 어서 지나가라고 위협할 정도일 뿐.

그것만으로도 이 세계 기준으로는 ‘마법사에게 우호적인’ 영지로 여겨진다는 것은 익살로 받아들여야 할까.

어쨌든,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도망갈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러다가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잠시 후, 정체불명의 군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멈춰 섰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서 있던 기사가 나서서 소리쳤다.

그는 다리 여섯 개 달린 산양을 타고 있었다.

“나는 엑세키아 영지의 기사 키라트요! 외지인은 어서 정체를 밝히시오!”

“벨루안의 아르센입니다. 산맥 서쪽으로 가는 길입니다.”

위협하듯 크게 소리치는 기사를 향해, 아르센은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차피 기사의 청력이면 이 정도 거리에서 충분히 들릴 것을 짐작할 수 있는 탓이다.

조금 더 다가선 키라트가 옆에 선 마법사들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법사들이군.”

“맞습니다.”

“산맥 서쪽으로는 무슨 용무로 가려는 거요?”

“종교적인 이유입니다. 순례 중이죠.”

서로 신경전을 하듯이 쏘아보던 것도 잠시, 기사, 키라트가 기승수에서 내리더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사과하겠소. 벨루안의 아르센 경. 자신의 신앙을 충실히 따르는 이는 언제나 복되나니.”

“아닙니다.”

아르센 역시 진에서 내려 마주 고개 숙여 인사를 받았다.

덕분에 조금 전보다 분위기는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 상황에서, 기사가 다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실례지만, 엑세키아 영주님의 이름으로 그대 일행에게 검문을 실시해야 할 것 같소.”

“무슨 검문 말입니까?”

“혹시 약탈자가 있는지 말이오.”

그 말에 아르센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뒤를 보았다.

기사와 마법사가 합류한 무리에 약탈자라니, 현실성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기사는 약탈자가 될 경우 마인, 즉 마수와 뒤섞인 모습으로 변하기에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다.

당연히 정상적인 기사가 약탈자를 데리고 다닐 리 없고, 아르센의 일행에는 기사가 세 명이나 있었다.

“기사가 이끄는 무리에 약탈자가 있을까 검문하신다니, 솔직히 납득하기 힘든 말이군요.”

“이유가 있소.”

키라트는 침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얼마 전 인간과 비슷한 외형을 가진 마인이 약탈자들을 끌고 방랑 기사 흉내를 내며 인근 성채를 기습했다는 것이다.

그 외모가 어찌나 사람과 비슷한지, 가까이 다가가서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흡사했다고.

“우리 쪽에서 병사 한 명을 보낼 테니, 그에게 혀 밑을 한 번씩 보여주시기만 하면 되오. 어렵지 않은 일이잖소.”

“알겠습니다. 대신 저희도 한 명을 보내 검사하도록 해도 되겠습니까?”

“좋소.”

그렇게 아르센과 키라트는 서로 병사 한 명씩을 보내 상대의 혀 밑을 검사하게 했다.

엑세키아 쪽 병사가 마법사들을 검사할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긴 했지만, 그것 외에는 큰 문제 없이 검사가 진행됐다.

잠시 후, 서로의 진영으로 돌아간 두 병사는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상대 진영에 있는 이들은 모두 인간이라고.

긴장이 풀렸는지, 키라트는 조금 전보다 훨씬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례가 많았소, 아르센 경. 협조해주신 것에 감사드리오.”

“아닙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당연히 협조해야죠. 그럼 저희는 이만 길을 떠나도 되겠습니까?”

애초에 아르센은 이 영지에 머물 계획이 없었다.

엑세키아 영지의 종교에는 마법사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교리가 있어, 부정한 존재인 마법사가 자기 땅에 머무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탓이다.

그나마 마법사를 사냥해 죽일 정도로 강경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오래 머무를 곳은 아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서쪽으로 넘어간다고······.”

키라트는 조금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감이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산맥 서쪽으로 건너갈 수 없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근방에서 산맥을 넘을 수 있는 관문은 하나뿐인데, 지금 그곳은 몇 달째 약탈자 군주가 점령하고 있소. 이미 한 번 탈환을 시도했다가 실패했지.”

“약탈자 군주라면······?”

“마인이오. 뱀의 몸에 사람의 상반신을 하고 있는데, 어찌나 강한 놈인지 휘하에 다른 마인을 여럿 거느리고 있지. 악몽에서나 나올 법한 놈이오.”

그 말에 아르센은 옛날 만났던 마인을 떠올렸다.

보통 마인은 무리의 수장이 되기를 선호하지만, 무력의 차이가 압도적인 마인에게는 부하로 들어가기도 한다.

과거 그가 보았던 여우 마인 역시 나무뱀 마인을 부하로 두고 있지 않았던가.

하나도 아니고, 여러 마인을 거느릴 정도라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놈일 것이 분명했다.

군주라 불릴 정도니 말 다 한 것 아니겠는가.

“그놈이 산맥을 넘어가는 길목을 막고 있다는 겁니까?”

“길목을 막는 것은 물론, 시도 때도 없이 약탈자들을 부려 영지와 성채를 위협하고 있소. 아마 그 사람 비슷한 생김새를 한 마인도 그놈의 부하일 거요.”

키라트의 말에는 격렬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어쨌든, 그곳을 지나지 않고는 이 근방에 산맥을 넘을 수 있는 길 자체가 없소. 날개가 달려 하늘을 날지 않고서야. 저 북쪽에 있는 관문은 몇 달은 넘게 가야 할 거요.”

그렇게 말하더니, 기사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제안했다.

“수련이 얕지 않은 것으로 느껴지는데, 혹시 그놈의 토벌에 동참할 생각 있소? 지금 우리 영지는 범속한 병사 한 명조차 아쉬운 지경이오. 돕는다면 영주님께서 크게 보상하실 거요. 산맥을 넘어갈 수도 있게 될 것이고.”

아르센은 잠시 턱을 쓸며 고민하다 말했다.

“이 무리를 이끄는 게 저이긴 하지만, 동료들과 대화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따로 얘기할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시오.”

흔쾌히 허락한 키라트는 배려해주는 의미에서 아르센 일행과 거리를 벌렸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덕분에 그들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마룬 경, 산맥을 우회하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아십니까?”

“지도를 한번 봐야겠는데요.”

마룬은 부하 병사에게 지도를 받아 쭉 훑더니 말했다.

“여기에는 따로 길이 안 나오네요. 아마 남쪽으로는 못 넘어갈 거고, 북쪽으로는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습니다. 운이 좋으면 몇 주면 될 거고, 운이 나쁘면······몇 달일 수도 있고요.”

“저 기사의 말이 맞을 가능성이 높군요.”

“아마도요.”

아르센은 얼굴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말이 몇 달이지,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야 하는 것에다 가는 도중 다른 일이 생길 수도 있음을 고려하면 돌아가느라 1년쯤 더 늦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일단 저들의 영지로 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만, 마룬 경의 생각은 어떠신지?”

“저 친구들이 마법사까지 받아줄지······.”

“원래도 그냥 쫓아내는 정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병사 한 명이 아쉽다는데 마법사라고 쫓아내진 않겠죠. 안 받아준다고 하면 북쪽으로 우회하면 되고요.”

“으음······알겠습니다.”

마룬에게 동의를 받아낸 다시 키라트를 불렀다.

“일단 영지로 가서 영주님과 정식으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다만, 여기 마법사들은 저희 일행이라 동행해야 합니다. 마법사들까지 손님으로 받아주실 수 있습니까?”

“으음, 물론이오. 신성한 엑세키아 땅에 마법사가 머무는 것은 통탄할 일이지만······이런 상황에서까지 따질 수는 없으니. 그대들은 내 손님으로서 영주님을 뵙게 될 거요.”

망설임 없이 답하는 것으로 보아, 다급하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미 한 번 토벌이 실패하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거기다 이들의 교리 자체가 마법사를 죽이지 않고 쫓아내는 것에 그칠 정도로 온건한 것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럼 영지까지는 내가 앞장서겠소. 따라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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