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깨어남 >
서쪽으로, 또 서쪽으로.
그들은 사막을 벗어나, 영지 두 개를 지났다.
안타깝게도, 그리 유쾌한 여정은 아니었다.
그들이 지난 영지 두 곳 모두 마법사들에게 친절하지 않은 곳이라, 영주들은 침입자를 격퇴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보냈다.
영지의 군대가 가져온 장비는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제압하기 위한 것이라 그 의도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마법사를 잡아다 써먹겠다는 뜻이었으리라.
몇 차례 충돌이 있었고, 모두 아르센 일행의 승리로 끝났다.
기사 몇 명을 더 많이 배치하면 된다는 영주들의 믿음은 아르센의 탁월한 무력과 마법사들의 화력 지원, 그리고 풍부한 유물을 사용한 공격에 무너졌다.
당연히 영지나 성채에서 머물 수는 없었다.
성채의 주민들을 모조리 몰살시키지 않고서야 어떻게 안심하고 그 안에서 자겠는가. 그렇다고 쉬기 위해 그들을 몰살시키는 것도 못할 일이었고.
지금도, 그들은 영주가 보낸 군대를 격퇴한 뒤 숲속에 몰래 야영지를 꾸리고 있었다.
“아오, 피곤해 죽겠네. 요즘 몇 번이나 싸우는지.”
바즈칼이 그렇게 말하며 뻐근한 듯 어깨를 돌렸다.
그 어깨는 오늘 낮 싸움에서 한 번 잘린 적이 있었다.
한번 잘리고 나면 남는 그 이물감을, 아르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싸우면서 실력이 늘지 않습니까. 썩 나쁜 일이라고만 할 순 없죠.”
아눈이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그 역시 오늘 싸움에서 눈 한쪽을 잃는 상처를 입었다.
다행히, 빠르게 치유 주문을 받은 덕에 시력을 회복할 수는 있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 외에 다른 병사들이나 마법사들 역시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이곳 영주의 기사들은 그 수가 많았으며, 실력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기에.
아르센이 무려 기사 네 명을 죽이는 위용을 보인 덕에 격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죽은 이가 없는 것이 기적일 지경이었다.
실제로, 병사 중 한 명은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센은 고개를 저으며 싸움에 지친 동료들을 위로했다.
“아마 더 덤비지는 않을 거다. 처음 보냈던 기사 세 명에, 오늘은 기사 다섯 명이 죽었으니······그 정도면 영주로서도 큰 타격이지. 이대로 우리가 지나가게 둘 가능성이 커.”
“아쉬운 일이죠.”
아눈이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치열한 싸움과 부상에도 즐거워 보이는 얼굴. 좋은 동료이기는 하지만, 아르센은 도저히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세계에서 기사로 살아가며 많은 싸움을 겪었지만, 싸움이 즐겁다고 느껴본 적 따위는 없었던 탓이다.
아주 잠깐, 이기고 살아남았다는 희열은 있을지언정 무기로 상대의 살점을 가르고 숨을 끊는 일은 언제나 불쾌했다.
“아눈 경은 전투가 재밌습니까?”
“물론이죠!”
유쾌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단호한 대답에, 아르센은 잠시 망설이다 다시 물었다.
“엘타 사람들은 다 그렇습니까?”
그의 고향이 그런 곳이었기에, 전쟁신을 섬기기에 그럴 수 있는 거냐는 물음에 아눈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쪽에서도 그리 일반적인 정서는 아닙니다. 엘타에도 싸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많거든요.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겁쟁이 취급받으니 다들 그렇지 않은 척 내색하긴 하지만요.”
아눈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발치의 돌을 툭 찼다.
“제 가장 친한 전우 중 하나는 매일 밤 꿈속에서 자기가 죽인 사람들이 나온다더군요. 다른 영지 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 약탈자들까지. 하지만 전사니까, 싸우지 않으면 동료들이 죽으니까 싸운다고 했죠. 그 친구는 정작 싸울 때는 누구보다 용감했습니다. 군주와 싸우다가 죽은 친구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은 먼저 전신의 전당에 가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아눈의 표정은 퍽 쓸쓸해 보였다.
“뭐, 전신께서 누구를 더 눈여겨보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싸우고 싶어서 싸우는 것보다 싸우기 싫은데도 의무이기에 싸우는 게 더 고결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하기 싫은 걸 하는 건 아무나 못 하잖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평소의 그와 달리, 퍽 현학적인 발언이었다.
그때,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바즈칼이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 어려운 말씀들 나누는 건 좋은데, 일단 눈부터 붙이셔야죠. 벌써 밤이 늦었슴다. 내일도 행군해야 하는데.”
“그렇긴 하네요. 불침번도 서야 하고.”
불을 피우지 않으니 일반 병사는 누군가 침입해도 알 길이 없어, 기사 여럿이 불침번을 서야 했다. 한 명은 야영지를 지키고, 한 명은 진을 타고 주위를 순찰하며 접근하는 상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첫 번째는 아르센과 리노였다.
“그럼 먼저 자라, 이따 교대할 때 깨워줄 테니.”
“안녕히 주무십쇼.”
“고생 많으십니다, 대장님.”
바즈칼과 아눈이 천막으로 사라지자, 아르센은 진에 탄 채 야영지 중앙에 있는 바위 위로 올라갔다.
야영지 주위를 한눈에 훑어볼 수 있는 위치였다.
리노가 그런 아르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먼저 다녀오겠습니다, 대장님.”
“그래.”
리노가 진을 타고 야영지를 나서, 아르센은 혼자가 되었다.
어두운 밤, 달조차 없어 일반인이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칠흑 같은 어둠 속.
하지만 아르센의 눈은 기이하게 빛나며 많은 것을 보았다.
한참 그 잎을 열심히 피워 올린 나무들, 여름 밤바람에 흔들리는 들꽃들, 그 사이, 마수들이 잠든 시간을 즐기는 야행성 동물들까지.
올빼미 우는 소리가 적막한 숲속을 채웠다.
‘어둔숲이 생각나는군.’
그 거대 올빼미 떼의 습격은 농담으로도 좋은 추억이 아니었지만, 결국 안에서 지냈을 때는 나쁘지 않았다.
음식도 맛있었고.
아르센은 언젠가 다시 그곳에 돌아간다면, 그곳의 요리를 한 번 더 먹고 싶었다. 이제는 맛이 기억나지 않는 요리를.
아르센은 졸지 않고자 온갖 잡생각을 떠올리며 청각에 신경을 집중했다.
무언가가 접근한다면 바로 감지할 수 있도록.
그때, 그 청각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디야, 어디야, 여긴 어디야? 어두워 죽겠네. 누구 없어요? 저기요?]
젊은 남자의 목소리.
아르센은 그 위치를 찾으려다, 그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그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기에.
마치 엘로이즈가 귀걸이를 통해 말을 걸 때와 비슷한 현상이라, 순간 엘로이즈가 다른 사람에게 귀걸이를 뺏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엘리?]
[응? 왜?]
곧바로 들려오는 대답. 그 목소리도 어조도 분명히 엘로이즈의 그것이었다.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 안 잤어?]
[잠이 잘 안 와서, 무슨 일이야?]
[아니, 그냥 잘 있나 해서. 빨리 자. 몸 상할라.]
[나 참, 싱겁게.]
그렇게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조금 즐거워하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비록 여자들이 사용하는 천막 안에 있어 그녀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웃고 있을 거라는, 그런 생각이 드는 목소리였다.
대화를 마친 뒤에도 남자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소리는 계속 커졌으며, 빈도 역시 잦아지고 있었다.
이제 그는 거의 징징거리고 있었다. 듣기 괴로울 정도로.
‘내가 죽인 사람들의 목소리라도 들리는 건가?’
조금 전 아눈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지만, 아르센은 자신이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나 모든 감각이 선명한데, 오직 청각만 이상한 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고.
[교수님! 실험 끝난 거 맞나요? 이제 내보내 주세요! 교수님! 어디 계세요!]
그때, 아르센은 문득 소리가 어디서 들리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부르르 떨리는 것 같은, 엄청나게 작은 소리가 그의 귀를 자극했다.
자고 있는 다른 이들의 코골이나 숨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히 들렸다.
아르센은 그대로 바위에서 뛰어내린 뒤 자신의 침낭 옆으로 가서, 공간 확장 배낭을 꺼냈다.
“이건가?”
[어? 방금 목소리 들렸는데, 저기요! 여기, 저 좀 꺼내주세요!]
아르센은 배낭을 개방하여 잡동사니 칸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부르르 떨리는 붉은 구슬이 보였다.
유적에서 찾아온, 아마 고대인의 유품으로 보였던 물건.
그것이 왜 빛을 내고 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함께 두었던 마수의 마력핵이, 자줏빛으로 빛나던 그것이 빛을 잃고 돌멩이처럼 되어 있었다.
아마 마력핵의 마력을 모두 빨아들여 활성화된 모양이었다.
“너냐?”
아르센의 질문에, 구슬이 떨며 대답했다.
[어? 맞아요! 저 좀 꺼내 주세요!]
아르센은 잠시 이 정체불명의 구슬을 만져도 좋을지, 그냥 무기를 들어 으깨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닐지 고민했다.
막말로, 이 안에 담긴 영혼 같은 무언가가 닿는 사람의 육체를 뺏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물며 상대가 마법에 능한 고대인이라면 더더욱.
잠시 고민한 뒤, 아르센은 투창기를 이용해 조심스럽게 구슬을 긁어내듯이 배낭에서 꺼냈다.
구슬이 바닥을 구르며, 그 안의 목소리도 비명을 질렀다.
[어지러워 죽겠네! 뭐 하는 거야 지금?! 살살 좀 다뤄! 안에 사람 있는 거 몰라?]
조금 전까지의 그 비굴하기까지 한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목소리는 격하게 화를 냈다.
정말 감탄스러울 정도의 태세 전환이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에서. 적이 아니라면 리노일 터.
아르센은 배낭에 있던 커다란 수건 하나를 꺼내 구슬을 감싸 들어 올렸다.
구슬 안의 목소리가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투덜댔지만, 이를 흘려 들으며 그대로 구슬을 품 안에 감추었다.
잠시 후, 리노가 진을 몰고 돌아왔다.
“한 바퀴 다 돌았습니다, 대장님. 이상 없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고생했다. 다음은 내가 돌지. 대기하고 있도록.”
“알겠습니다!”
아르센은 진을 몰아 빠르게 야영지를 나섰다.
흑사자가 우아한 움직임으로 밤의 숲을 갈랐다.
그렇게 수백 미터, 야영지에서 확실히 떨어졌다고 느낀 아르센은 진에서 내린 뒤 바위에 걸터앉아, 구슬을 감싸고 있던 수건을 풀었다.
그러자마자, 구슬은 다시 제멋대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아, 이제야 보이네! 여긴 어디야? 무슨 숲인 거 같은데, 내가 대체 왜 여기에······.]
“잠깐, 좀 진정하고 얘기하지. 우선 그쪽이 누구인지부터 좀 듣고 싶은데.”
이 구슬 안에 있는 영혼이 무엇이건 간에, 정말 더럽게 말 많고 제멋대로라는 것은 확실했다.
아르센의 말은 완전히 무시하고, 구슬 안의 목소리는 여전히 자기 멋대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근데 넌 누구야? 예리코 교수님 아들인가? 교수님 아들이라기엔 너무 잘생겼는데, 그분은 어디 계셔? 아니, 그 갑옷은 또 뭐야? 상감 문양을 보니 아히탈 양식인 거 같은데 그런 거 함부로 입었다가 상하기라도 하면······.]
“예리코 교수님은 누군지 모르겠고, 이제 내 질문도 좀 들어 줬으면 하는데, 서로 만족할 만한 대화를 하려면 말이야.”
유감스럽게도, 아르센의 상냥한 제안은 묵살당했다.
구슬은 여전히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제멋대로 떠들며 질문을 던졌고, 아르센의 질문에 답해줄 마음은 없어보였다.
모름지기 말이 안 통할 때는 매가 약인 법.
아르센은 곧바로 진에 매어 놓았던 도끼를 들었다.
거대한 도끼날이 흉흉하게 빛나며 아르센의 얼굴을 비췄다.
“일단 내 질문에 대답해, 깨지고 싶지 않으면.”
[뭐? 무슨 미친 소리를······구슬 깨지면 진짜 죽을 수도 있어! 근데 너, 그 도끼랑, 갑옷, 설마?]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구슬의 떨림이 멈췄다.
몇 초 뒤, 구슬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설마, 전투 인형이냐?]
“아마 너희는 그렇게 부르는 거 같더군.”
[이런 미친, 도대체 어느 공방에서 만들었길래? 눈깔 모양까지 사람처럼 만드는 건 불법······!]
후욱,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다.
아르센의 도끼는 정말 아슬아슬하게, 구슬에서 고작 몇 센티미터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아르센의 얼굴을 알아본 것으로 보아, 외부 환경을 관찰할 수 있으니 이것도 볼 수 있을 터.
과연, 잠시 후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떨림이 섞여 있었다.
사람들은 그 감정을 공포라고 불렀다.
[야······내가 지금 여기 들어있기는 해도 분명 인간이거든? 전투 인형 규약 몰라? 민간인을 죽이지 말 것······.]
이 구슬 안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말해서 통하는 상대가 아님은 이미 확인한바, 아르센은 강압적인 목소리로 명령했다.
“미안하지만 난 그딴 규약 몰라. 당장 말해, 넌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