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크로노스 히스토리> (16)
크로노스의 팬명을 정하자는 주한 형의 말에 멤버들도 라이브 스트리밍에 참여한 팬들도 많은 의견을 냈다.
크로노스가 시간의 신을 뜻하니까 ‘초침’, 초침에서 착안하며 큰 초침 크로노스와 작은 초침 팬이 만난다는 뜻으로 ‘자정’, 크로노스의 역사에 함께하겠다는 뜻으로 ‘히스토리’, 가장 처음 만난 날이자 추억이 있는 ‘차차’등등.
사실 끼워 맞추는 것에 가깝지만 꽤 그럴듯한 의견도 많았다.
“현우는 어때?”
“네?”
“생각나는 거 없어?”
주한 형이 물었다.
원래 사람 생각하는 게 다른 듯 비슷해서 내가 생각한 의견은 앞서 다 나와 조용히 있었던 차다.
하지만 멤버가 대화에 참여 못 하는 건 못 보는 주한 형. 내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려 줄 모양이었다.
“현우가 <픽위업> 때부터 좋은 아이디어 많이 내는 친구거든요.”
“어…… 잠시만요.”
뭐가 있을까. 이런 건 살짝 많이 돌려서 생각해 내도 괜찮지 않을까. 크로노스와 시간에 관련된 것은 대부분 다 나와서 내가 더 생각할 것이 없다.
그럼 좀 더 광범위하게 크로노스는 시간의 신이기도 하지만 우주로 나가면 토성의 신이기도 하다.
토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고리.
“고리 어때요?”
“고리? 무슨 뜻이야?”
“고리가 뭐야?”
“크로노스가 토성의 신이기도 하거든요. 토성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일컫는 부분이 고리예요. 우리 크로노스에게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팬 여러분이라는 뜻으로.”
내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고유준과 이진성이 감탄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 의견이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크으 역시 서현우다. 고리 좋은데? 나는 현우한테 한 표. 다른 멤버들은 어때. 팬분들은 어때요?”
박윤찬이 팬들의 반응을 확인하고 흐뭇하게 웃었다.
“팬분들도 너무 좋아하시는데요? 부를 때도 귀엽고 좋은 거 같아요. 저도.”
“리더 형, 어때요?”
이진성이 물었다. 주한 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팬분들이 좋으시다면 무조건 그걸로 해야지. 뜻도 좋고.”
“그럼 이제부터 우리 팬분들은 ‘고리’라고 부를게요.”
“고리 여러분!”
이진성의 외침에 대답하는 팬들로 채팅창이 시끌벅적해졌다.
이진성은 금방금방 돌아오는 대답들에 기분 좋게 웃으며 방방 뛰었다. 주한 형은 이진성에게 맞춰 웃으며 이진성을 끌어다 앉혔다.
“그럼 고리 여러분, 저희 방송 켠 지도 벌써 30분이 다 되어 가네요. 이제 슬슬 꺼야 할 시간이 되었어요.”
-ㅜㅜㅜㅜㅜㅜㅜㅠㅠㅠㅠㅜㅜㅜㅠㅠㅠ
-벌써?ㅠㅠㅠㅠㅜㅜㅜㅠㅠㅠ
-가지말아옆퓨진짜.
-삼십분바께 안 해써요ㅠㅠㅠㅠ더 해요 갸우ㅜ
팬들의 아쉬운 소리에 주한 형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도 더 하고 싶은데 이제 연습하러 가야 해서 더 못 해요. 죄송해요. 여러분.”
“다음엔 여유 있는 시간에 길게 할게요.”
-짧게 해도 괜찮으니까 자주와줘요
-와줘서 고마어ㅜㅜㅜ
-연습 열심히해ㅠㅠ다음에 올때까지 기다릴게 흑흑
주한 형이 채팅 내용을 지켜보다 말했다.
“저희 멤버들이 요즘 데뷔 준비로 되게 정신없고 피곤했거든요. 그런데 여러분들 보니까 되게 힘이 나네요.”
“완벽하게 연습해서 최대한 빨리 선보이고 싶어요……. 파이팅!”
“그럼 저희 이제 갈게요. 현우야.”
“넵.”
난 카메라 앞으로 가까이가 손을 흔들어 팬들에게 인사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볼 때까지 잘 지내요!”
그러곤 방송을 종료했다.
“이야. 재밌었다.”
이진성이 주한 형 무릎 위로 드러누우며 말했다.
“진성이 최근 며칠간 중에 제일 기분 좋아 보이는 것 같아.”
“이 재미로 라이브 소통하나 봐요.”
주한 형은 자상히 이진성의 말을 들어 주다 힘을 줘 이진성을 일으켜 세웠다.
“읏챠. 연습하러 가자.”
“연습한 다음에 회의라고 했었나?”
고유준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어, 리얼리티 다음 촬영 회의.”
“와 벌써 리얼리티 촬영할 때가 됐어? 빠르다 빨라.”
우린 찌뿌둥한 몸을 풀며 천천히 걸어 회사로 향했다. 간단히 연습, 리얼리티 제작진이 도착하면 그들과 회의, 다음 또 연습.
점점 혹사당하는 게 익숙해지려 해서 큰일이다.
* * *
“으헉! 휴식! 악! 휴식!”
이진성이 먼저 기브업 하고 드러누웠다.
우리 멤버들 중 가장 체력이 좋은 멤버인데 이 친구가 드러누울 정도면 다른 멤버들은 어떻겠나.
“허억…… 아…… 죽겠네.”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다들 안무가 선생님께 혼나기 싫어 애써 버티고는 있었지만 솔직히 좀 더 하면 다음 일정을 소화하지 못한다.
안무가 선생님은 숨을 헐떡이며 우릴 둘러보더니 거울에 기대 주저앉으셨다.
“그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자꾸 안무 바꿔서 미안해.”
“아니에요. 더 좋은 안무가 있어서 바꾸는 거면 저희는 감사한 일이죠.”
벌써 네 번째 안무 수정.
조금 짜증 날 법도 한 상황이지만 수정된 안무가 더 좋은 것이 사실이라 불만은 없었다.
“다들 고생했고. 이제 수정 안 할 거니까 내일은 완성된 안무로 촬영 함 하자.”
“네, 고생하셨습니다!”
안무가 선생님이 연습실을 나서고 곧 매니저 형이 들어와 음료를 나눠 주었다.
“얘들아 움직일 수 있겠어?”
매니저 형의 말에 멤버들 모두 매니저 형을 노려보았다.
“움직일 수 있다고 하면 회의실 보내려고 하는 거죠?”
“숨 돌릴 틈은 좀 줘요. 형.”
“형도 빨리 앉아요. 그렇게 촉박하게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첫 번째 연습인데도 이렇게 힘든데 회의하고 또 연습해야 한다 이거지?
“……하아.”
막막하긴 해도 데뷔하려면 어쩔 수 없다. 난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다 벌떡 일어났다.
“다들 일어나. 매니저 형 곤란해 보여.”
“아악 형 나 아직 덜 쉬었는데…….”
“데뷔하고 쉬어. 초코우유 먹을래?”
“주세요.”
난 이진성에게 초코우유를 넘겨주며 팔을 잡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고유준도 똑같이 일으켜 세우자 주한 형과 박윤찬은 스스로 일어나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엔 이원제 PD, 송이희 작가님을 비롯한 제작진 그리고 크로노스 스태프 팀이 미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어 연습 끝났어? 얼른 앉아.”
“안녕하세요.”
“데뷔 준비 잘되어 가는 건 촬영분으로 보고 있어요. 기대되네.”
“감사합니다.”
우린 고개를 꾸벅 가볍게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제작진 측에서 준비한 서류가 내 앞에 올려졌다.
“저번 촬영 때 놀이 기구 못 타는 멤버들이 있어서 경기가 살짝 불공평하게 흘러갔잖아요. 그래서 처음 기획했던 하이드 컨텐츠들은 모두 오픈 형식으로 가기로 했어요.”
“넵.”
“다음 촬영은 가까운 야영지를 빌려 진행할 생각이고요 서바이벌용품 제작 업체의 협찬을 받아 서바이벌을 할까 해요.”
“서바이벌이면 총싸움 말하는 거예요?”
이진성이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며 물었다. 이원제 PD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시 난 서바이벌 못하겠다 하는 멤버 있어요?”
“서바이벌은 좋은데 저희끼리 하기에는 인원이 너무 적은 거 아닌가요? 다섯 명인데.”
“네, 다섯 명이서는 팀을 나누기도 힘들 것 같고 인원도 적어서 이번엔 게스트를 섭외했어요.”
“게스트? 누구요?”
내 물음에 PD님은 능글맞게 웃으며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건 비밀입니다.”
게스트가 누굴까. 리얼리티 예능 자체가 <픽위업>과 이어지는 것이고 제작진 또한 동일한 걸 생각하면 같은 <픽위업> 출연진, 그중에서도 대형 기획사 소속인 하이텐션이나 스트릿 센터일 가능성이 다분했다.
내가 게스트를 유추하고 있을 때 문득 이원제 PD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내보였다.
마치 ‘네가 뭘 생각하는지 알아. 응 아니야~.’ 하는 눈빛.
난 빠르게 이원제 PD의 눈을 피하고 앞에 놓인 종이를 뒤적거렸다.
이원제 PD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그날 많이 피곤할 테니까요. 인현 씨는 하루 정도 애들 연습 일정 조정해 주시고요. 의상은 최대한 편한 것으로 준비해 주세요.”
스타일리스트 팀장님이 손을 들었다.
“야영장이라고 하셨는데 흙 위에서 하나요?”
“네, 협찬사에서 보낸 서바이벌용 대형 세트장 소품들이 들어오긴 할 텐데 기본적으로는 흙 위에서 구른다고 할 수 있죠.”
“안전 장비나 헤드 카메라 착용은요?”
“안전 장비는 어느 정도 착용할 테지만 몸 어디 맞고 하는 제품이 아니라고 해서 주렁주렁 달지는 않을 거예요. 카메라 착용도 안 합니다. 기왕 총싸움하는데 편하긴 해도 멋있는 의상 입혀 주시면 저희 입장에선 좋고요.”
다음 촬영을 위한 회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미 정해진 것을 통보받고 준비하기 위한 회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아, 다음은 서바이벌이구나’, ‘게스트가 있구나.’ 정도만 인식하고 있으면 됐다.
“야 이번 대결은 완전히 우리를 위한 대결 아냐?”
고유준이 조용히 말하며 키득거렸다.
난 녀석을 비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아니고 나.”
“웃기고 있네.”
서바이벌 게임. 총싸움.
평소 크레이× 아×이드, 배틀 그×운드, 좀 더 어렸을 땐 서든, 고급시계 등등 각종 게임을 섭렵하고 다녔던 나와 고유준이다.
서바이벌은 전술 게임이다.
이따금 우리를 따라다니며 게임하기는 하지만 게임보다는 춤추고 운동하는 걸 더 좋아하는 이진성.
게임엔 취미 없는 주한 형과 박윤찬.
그렇다면 이번 촬영에서 날아다니는 건 나와 고유준일 터다.
이것 참 만족스러운 기획이군.
“아무튼 말씀드릴 건 다 한 것 같습니다. 물어보실 것 있나요?”
“아니요.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도 잘 준비하겠습니다.”
성 과장의 말을 마지막으로 회의가 끝났다. 제작진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원제 PD는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며 성 과장님과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감탄사를 내뱉으며 나와 고유준을 바라보았다.
“아 맞다 그래. 두 사람 곧 <카운트다운> MC 보러 가지?”
“네! 촬영 끝난 다음 날요.”
“그거 리얼리티 대결 보상으로 받았으니까 간 김에 홍보 좀 하고 와. 알겠지?”
“예에.”
안 그래도 PD님이 말하기 전에 매니저 형한테 귀에 박히도록 들었다.
일일 MC 하게 해 주는 것도 예능 홍보를 위해서니까 언급 꼭 하라고. 우린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노스 히스토리> 제작진이 회의실을 나가고 매니저 형이 배웅하러 간 사이, 끝난 줄 알고 연습실로 돌아가려던 우리를 김 실장님이 붙잡았다.
“얘들아 다시 앉아 볼래?”
“……무슨 일이세요?”
김 실장님도 성 과장님도 방금 전 회의 때 사근사근하게 보였던 미소를 싹 지우고 심각한 표정들이었다.
우린 자동으로 굳어 주섬주섬 다시 의자에 앉았다.
“너희들 서바이벌에 자신 있다 하는 사람 있어?”
“강력한 우승 후보가 누구냐?”
멤버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가리켰다. 나는 고유준을 가리켰다.
“현우 형이 원래 게임도 잘하고 몸도 잘 움직이니까요.”
“그래? 주한이는?”
“저요? 저는…….”
주한 형은 심각하게 고민하다 말했다.
“시작하자마자 죽었다고 봐야죠.”
“……아 그래?”
김 실장님이 입술에 꽉 힘을 주고 씁쓸한 표정을 했다.
“무슨 일이신데 그래요?”
내 물음에 성 과장님이 말했다.
“사실은 며칠 전에 회사로 연락이 한 통 왔거든? 다른 곳도 아니고 SES에서.”
“엥? 근데요?”
“SES 간판 프로그램 <플라잉맨>에서 너희 섭외하겠다고.”
터엉-!
주한 형의 손에 들렸던 페트병이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