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이레 유적 (2) >
“뭐 이렇게 싱거워?”
유적 안을 걷던 중, 바즈칼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유적 공략은 정말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됐다.
전체가 묘한 색의 수정으로 만들어진, 온갖 함정이 잠든 통로와 방은 그 이빨을 드러내지 않은 채 아르센 일행의 진입을 허용했다.
그런 바즈칼의 투덜거림에, 옆에서 진을 몰던 마룬이 놀리듯이 말했다.
“시시하시다면 혼자 먼저 가보시는 건 어떠신지?”
“됐수, 사람을 죽이려고 그러네 아주.”
두 사람이 뭐라고 떠들건, 아르센은 묵묵히 대열의 정 중앙에 서서 앞과 뒤의 간격을 확인했다.
이미 함정은 꺼 두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던 탓이다.
가능하면 함정이 꺼진 사실을 누군가 알게 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고.
조금 더 전진해서 좁은 통로 구간으로 진입했을 때, 병사 하나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봐, 저거 설마.”
“아무래도······아니, 말하지 말지. 기분만 나빠질 것 같아.”
병사 둘의 잡담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고, 아르센의 시선 역시 이끌었다.
병사가 가리킨 곳은 통로의 출구 바로 옆에 있는 벽이었는데, 그곳에는 검붉은 색에 하얀 무언가가 섞인 덩어리가 얼룩처럼 붙어 있었다.
그 정체가 무엇일지를 생각해 보면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몇몇 병사들의 얼굴이 역겨움으로 굳는 가운데, 아르센은 그 흔적의 일부가 바닥에 늘어져 있음을 보았다.
흔적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예상대로 반대쪽 벽에도 비슷한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압사 함정이랬나······.’
이 유적의 함정은 가볍게는 불이나 벼락을 뿜는 것부터 갑자기 방 전체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 벽에서 창이나 도끼날이 튀어나오는 등의 물리적인 공격까지 존재했다.
조금 전 그 시체의 상태를 보니, 이 방의 함정은 벽 전체가 밀어닥쳐 몸을 으스러트리는 종류였던 모양이었다.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통해, 이곳은 아직 ‘청소’의 주기가 채 되지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말로는 들었지만 직접 보니까 더 살벌하네······.]
[그러게. 여기를 강제로 돌파했다면 몇 명이 죽었을까.]
귀걸이를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만약 이 압사 함정이 작동했다면?
혼자라면 모를까, 많은 수의 일행이 있는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대열 중앙에 있는 아르센 역시 벽을 칠하는 물감 중 하나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빠르고 강하다고 해도, 앞이나 뒤에 있는 동료들을 밀치면서 나가려면 시간이 지체됐을 테니까.
아마 순간이동 유물을 가진 엘로이즈 정도나 살아나갈 수 있었으리라.
더 나아가 넓은 방에 도착하자, 조금 전 얼룩의 동료로 추정되는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언가에 목 위가 불타 버린 시체, 가슴 갑옷이 바위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으스러진 시체, 몸이 사선으로 잘려 나간 시체까지.
세 구의 시체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중 머리가 불타 죽은 시체는 기사였다.
그리고 그들과 살짝 떨어진 곳에 두 다리가 없는 시체가 누워 있었는데, 한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고 목에서부터 검붉은 얼룩이 바닥을 적신 것으로 보아, 다른 이들과 달리 스스로 목을 그어 죽은 모양이었다.
체격과 복장으로 그 역시 기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바즈칼이 허탈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기사들이 이런 곳에서 이리 허무하게······.”
그때, 아르센은 시체의 가슴 위에 수첩 하나가 올려져 있음을 간파했다.
즉시 리노에게 수첩을 가져올 것을 지시하자, 리노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대장님!”
힘차게 대답한 리노가 재빨리 기승수를 몰아 시체에 올려져 있던 수첩을 아르센에게 가져왔다.
수피지를 정교하게 잘라내어 만든 작은 수첩.
그 안에 빽빽하게 적힌 글자는, 그들 발굴대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들은 ‘황금 추적자’라는 발굴대로, 세 명의 기사와 여러 재주를 가진 길잡이 한 명, 마법사 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리더인 길잡이는 여러 기지와 재주를 발휘하여 유적을 돌파했고, 덕분에 그들은 누구도 돌파하지 못한 유적 심층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감탄하던 중, 문제가 생겼다.
앞장서서 함정을 간파하고 진로를 잡던 베테랑 길잡이가, 예상치 못한 함정에 걸려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그를 호위해야 하는 기사, 이 글을 쓴 글쓴이의 실책이 원인이었다.
한탄도 잠시, 결국 후퇴를 결심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길잡이를 제외한 다른 일행은 함정을 간파하는 능력은 고사하고, 왔던 길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야 할 길조차 헷갈리는 상황. 그런데도 그들은 죽은 길잡이의 시체를, 그리고 나가던 중 두 번째로 목숨을 잃은 마법사의 시체를 가지고 나가려고 했다.
그들의 우애는 형제보다 깊은 것이었기에.
하지만 생존자가 사망자보다 적어지게 되었을 때, 살아남은 두 기사는 동료의 시체를 포기하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두 사람이 세 구의 시체를 건사할 수는 없었던 탓이다.
그들은 동료의 시체를 가지런히 정리하여 예의를 다하고, 자기들끼리라도 탈출하기로 했다.
불행하게도, 놓고 간 동료들의 원한이 발목을 붙잡기라도 한 것인지 다음 통로는 가장 치명적인 함정 중 하나인 압사 함정이었다.
몸이 날랬던 글쓴이는 다리를 잃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다른 한 명은 벽의 얼룩이 되었다.
그 시점에서, 살아남은 기사에게 희망은 없었다.
부축하거나 업어줄 동료도 없이, 다리를 잃은 자가 혼자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렇게 깊은 곳까지 누군가가 도와주러 올 가능성은 생각하기도 힘들뿐더러, 깊이 들어온 발굴대가 다리 없는 기사라는 짐을 떠맡아줄 가능성 역시 낮았다.
백번 양보해서 설령 나간다고 해도, 두 다리가 없는 상태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동료들을 모두 잃고 혼자 고향에 돌아가서, 그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여기까지군.”
수첩을 낭독한 후, 아르센은 가만히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결국,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기사는 동료들의 시체 옆에 힘없이 드러누웠을 것이다.
그를 비웃듯 영롱한 빛을 흩뿌리는 천장 아래에서, 그 빛에 의지해 이 수첩을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스로 목을 그었을 것이고.
마지막 순간, 이 기사는 무슨 생각을 하며 목을 그었을까. 이 유적에 들어온 것에 대한 후회? 편해질 수 있다는 안도? 절망?
그때, 리노가 중얼거렸다.
“대장님과 함께 오지 않았다면, 우리도 저 꼴이 됐을 거라는 거군요······.”
그 말이 침묵 속에서 울려 퍼지는 가운데,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 침묵이 깨진 것은, 아르센의 지시가 떨어졌을 때였다.
“일단, 저들의 유품부터 모두 수습하도록.”
시체에서 멀쩡한 물품과 유품을 수습한 뒤, 엘로이즈가 불꽃으로 그들의 시체를 화장(火葬)했다.
죽은 자의 유품을 챙기는 만큼, 이 정도 예는 지키는 것이 도리였다.
유물 갑옷 하나는 바즈칼의 몫이 됐는데, 아르센의 갑옷에 비하면 좀 품질이 떨어져도 사이즈 맞춤과 자동 착용 기능이 있는 시점에서 나쁘지 않은 물건이었다.
이후, 유적을 가로지르며 잡담을 나누는 이는 없었다.
대열의 맨 앞과 뒤에 있는 인원들은 거의 신경질적일 정도로 아르센의 위치를 확인했으며, 때때로 서로의 기승수가 발을 밟을 정도로 바짝 밀착했다.
그런 긴장과 침묵을 견디지 못했는지, 바즈칼이 조금 과장된 목소리로 아르센에게 물었다.
“그런데 형님, 기사 하나는 머리가 불타 죽었잖습니까.”
“그렇지.”
아르센 역시 이런 분위기의 침묵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기에, 그치고는 꽤 적극적으로 말을 받았다.
그 느낌을 읽었는지 바즈칼의 목소리에서 조금 더 자신감이 묻어났다.
“유적의 함정은 기사의 항마력까지 뚫는 겁니까? 보통 마법의 불 따위로는 기사를 해칠 수 없잖습니까.”
바즈칼 역시 마법사를 상대하는 훈련을 몇 번 했기에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일행 중 가장 강력한 마법사인 엘로이즈의 불꽃조차, 그냥 갑옷 잘 입고 눈만 좀 가늘게 뜨면 몸으로 받아낼 수 있는 것이 기사라는 족속이라는 것을.
아르센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일전에 라수르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설명해 주었다.
본래 기사가 가진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란 워낙 굉장해서, 일반적인 마법으로는 그 육신에 해를 입히기 쉽지 않다.
일시적으로 환영을 보이거나, 마비시키거나, 상처를 주는 정도는 가능하지만, 몇 가지 방법을 제외하면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예외 중 하나가 바로 고대 유적의 마법이었다.
유적의 불길은 때론 유물로 된 갑옷의 항마력과 기사의 항마력을 모두 뚫고 그 육신을 태우며, 지옥 같은 냉기 역시 항마력을 뚫고 몸을 얼어붙게 한다.
그 원리는 불명이지만, 유물 방어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물건들만이 유적의 마법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니까 유적에서 불같은 게 나오면 우습게 보지 말고 피해. 마법사를 상대하는 기분으로 받아내려고 했다가는 그대로 죽을 테니까.”
“에이, 어차피 형님이랑 같이 다니면 함정 뒤집어쓸 일도 없잖습니까.”
바즈칼의 태평한 말에, 아르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걷기를 한참, 마침내 그들은 처음 열었던 것과 비슷한 형식의 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대열 중간에 있던 아르센은 앞에 있는 인원들에게 좌우로 물러날 것을 명한 후, 문에 다가가 손을 얹었다.
“문을 열어라.”
익숙한 유적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 *
이레 유적에서 수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 이덴의 라슈카는 주위에 몰려든 동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모두 모였나?”
기사 열두 명, 전사 서른세 명, 마법사가 다섯 명이나 속한 대규모 무리.
어지간한 발굴단을 상회하는 크기였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큰 체격을 가진, 자신을 ‘망치꾼 모루’라 부르는 기사가 빈정거리며 답했다.
“다 모였지. 세 보라고, 산수를 할 줄 안다면 말이지.”
노골적인 시비에 내심 화가 치밀었지만, 라슈카는 그런 티를 내지 않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기분이 별로 안 좋은가 보군, 모루?”
“당연하지. 바쁘다고 말했잖아. 정말 큰 건인 건 맞겠지? 실망하게 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
“아무렴. 내가 언제 자네를 실망하게 한 적 있나?”
라슈카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모루를 달랬다.
그 모습은 옆에서 보기에는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보여 퍽 우스웠지만, 모루는 그 태도에 내심 만족한 표정이었다.
히죽 웃는 얼굴을 보며 라슈카는 굴욕감에 이를 악물었다.
‘어디 두고 보자, 덩치만 큰 놈이.’
화나는 일이지만, 망치꾼 모루는 그보다 훨씬 강력한 기사였으며 그의 발굴단 역시 강력했다.
체격부터 마력, 무엇 하나 빠짐없는 강자이며 의동생이랍시고 그를 따르는 기사도 세 명이나 있었으니.
그때, 쉰 살도 넘어 보이는 나이 든 기사가 말했다.
“어디 무슨 일인지 들어나 보세. 자네가 보안이 생명이라고 해서 정확히 무슨 일인지 듣지도 못했어.”
그 말대로, 라슈카는 ‘큰 이득을 얻을 기회다’라는 말로 평소 교류하던 몇몇 발굴대를 여기까지 불러냈다.
보통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만, 라슈카의 부름에 응한 이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부류라는 것.
그들은 ‘보안이 생명’인 이유가 당연히 도덕적이지 않은 약탈 계획임을 짐작했고, 또한 그런 만큼 쉽게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라슈카는 이미 몇 번이고 이들을 만족시킨 전례가 있었기에, 이들을 불러내고 지휘할 수 있었다.
대장으로 대우받지는 못했지만.
“목 꺾는 아르센. 이름은 들어 봤나?”
“들었네. 포효하는 자나크의 목을 부러트려 죽였다지.”
“과장 아냐? 자나크가 그런 애송이에게 맨손으로 죽다니, 기껏해야 운이 좋아 꺾었겠지.”
모루의 말에 라슈카가 옳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좀 과장이 있긴 하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그 아르센이 자나크가 쓰던 유물을 모두 가져갔다는 거야. 바람 도끼와 방호 갑주, 유명하잖나.”
그 말에, 모루가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저 멀리 떨어져 보이지도 않는, 이레 유적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서, 그놈이 저 안에 있다고?”
“그렇지. 이 친구가 확실하게 들어가는 걸 확인했어.”
라슈카가 자신의 부하 기사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그의 부하는 기사치고 무용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시야에 관련된 특기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그들은 절대 포착되지 않을 먼 곳에서 아르센 일행이 들어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유적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략에 실패하고 나오는 놈들을 기습하면 돼. 식량은 다들 넉넉하게 가져왔겠지?”
“물론이지.”
고개를 끄덕이는 기사들. 그때, 늙은 기사가 물었다.
“놈들이 저 안에서 죽으면 어떻게 하나? 그렇게 되면 지금 이게 모두 헛일이 되는 거 아닌가.”
몇몇 기사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라슈카를 돌아보았다.
그가 당연히 해결책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듯이.
“그놈, 새벽 발굴단의 부단장과 친한 사이라더군. 알잖아? 그놈들이 얼마나 신중한지.”
“음.”
그 말대로, 새벽 발굴단은 발굴대 사이에서도 신중함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공략 불가능한 유적을 주로 목표로 하는 이들인 만큼, 그들은 인명 피해에 극히 예민했으며 유적 자체를 차근차근 분석해서 돌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놈들이 전멸할 때까지 들어갈 리 없지. 심지어 놈들은 진도 두 개나 가지고 있어. 상급 유물에 진까지. 거기다 그놈들은 일반 전사까지 모두 유물을 쓰더라고. 그 정도면 여기 있는 동지들이 모두 나눠도 충분하지 않겠어?”
설득이 통했는지, 기사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때, 늙은 기사가 물었다.
“그런데 놈들이 여길 발굴하러 온다는 정보는 어디서 얻었나?”
“에이, 알 만한 사람들끼리 뭘 그런 걸 물어보나.”
라슈카는 그렇게 답하며 얼버무렸다.
그냥 물어본 것이었는지 늙은 기사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에 라슈카는 하얗게 웃으며 선언했다.
“자, 가자. 놈들을 털러!”
잠시 후, 그들은 이레 유적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가장 뒷줄에 선 라슈카는 직접 아르센 일행의 석판을 부순 뒤, 모루의 이름이 적힌 석판을 올려놓았다.
행여나 접근할 방해꾼을 막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