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어둔숲 >
하늘을 나는 부엉이들의 기세는 매섭기 그지없었다.
몸통만 해도 사람과 비슷할 정도요, 펼쳐진 두 날개의 길이는 몇 미터에 달하는 크기이니 당연하다.
구부러진 발톱 끝은 송곳처럼 날카로워, 조금만 방심해도 목숨을 끊기 충분했다.
다행히, 누군가가 외친 탓에 그들의 존재를 알아챈 마법사들이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지팡이를 들고 번개를 쏘자, 날아오던 부엉이 몇 마리가 몸을 바르르 떨며 힘을 잃고 떨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하늘을 날며 이쪽을 노리고 있는 부엉이의 수는 많았다.
“마법사 옆에 방패 들고 붙어! 진형!”
리노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은 각각 자신이 담당하는 마법사의 옆에 붙어 방패를 들었다.
그들은 마법사에게서 전해져 오는 혐오감에 몸을 떨렸지만, 다급한 상황과 단련된 극기심으로 이를 이겨내며 적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으아아아!”
바즈칼이 거센 고함과 함께 기승수를 몰아 나무 마수에게 돌진했다. 큼지막한 대검을 휘두르자, 팔을 이루던 가지 하나가 큰 저항 없이 뭉텅 잘려 나갔다.
“형님! 이놈 생각보다 별거 아니······!”
자신감 있게 외치던 바즈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 전 그가 공격한 나무 마수가 한쪽 팔이 떨어지든 말든 개의치 않고 그대로 반대쪽 팔을 휘두른 탓이다.
다행히 바즈칼이 탄 호랑이가 능숙히 몸을 날려 피할 수 있었지만, 몇 미터짜리 팔이 휘둘러지며 일어나는 바람은 위협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놀랍게도, 잘려 나간 팔은 느릿하게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거나 받아라!”
마룬이 조금 전과 달리 기운차게 외치며 활을 쏘았다.
얼굴에 정확히 박히자마자 불꽃이 폭발하듯 솟구치자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경악해 외쳤다.
“잠깐!”
엘로이즈에게는 반쯤 농담으로 말한 것이지, 정말 여기서 불을 지를 생각은 없었다.
나가지 못하고 갇힌 채로 숲 전체가 타오른다면 함께 죽는 것밖에 더하겠는가.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나무 마수의 몸통에 붙은 불은 주변에 옮겨붙지도, 화려하게 타오르지도 않았다.
주위에 뿌려져 있던 어둠이 몰려와 불에 엉겨 붙더니, 마치 물을 끼얹은 것처럼 싱겁게 사라졌을 뿐이다.
“아니······.”
마룬이 경악하는 사이, 아눈이 기승수를 몰아 달리며 있는 힘껏 외쳤다.
“전신께서 나를 보신다-!”
분노와 흥분에 가득 찬 고함이 울려 퍼지고, 달려오던 기세를 그대로 실은 창이 나무 마수의 몸통을 꿰뚫고, 그 기세를 몰아 반쯤 박살 냈다.
주변에서 환호가 울려 퍼졌다.
“아눈 경이 나무를 부쉈다!”
아눈 역시 뿌듯하게 웃었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생물이라면 내장을 줄줄 쏟아내야 할 치명상임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난 전혀 다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듯 건재함을 증명하며 주위로 팔을 휘둘렀다.
심지어, 조금 전 바즈칼이 자른 팔도 거의 원상태로 복구되고 있었다.
그런 한편, 하늘에서 날아드는 부엉이에 맞서는 싸움 역시 그리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았다.
부엉이들은 탁월한 본능으로 자기들이 기사나 방패를 든 병사에게는 별 피해를 줄 수 없음을 간파했고, 비교적 공격하기 쉬운 마법사들을 노렸다.
그중에서도 로브를 입은, 그리고 부엉이들을 가장 많이 학살하고 있는 엘로이즈가 최우선 타깃이었다.
“아가씨를 지켜라!”
천둥의 신이라도 되는 듯, 양손에서 벼락을 뿜어내며 부엉이를 몰살시키는 엘로이즈. 그런 그녀를 지키기 위해 아르센과 마룬, 병사 두 명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병사 한 명에게 보호받는 다른 마법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철저한 호위였지만 이것으로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수의 부엉이들이 그녀를 노렸다.
위에서,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이제 마룬은 활을 집어넣고 할버드를 휘둘렀다. 여전히 어설픈 솜씨였지만, 그마저도 어지간한 병사보다는 나았다.
[마력은 괜찮겠어?]
[아직은!]
다급한 탓인지 짧게 대답하며, 엘로이즈가 다시 한번 벼락을 뿌렸다.
다른 마법사들이 한 마리씩 격추하는 것과 달리, 대여섯 마리가 넘는 부엉이가 몸을 눕혔다.
그 옆에서 아르센은 한 손으로 검을 휘두르는 한편, 다른 손에 든 방패를 휘둘러 부엉이 하나를 해치웠다.
다른 기사보다 월등히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닌 그였지만 결국 땅을 밟은 상태에서 공격 가능한 거리는 팔 길이에 무기를 합친 것이 고작이라, 하늘에서 날아드는 수십 마리의 부엉이를 상대로는 이런 소극적인 방어전밖에 수행할 수 없었다.
그때, 어딘가에서 희열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해치웠다! 이 개 같은 새끼!”
바즈칼의 득의양양한 목소리에 살짝 시선을 돌리니 일어났던 나무 마수 하나가 마침내 온몸이 박살 난 채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예 몸통만 서너 개로 조각을 냈으며 두 팔 역시 널브러져 있는 모양새는 누가 봐도 시체나 다름없었다.
기쁨도 잠시, 병사 한 명이 외쳤다.
“또 일어난다!”
그의 말대로, 반쯤 썩어 널브러져 있던 두 번째 나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분노하는 얼굴이 아니라 눈꼬리가 축 처져 우울해하는 얼굴이었는데, 그 크기는 첫 번째 나무보다도 컸다.
이어서 세 번째, 웃는 얼굴의 나무.
네 번째, 찡그린 얼굴의 나무.
다섯 번째, 무표정한 나무가 일어섰다.
“이게 대체 뭐야!?”
어떤 병사의 절망 어린 탄식이 들려왔다.
이제 네 마리가 된 나무 마수들은 부엉이의 공격을 피하고자 똘똘 뭉친 병사들의 진형을 향해 걸어왔다.
그 속도는 보통 사람이 달리면 충분히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느렸지만, 사방을 틀어막은 방패벽 진형을 유지한 채 피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대로면 나무 마수의 공격에 진형을 짠 병사들이 통째로 뭉개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진형을 무너트려라! 2인 1조로!”
아르센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은 각자 자신이 담당하는 마법사와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2인 1조로 나뉜 덕분에 기동성은 훨씬 올라갔지만, 그만큼 부엉이들의 공격에는 훨씬 취약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엉이의 공격에 당하는 병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크악!”
병사 한 명이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엑세키아에서 만들어진 전신 금속 갑주를 입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날카로운 발톱 공격을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보호받던 마법사가 재빨리 번개 공격을 가해 부엉이를 물리쳤지만, 그런다고 죽은 병사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조합이······.’
나무 마수들만 나오던가, 부엉이들만 나왔다면 상대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전자는 흩어져서 차분히 공격을 피하면서 박살 내면 되고, 후자는 철저히 방진을 짜고 틀어박힌 채 마법 공격으로 해치우면 되니까.
하지만 방진을 짜면 걸어 다니는 나무가 무너트리고, 흩어지면 부엉이들이 사방에서 습격했다.
“뒈져! 뒈지라고!”
“오-오오오오-! 신들의 땅으로!”
바즈칼과 아눈이 각각 나무 마수 한 놈을 맡아 분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둘은 자유롭게 주위를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위협했다.
지금 막 마법사 한 명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나무 마수의 손에 얻어맞아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허리가 기괴하게 꺾인 것이, 누가 봐도 즉사였다.
지금까지 병사 두 명, 마법사 세 명이 죽음을 맞이했다.
“마룬 경, 부탁합니다!”
“네, 네?”
간단히 한 마디 남긴 후, 아르센은 엘로이즈를 보호하는 위치에서 벗어나 눈앞의 나무 마수를 향해 돌진했다.
나무 마수 역시 진에 타고 있는 아르센을 위협으로 느꼈는지, 몸을 휙 돌리더니 긴 팔을 쭉 뻗었다.
느려 터졌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움직임. 아르센은 혀를 깨물지 않도록 이를 꽉 악문 채, 진을 조종해 다가오는 마수의 팔을 밟아 도약하며 하늘을 날듯 움직였다.
그렇게 어깨라고 할 만한 부분을 지나치며, 마력을 실은 검을 가로로 휘두른 뒤 반대편에 착지했다.
두꺼운 몸통 부분은 절반 가까이 갈라져 있었다.
‘좋아, 한 번 더!’
그때, 나무의 입이라고 할 만한 뻥 뚫린 구멍이 일그러지더니 소리 없는 포효를 토해냈다. 정확히는, 그 음역이 너무 높아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르센은 착지와 동시에 몸을 돌려 다시 한번 도약했다.
다시 검을 들어 조금 전 갈라진 부분을 다시 베려던 순간, 눈앞에 무언가가 덮쳐오는 것이 보였다.
“큭!”
아르센을 향해 날아든 것은 부엉이였다.
제 목숨 따윈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서너 마리가 동시에 날아들어 아르센의 얼굴을 덮쳤다.
대놓고 덤벼드는 부엉이 따위는 가볍게 베어 버릴 수 있지만 날아든 물체의 무게 자체는 무시할 수 없어, 결국 아르센은 공격을 포기하고 거리를 벌렸다.
그때, 사방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부엉이가 아르센을 노리고 날아들기 시작했다.
다른 병사나 마법사를 노리던 부엉이들 모두가 아르센을 대상으로 잡은 것이다.
“형님!”
“대장님!”
부하들의 목소리조차 날갯짓 소리에 묻혀버릴 정도로, 몰려드는 회색 물결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아무리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다지만, 이렇게 많은 부엉이에게 일제히 공격당한다면 무사할 수 없었다.
가속도가 실린 발톱에 수십, 수백 번을 찍힌다면, 아무리 흑성철 갑옷이라도 버틸 수 없을 테니.
절체절명의 위기. 아르센은 사고속도를 끌어올렸다.
“흐읍-!”
우선 폭발적인 운동 능력을 발휘하고자, 숨을 한가득 빨아들이는 것으로 전신에 산소를 공급했다.
극한까지 가속된 날카로운 사고를 통해 날아오는 부엉이의 속도를 파악, 순서를 배정했으며, 그에 맞춰 기계적으로 검과 방패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부엉이들은 검과 방패에 얻어맞을 때마다 반으로 잘리거나 날아온 속도 이상으로 튕겨 나갔다.
타고 있는 진의 앞발과 꼬리까지 이용해가며 사방에서 날아오는 부엉이를 견제하고 쳐내고 베었다.
그렇게 이십에서 삼십 마리가 넘었던가, 그쯤부터는 숫자조차 헤아리지 않고 그저 무아지경에 빠져 무기를 휘둘렀다.
잠시 후, 아르센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공격이 끝난 뒤였다.
고작 수십 초간 무기를 휘둘렀을 뿐임에도, 한계 이상의 운동 능력을 발휘한 탓인지 팔이 뻐근해지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주위에는 수십 마리인지 수백 마리인지 모를 부엉이 사체만이 널려있을 뿐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저 많은 부엉이를?”
경악과 찬사가 섞인 탄성이 터져 나오는 것을 들었지만, 그것이 아르센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지는 않았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부엉이를 쳐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 몇 개의 공격을 허용한 탓이다. 갑옷 여기저기가 패여 있는 것은 물론, 살이 뜯겨 나간 부분도 있었다.
부엉이의 피 때문에 티는 나지 않았지만.
그때, 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왔구나.
나이도 성별도 가늠하기 힘든 목소리. 심지어 어디서 들려왔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바로 앞인 것 같기도 하고, 저 먼 어딘가인 것 같기도 했다.
“누구냐? 비겁하게 숨어있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라!”
아눈이 악에 받쳐 소리 질렀지만,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이을 뿐이었다.
-적어도 괴롭지 않게 재워주마.
그 말과 함께, 놀랍게도 나무 마수와 올빼미가 사라졌다.
마치 그림자가 햇빛을 받아 사라지듯, 널브러져 있던 깃털과 시체, 나뭇가지조차 남지 않았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이번에는 녹색 연기구름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신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님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바람!”
그때, 마룬이 큰소리로 외치는 것과 함께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유적에서 얻은 충격파 지팡이였다.
그것을 사용하자, 굉음과 함께 다가오던 연기구름이 확 흩어지며 뒤로 밀려났다.
그걸 보고 아르센은 마룬이 하려던 말을 알아챘다.
“마법사! 바람 주문으로 밀어내라!”
그제야 판단력을 되찾은 마법사들은 일제히 왼팔을 내밀어, 유물 팔찌를 통해 바람을 일으키는 주문을 시전했다.
엘로이즈 역시 이에 동참했다. 마법사 중 바람 주문을 구사할 수 있는 이에게 배운 적이 있기에, 바람을 일으키는 수준의 주문이라면 그녀 역시 쓸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마법사에 비해 뛰어난 마력을 가진 만큼, 엘로이즈가 연기구름을 밀어내는 양 역시 압도적이었다.
막대한 양의 연기구름이 누구에 의해 막히고 있는가를 간파했는지,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엘로이즈를 지목했다.
-꽤 쓸만한 실력이구나, 어린 마법사 계집애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땅속에서 나무 하나가 불쑥 솟아오르더니 엘로이즈를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어마어마한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꺄아악!”
“엘리!”
“아가씨!”
옆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기도 전, 엘로이즈는 순식간에 나무에 붙들려 십여 미터 위로 끌려 올라갔다.
나무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녀를 향해,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선고했다.
-너부터 보내주마. 잘 가거라.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나무는 엘로이즈를 움켜쥔 그대로 힘을 주었다. 그 여린 몸을 완전히 으스러트리고자.
소녀가 고깃덩어리가 되는 모습을 떠올린 몇몇은, 차마 이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그들은 남들보다 빨리 볼 수 있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숨을 고르는 엘로이즈의 모습을.
“하아, 하······.”
엘로이즈의 오른손에는 부러진 막대기 하나가 들려 있었다.
손바닥 정도 되는 짧은 길이에, 끝부분은 동그랗게 말려있고 푸른 수정이 박혀 있는 막대기.
루덴에게 받은 일회용 순간이동 유물이었다.
나무의 손아귀에서 온몸이 으스러지기 직전, 땅을 향해 순간이동한 것이다.
아르센은 재빨리 엘로이즈를 향해 진을 몰아, 그녀를 낚아채듯 들어 올린 뒤 품에 끌어안았다.
“괜찮아?”
“응, 안 다쳤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절망적일 정도로 강한 적.
방패를 든 손으로 엘로이즈를 감싸 보호한 채, 아르센은 정신을 집중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엇이 나타나든 베어버리겠다는 각오로.
그런 그를 향해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랍게도, 그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감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실려 있었다.
-조금 전 그건······아냐, 하지만······완전히 똑같아. 그 수정까지도.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
이에 대꾸하기도 전, 질문이 들려왔다.
-지금 사용한 그 유물, 어떻게 얻었지? 그것을 만든 자와는 무슨 관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