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데뷔 (21)
우리가 연습생 시절부터 주한 형을 리더로 세운 이유?
간단히 말하면 매니저 형에게 할 말을 제대로 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로 매니저 형도 크로노스와 마찬가지로 주한 형을 무서워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참고로 연습생 시절 주한 형의 별명은 뒤돌아보지 않고 직언한다는 뜻의 ‘노빠꾸 혁명가’였다.
-대결을 앞두고 각오 한마디씩 해 볼까요?
“진짜 이건 세기의 대결이다.”
“두 사람, 굳이 게임 아니라도 자주 부딪치는 사이거든요.”
멤버들의 설렘 가득한 멘트 속에 주한 형과 매니저 형이 사이좋게 손을 맞잡았다.
-우선 인현 씨부터.
“주한아, 살살 해라. 형도 할 말은 많은 거 알지?”
“오오오!”
“인현 형! 무슨 말 꺼내려고!”
-다음은 주한 씨.
“형, 오늘 카메라는 없는 셈 치고 한번 해보자고.”
여기 누가 마이크 좀 줘라. 드롭해 버리게.
벌써부터 인현 형의 동공이 요란하게 지진하고 있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인현 씨부터 시작!
“주한아, 웬만하면 좋은 컴퓨터는 멤버들이랑 같이 좀 써라. 네 방에 두고 너 혼자 쓰니까 유준이랑 현우가 오피스용 노트북 식혀 가면서 게임하고 모니터링하고, 어?”
“이여어어얼!”
“맞아! 형 컴퓨터 우리도 같이 쓰고 싶다고!”
사실 하루 종일 곡 작업이나 활동 모니터링하는 거 다들 알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매일 주한 형이 쓰다 보니 형이 안 쓸 때에도 이제 사용하기 껄끄러워지는 게 불만이긴 했다.
“컴퓨터를 거실로!”
“우! 우! 우! 우!”
주한 형은 정색하다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미안해. 말해 줘서 고마워.”
왜 주한 형의 목소리가 떨리는 걸까.
“근데 형, 나는 컴퓨터로 우리 곡 작업을 하고 있는 건데, 같이 쓰라고 말할 게 아니라 회사에서 멤버들 쓸 컴퓨터를 하나 더 사 주는 게 맞는 거 아닐까? 아니면 내 작업실을 따로 하나 만들어 주든가. 멤버 다섯 명이 사는 숙소에 컴퓨터가 딱 하나 있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우리가 직접 살 수도 없어. 왜냐하면 아직 우린 정산을 못 받으니까.”
“옳소! 옳소! 컴퓨터 한 대 더!”
“주한 형에게 작업실을!”
“왜 <픽위업> 끝난 지 한참 됐는데 우린 정산 못 받고 있나!”
“……미안해. 말해 줘서 고마워.”
매니저 형은 게임 멘트를 마치고 숨을 몰아쉬었다.
“야! 너희 회사 기밀 사항을……!”
매니저 형이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주한 형이 맞잡고 있던 매니저 형의 손을 꽉 잡았다.
“다음 불만 말해요, 인현 형.”
“……으응. 예, 예전부터 형이 다음 날 몇 시까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해 주잖아. 그런데 시간 맞춰서 너희 숙소 가면 집 안이 컴컴해. 아무도 안 일어나 있어. 결국 내가 다 깨워서 씻기고, 진성이는 업어서 스케줄 이동해야 하고. 어? 이런 건 리더인 주한이 네가 일어나서 멤버들 깨우고 형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니?”
“미안해. 말해 줘서 고마워. 근데 형, 나도 사람인데 인간적으로 새벽 2시까지 연습시키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스케줄 소화하는 생활을 한 달이나 했어요. 내가 애들 미리 깨워서 준비시키길 바라면 적어도 5시간은 잘 수 있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닐까?”
정말 노빠꾸 혁명가답다. 다들 불만은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말을 주한 형은 필터도 없이 방송에서 그대로 말해 버렸다.
“맞다! 솔직히 너무 졸려요, 인현 형! 저희 오늘 여기서 처음으로 제대로 잔 것 같아요.”
“매니저 형은 우리 연습할 동안 중간중간 집에 가서 자고 오기라도 하지.”
당연히 멤버들은 크게 공감하며 난리가 났고.
“허얼…… 내가 생각해도 저건 좀 너무했다.”
“이거 방송에 나가도 돼? 진짜로 욕먹을 수준의 스케줄 아니냐?”
“아무리 크로노스 인기가 심상치 않아도 그렇지, 하루 3시간은 좀…….”
제작진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뭐, 내가 트레이너 생활을 하며 지켜본 결과.
크로노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인기 아이돌들이 활동 기간 동안엔 잠을 잘 자지 못한다.
하루 2~3시간이 이 업계 평균 수면 시간. 덕분에 몸이 버티지 못해 픽픽 쓰러지거나 기면증에 시달리는 아이돌도 참 많은 편이다.
하지만 모두가 이런 활동을 한다고 해서 이게 옳은 일은 아니지.
주한 형의 말에 결국 매니저 형은 대답하지 못하고 물러섰다.
여기서 더하다간 정말 우리 팬들의 항의로 회사가 뒤집어질 수도 있겠다 판단한 모양이다.
주한 형 이후 이진성은 이원제 PD와, 박윤찬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VJ와, 고유준은 오디오 감독님과 게임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내 차례, 난 상자 속에 손을 집어넣어 조금 흔든 뒤 하나를 꺼내 올렸다.
종이를 펼치자 [김동우(서현우 담당 VJ)]. 내 개인 컷을 찍어 주시는 담당 VJ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크으, 이것도 재밌겠다.”
“현우 형 VJ님이랑 친하게 지내요?”
“적어도 서로 불만 쌓일 사이는 아닐걸.”
그렇게 말하는데 제작진 틈에서 알 수 없는 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왜 그러는 걸까. 난 의아함을 느끼며 굉장히 민망해 보이는 VJ와 손을 맞잡았다.
“동우 형, 여기서 눈 마주쳐야 하는데 왜 절 안 보세요.”
동우 형은 불려 나온 것이 많이 부끄러웠는지 손을 맞잡은 이후 새빨개진 귀를 하곤 내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제작진 사이에 환호성이 튀어나오고 이원제 PD가 실실 웃더니 말했다.
-동우 씨가 현우 씨 눈을 마주 봐야 게임이 시작이 됩니다.
그 말에 드디어 동우 형이 내 눈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동우 씨, 눈을 마주 보세요.
원래 이렇게 부끄러움 많은 사람인가. 평소 그냥 내가 하는 행동에 자상히 웃어 주는 모습만 봐 와서 이렇게 부끄럼 많은 성격인 줄은 몰랐다.
아무 말 없이 동우 형이 날 바라볼 때까지 한참을 기다리니 동우 형이 드디어 내 눈을 제대로 바라봐 줬다.
-그럼 게임 시작하겠습니다. 동우 씨부터 시작!
동우 형은 뜸을 들이며 머뭇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워낙 좋으신 분이라 딱히 불만이 없기는 한데 가끔 게임에 진심이 되셔서 카메라를 등지실 때가 있더라고요. 그것만 좀 고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다지 횟수가 많지는 않고…….”
동우 형의 말에 제작진의 야유가 쏟아졌다.
“그게 뭐예요! 좀 더 확실히 해야 이기지!”
“너무 고양이 발바닥 수준의 공격이다!”
하지만 동우 형은 그들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미안해. 말해 줘서 고마워.”
동우 형의 순한 공격은 이후를 위한 속임수일까. 아니면 형 자체가 원래 순한 사람이라서 이러는 걸까.
일단 난 상황을 보기 위해 동우 형과 비슷한 정도의 공격을 해 보기로 했다.
“정말 어쩌다 있는 일이긴 한데요, 가끔 제가 뛸 때 형이 못 따라오시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제대로 못 뛸 때가 있어서. 체력 좀 길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둘 다 뭐야! 좀 재밌게 해 보라고!”
원성이 자자한 사이 동우 형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말해 줘서 고마워. 운동하겠습니다. 그 현우 씨, 농담 아니고 진짜로 하는 말인데요, 가끔 카메라 보고 웃는 거요, 저한테 장난치시는 건 아는데 그만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엇, 혹시 기분 나빴나? 나름 친하다고 생각해서 친 장난이었는데. 난 조금의 섭섭함을 뒤로하고 말했다.
“미안해. 말해 줘서 고마워. 어, 혹시 기분 나빴어요?”
내가 묻자 동우 형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아니야아니야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어…….”
대답하기를 망설이는 동우 형을 대신해 이원제 PD가 입을 열었다.
“동우 씨가 현우 씨 팬이야, 사실.”
“……진짜요?”
동우 형은 부끄러운 듯 어쩔 줄 모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픽위업> 키워드 경연 무대 때부터 고리였어요. 그냥 팬이었는데 운 좋게 이번에 담당하게 돼서…… 현우 씨가 가끔 카메라 보고 장난치면 리얼로 잠깐 머리가 멍해져서.”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티 하나도 안 났는데?”
갑작스러운 동우 형의 고백에 정말로 많이 놀랐다. 그도 그럴 게, 그냥 촬영 때 만나는 편안한 형 같은 느낌이라 팬일 거라곤 전혀 생각 못 했다.
동우 형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이원제 PD는 그런 동우 형을 흐뭇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앞에서는 덤덤하게 있으려고 노력하는데 뒤에선 난리 쳐. 덩치는 저렇게 커도 굉장히 순정남이야. 현우 씨 활약할 때마다 몰래 커피 돌릴 정도라니까?”
와, 진짜 놀랐다. 난 잠시 동우 형의 손을 놓고 제대로 악수를 청했다.
“그런 줄 몰랐어요.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앞으로도 카메라 장난은 칠 거예요.”
동우 형은 내 손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방송 끝나도 응원할게요. 그, 남자가 봐도 많이 잘생기셨습니다.”
게임이 이렇게 훈훈한 분위기로 바뀌고, 게임을 제대로 재개하라는 이원제 PD의 말에 결국 동우 형은 기꺼이 기권을 택했다.
이번 게임은 3:2로 우리가 승리해 백숙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제작진이 백숙을 준비해 주는 동안 우린 계곡에서 시간을 보냈다.
고유준과 진성이는 아예 티를 벗어 던지고 열심히 노는 중이고, 윤찬이는 애매하게 들어갔다가 고유준과 진성이의 공격 대상이 되어 흠뻑 젖었다.
나와 주한 형은 커다란 바위 위에서 세 사람을 지켜보며 여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현우야, 댄스 챌린지, 아까 매니저 형한테 슬쩍 물어봤는데 기획 팀에 물어보고 답 준다고 하더라.”
“응, 받아 줬으면 좋겠네. 형 자작곡에 대해서는? 도 PD님한테 연락 왔어?”
“왔어. 우리 돌아올 때쯤 완성시켜 둘 테니까 확인하러 오라더라.”
“오면 바로 나한테 보내 줘. 대충 구상해 둔 건 있는데 맞춰 봐야 될 것 같아.”
주한 형은 고개를 끄덕이곤 아까 스타일리스트 누나들이 주고 간 선크림을 뜯어 얼굴과 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나 곡 확인하러 갈 때 같이 갈래?”
“나도? 좋지만, 왜? 나 가서 그냥 보기만 할 거야.”
“그러든가. 들렀다가 오랜만에 둘이서 밥이나 먹자. 너한테 줄 게 있어서.”
주한 형은 그렇게 말하며 내 다리에 길게 선크림을 그었다. 난 선크림을 펴 바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줄 게 뭔지는 모르지만 주한 형의 표정을 보니 내가 고민할 만한 심각한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주한 씨, 현우 씨! 백숙 다 됐어요! 가져가세요!”
펜션에서 제작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한 형은 백숙 냄비를 확인하더니 내 반대쪽 다리에도 선크림을 길게 그어 주곤 일어났다.
“여기 있어. 별로 안 크니까 혼자 다녀올게.”
“……어, 응.”
역시나 라면 끓여 줄 때부터 느꼈지만 최근 주한 형은 우리 형 노릇을 제대로 해 주려 애쓰고 있었다.
아직 익숙하지는 않지만 다그치고 혼내며 많은 연습생들의 리더 역을 했던 형이 자신을 낮추고 아직 자신을 어려워하는 멤버들과 친해지려 노력하는 것 같아서 조금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