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한번 아이돌-71화 (71/475)

5) <크로노스 히스토리> (13)

크로노스를 알든 모르든 나와 주한 형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수많은 카메라와 웅성거림. 우린 시선을 교환하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촬영 구경은 못 하겠는데?”

“그렇죠?”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이 많은 인파도 한꺼번에 움직이니 괜히 촬영에 방해만 될 거다.

우린 거의 다다른 횡단보도에서 조금 떨어져 다시 촬영장을 향해 걸었다.

“팬이에요! 어떡해! 여기서 만났어! 어떡해애!”

“감사합니다!”

“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

“하하. 비밀이에요.”

마치 피리를 부는 사나이처럼 사람들을 이끌고 촬영장 입구로 돌아온 우리는 잠시 멈춰서 사람들과 마주했다.

찰칵거리는 소리들이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차다.

“여러분, 저희 누군지 아세요?”

“네!”

주한 형의 물음에 사람들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주한 형은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저희 누구예요?”

“크로노스! 꺅!”

“꺄아아아악!”

“감사합니다.”

나와 주한 형은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인사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아직 데뷔도 안 한 우리들을 정말로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오빠! 사인해 주시면 안 돼요?”

“저, 저 <픽위업> 마지막 무대도 보러 갔었어요! 팬 미팅에는 참가 못 했지만……. 진짜로 찐팬이에요. 어흑!”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진짜 우리의 팬으로 보이는 그녀는 울먹이다 고개를 숙였다.

난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울어요? 아니 팬이라면서 왜 울어요. 고개 들어 봐요.”

나는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그녀는 쑥 멀어지며 고개를 내저었다.

“좋아서 그래요. 좋아서. 사인…… 사인 해 주세요.”

난 종이를 내미는 그에게 장난스레 물었다.

“누구 팬인데요?”

“예, 예에?”

“크로노스 중에 누구 팬이에요?”

이렇게 울 정도로 좋아하는 멤버가 누굴까. 거참 부러운 놈일세.

나중에 해당 멤버에게 전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자 팬은 붉어진 귀와 함께 고개를 더욱 숙이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혀, 현우 오빠요……. 으아…… 오빠 진짜 너무 좋아해요.”

“저요?”

내가 놀라 되묻자 팬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다섯 명 다 좋지만…… 저 아직도 <픽위업> 계속 돌려 보고 있어요! 리얼리티도 빨리 나왔으면 좋겠는데…….”

“제 어디가 좋아요?”

사방에 카메라가 널렸으니 이만 사인만 해 주고 들어가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난 집요하게 팬에게 물었다.

일단 내 팬과 이렇게 가까이서 일대일로 대화를 나눠 본 것은 처음이었고 진짜로 내 어디가 좋아서 눈물까지 흘리는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저는요…… 어…….”

팬이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허겁지겁 정리하며 내 말에 대답하려 했다. 난 앞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팬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팬의 말에 집중했다.

주위가 묘하게 조용해진 듯한 건 내가 팬의 말에 너무 집중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냥 무대도 너무 잘하고 노래도 너무 잘 부르고 춤도 잘 추고…… 저 오빠 춤 선 너무 좋아해요! 발레 하는 것 같아요 뭔가.”

“발레?”

“그리고 정말 미치게 잘생기고 예쁘고 무대에선 너무 멋진데 무대 밖에서는 하찮은 것도…….”

“……하찮아요?”

“맨날 멤버들한테 놀림받는 것도 귀엽고 무대 기획 잘 짜는데 설득력 없어서 맨날 주한 오빠가 설명 덧붙여야 하는 것도 좋고 다른 멤버들 잘 챙겨 주는 자상함도 좋아요!”

팬이 날 보며 또랑또랑 활짝 핀 웃음을 내보이며 말했다.

뭐, 중간에 함정이 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내 부족한 점마저도 좋아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설득력 없는 게 방송으로 느껴졌어요?”

“엄청 귀여웠어요!”

“아…… 그렇구나. 하하. 사인 어디에다 할까요?”

웅변 학원이라도 다녀야 하나. 오래 트레이너 생활을 했으니 가르치는 것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의욕 만만인 연습생들을 가르치는 것과 반대 입장인 누군가를 설득하는 건 다른 것이라는 걸 요즘 들어 톡톡히 느끼는 중이다.

나와 주한 형은 꽤 많은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 주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팬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주한 형이 언질을 한 것인지 어느새 매니저 형이 돌아와 떠들썩한 인파를 정리해 주었다.

“무대도 잘하고 노래도 너무 잘 부르고 춤도 잘 추고 미치게 잘생기고 그런데 예쁘기까지 하고 그러면서 하찮고 설득력 없는 현우.”

“아 왜요. 왜 읊어요.”

“그냥?”

주한 형이 낄낄거렸다.

“거기서 네가 왜 좋은지는 왜 물어본 거야. 순간 비웃을 뻔했잖아.”

“몰라요. 그냥 궁금해서 그랬어요. 왜요. 아까 못 들었어요? 맨날 멤버들한테 놀림당한다잖아요. 그만 좀 놀려요.”

“그게 귀엽다잖아.”

그냥 내가 사랑받는 게 신기해서 물어본 건데 놀림거리만 하나 더 생겼다.

촬영장으로 들어가자 어느새 세팅을 마친 새로운 세트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왔어요? 딱 맞춰 왔네?”

“촬영 구경 못 하고 대신 앞에서 팬들이랑 대화 나누다왔어요.”

감독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털털하게 웃었다.

“역시 크로노스 인기 많네. 아직 데뷔하기도 전인데 어쩐지 건물 밖이 소란스럽더라.”

“갑자기 시끄러워져서 깜짝 놀랐어요. 사람들이 몰려서 그런 거였구나.”

“그럼 현우부터 다시 촬영 들어갈까? 야외에 멤버들 돌아오기 전에 빠르게 해치워 버리자고.”

난 감독님의 지시에 따라 세트장 안으로 들어갔다. 톱니바퀴가 가득했던 나무로 된 연구실은 어디로 가고 내 다음 세트장은 흰 배경에 보랏빛 조명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곳이었다.

“스타일리스트 들어가서 현우 씨 의상 점검해 주고. 끝나면 바로 촬영 들어갈게요.”

스타일리스트 누나들이 세트장으로 들어와 세트장에 맞도록 머리 모양과 메이크업을 간단히 고쳐 주었다.

“으음…… 셔츠 단추 좀 더 풀까?”

“응응 좀 풀어. 그래도 현우는 판타지 담당 멤버들보다 고칠 곳이 많이 없어서 편하긴 하다.”

누나는 그렇게 말하며 내 셔츠 단추를 파워풀하게 열어젖혔다.

“어우 누나 너무 파인 거 아니에요? 속에 다 보이겠는데?”

“에이, 이 정도로는 안 보여. 나중에 모니터할 때 봐 봐라. 더 풀어헤치고 싶어진다?”

스타일리스트 누나는 내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흩트리고 세트장 밖으로 나갔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수정이 끝나고 대기하고 있던 촬영 스태프가 다가와 촬영 내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뒤에 커다란 소품 보이시죠?”

나는 뒤돌아 스태프가 가리키는 소품을 확인했다.

흡사 둥근 보울형 침대와 비슷한 커다란 소품에서 세트장과 마찬가지로 은은한 연보라색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거 조명이에요?”

“비슷하긴 한데 뜨겁지는 않을 거예요. 현우 씨는 저기에 살짝 기대 누운 채로 촬영하시면 돼요.”

난 소품에 손을 대 보았다. 손바닥에 옅은 온기가 느껴지자마자 곧바로 손을 떼어 내고 스태프를 바라보았다.

“벌써 좀 뜨거운 것 같은데요.”

“뜨겁다고요?”

스태프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다가와 소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따땃-해요. 일단 누워 보고 너무 뜨겁다 하면 말해요. 식혔다가 다시 할 테니깐. 누워서 그 뭐야. 경연에서 했던 것처럼 나른한 표정 부탁해요.”

스태프가 세트장에서 나가고 난 조심스럽게 소품에 앉아 살짝 기대었다.

등에 뜨끈한 열기가 전해졌다.

조명에서 흘러나오는 열기는 아무리 태연하려 해도 기분이 나쁘단 말이야.

“오오! 현우 지금 표정 좋다! 지금처럼만!”

그런데 기분이 안 좋아서 푹 가라앉은 표정이 의외로 감독님은 매우 마음에 드신 모양이었다.

“그 표정 그대로 촬영 들어갈게요.”

딱히 촬영을 하기 위해서 만든 표정은 아니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게 바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연기 아니겠나.

난 조금 편한 자세로 고쳐 눕고 카메라에 얼굴이 잘 비치도록 고개를 돌렸다.

“큐!”

곧 곡 <퍼레이드>가 현장에 울려 퍼지고 난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나른하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밤이 지나면 사라질 화려함.

같이 가자, 환상 속에 갇힌 나를.

너는 다시 보고 싶어질 거야.

You need me.

아직 촬영은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 * *

“현우 쟤 저거 연기 아니죠?”

“어.”

“갑자기 되게 힘들어 보이는데 벌써 지쳤나?”

스타일리스트의 말에 조인현은 입을 다물었다. 촬영에 임하는 서현우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물론 졸린 듯한 나른함을 요구했으니 감독은 서현우의 표정에 꽤나 만족한 모양이지만 적어도 조인현이 보기엔 정말 갑작스럽게 무기력해져 버린 것으로 보였다.

“왜 그러는 걸까. 갑자기. 아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기분 괜찮아 보였는데.”

“아까 연기 못한다고 해서 긴장한 거 아니에요?”

“그런 걸로 긴장했을 거 같으면 아까 전 촬영부터 망쳤을 거야.”

그리고 저건 긴장보다는 컨디션 나빠졌음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애들 잘 재우고 있는 건 맞죠?”

“아이…….”

조인현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빈말로도 양심상 차마 잘 재우고 있다고는 말 못 한다.

빠듯한 데뷔 준비에 리얼리티 촬영까지. 잠자는 시간을 줄여 가며 과로시키고 있는 중이니까.

그간 크로노스의 데뷔 준비로 바빠 정작 멤버들의 케어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차였다.

그래도 강주한이 어찌어찌 데뷔를 앞두고 예민할 멤버들을 잘 돌봐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퍼억!

“악!”

스타일리스트 팀장이 조인현의 등을 아프게 때렸다.

“좀 재워요! 픽픽 쓰러지기 전에. 아직 데뷔도 안 한 애들을 왜 벌써부터 고생시켜?”

“……쇼케이스가 코앞이다 보니. 아니, 내가 쉬라고 해도 잘 안 쉬어 녀석들! 새벽까지 연습하는 놈들 억지로 다독여서 숙소 보내면 숙소에서 저×트 댄스하고 있다니까?”

“오빠가 숙소에 드러눕혀서라도 재워야죠? 저번에 세연이 쓰러졌던 거 기억 안 나요? 오빠 욕 뒤지게 먹어요.”

예전 조인현이 알뤼르의 매니저를 맡았던 당시 멤버 김세연이 컴백을 앞두고 무리한 다이어트 중인 줄 모른 채 평소와 같은 행사 스케줄을 잡았었다.

조인현에게 말하지 않고 과로하던 김세연이 공항에서 쓰러지는 바람에 YMM 전체가 발칵 뒤집힌 적 있었다.

조인현은 그때 평생 먹을 욕은 다 들어먹었다고 생각했다.

“안 되겠다. 애들 나 부담스러워해서 일부러 숙소 출입 잘 안 했는데 데뷔까지 같이 지내야겠어.”

“요즘 안무 연습에 녹음에 애들 많이 혼나고 바쁘고 피곤하고. 기운 좀 북돋아 줄 방법 좀 찾아봐요. 꿈꾸던 데뷔인데 과정이 즐겁고 행복해야지 이러면 힘들기만 하잖아.”

“허허. 알겠어.”

스타일리스트가 조인현의 어깨를 툭툭 치곤 서현우의 수정 메이크업을 위해 세트장으로 향했다.

‘기운 북돋아 줄 방법.’

그래, 데뷔를 앞둔 아이들인데 즐거운 일도 있어야 한다. 그동안 바빠서 신경 못 써 준 게 미안하기도 하고.

조인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휴대폰을 들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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