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연말 무대 (20)
“방이 좀 어둡네.”
내가 말하자 놓칠세라 고유준이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말했다.
“그렇지? 불 좀 켤까?”
“그러자.”
하지만 나와 고유준 두 사람 중 방의 불을 켜기 위해 일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난 꽉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굉장히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진성아!!!!!”
하지만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고유준이 낄낄거리며 문을 힐끔 보고 소리쳤다.
“이진성! 현우 형 말 무시하냐? 서현우가 부르잖아!”
“지인성아!!!!”
나와 고유준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렇게 몇 초의 시간을 기다렸을까.
“아 왜!”
문 밖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열이 바짝 오른 진성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성아 빨리, 급해. 이리 와 봐. 빨리 얼른.”
내가 정말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자 아마 거실에 있을 진성이의 짜증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싫어어!!!! 안 간다고!”
“야 현우 형이 부르는데 안 올 거야? 현우 허리 아픈데?”
“아 유준이 형 있잖아!”
“난 고유준 말고 진성이 불렀는데! 진성아! 빨리!”
“아악!”
이내 쿵쾅거리는 크로노스네 다이노소어의 발소리와 함께 벌컥, 방문이 열렸다.
“아 왜. 진짜 자꾸!”
인상을 팍 찌푸리고 꿍한 얼굴을 한 진성이의 모습에 나와 고유준은 동시에 웃음이 터져 킥킥거리며 스위치를 가리켰다.
“불 좀 켜 줘.”
“……아아! 진짜!”
진성이는 성질을 바락바락 내며 화풀이하듯 퍽 스위치를 때렸다. 이내 방에 불이 들어오고 나와 고유준이 고맙다는 듯 손을 흔들자 진성이는 우릴 노려보다 한숨을 푹 쉬곤 바로 앞 촬영 중인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맨날 저런다니까요. 저 놀리는 재미로 사는 것 같아요.”
그러더니 제대로 몸을 돌려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 방송을 보고 계신 각 아이돌 그룹 여러분, 그리고 소속사 관계자 여러분, 막내 괴롭히지 않는 그룹을 찾습니다. 연락 주세요.”
깔깔깔깔 정말, 우리 막내 재롱에 살 맛 난다.
SES 연말 방송 촬영 팀이 VTR 촬영을 위해 숙소로 방문했다.
크로노스의 일상과 나와 고유준, 윤찬이의 준비 과정을 찍어 간다고 하는데 일상을 찍는 것이기 때문에 카메라 없는 것처럼 편안하게 있으라고 해서 일상 그대로 진성이에게 장난치며 촬영을 이어 가는 중이다.
진성이는 연달은 장난에도 불구, ‘형아가 다쳤다+촬영 중이다’라는 이유로 계속 당하고 있었다.
“아 밝아졌다. 진성아 고마워. 이제 가서 <라스푸틴> 재밌게 해.”
“한 번 더 부르면 가출할 거야.”
진성이가 방을 나갔다. 우린 조금 더 키득거리다 촬영 팀이 건네주는 휴대폰을 받았다.
고유준은 휴대폰을 켜 주소록에 딱 하나 있는 번호를 터치했다.
“우리 이번에 열아홉 살 멤버들끼리 합동 무대하기로 했잖아.”
“그렇지.”
“우리랑 같이 공연할 멤버랑 미리 얼굴이라도 익혀 두자고. 전화로.”
고유준이 미리 외워 둔 대사를 말했다.
윤찬이는 이미 함께 공연할 팀원들과 미팅하러 간 상태고 우리 열아홉 살 팀은 허리를 다친 나를 위해 협업할 멤버와 영상통화로 우선 인사하기로 했다.
“오오 누군데, 누군데?”
“굉장한 인기 그룹 멤버. 기다려 봐, 내가 전화 걸게. 아 머리 헝클어진 거 정리 좀 하고!”
고유준과 난 최대한 설레고 두근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사실 누가 함께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스케줄상 따로 미팅을 했던 터라 직접 인사하는 건 처음이라 매우 어색할 것이다.
띵띵띠링띵!
경쾌한 신호음이 흘렀다. 우린 영상통화의 작은 화면 속에 욱여넣은 채 상대가 전화받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곧 신호음이 뚝 끊기며 보이는 얼굴과 들리는 어색, 민망한 웃음소리.
-여보세요. 으흐흨! 안녕하세요…….
상대의 모습에 나는 깜짝 놀란 척 눈을 키우며 입을 막았다.
“헐! 안녕하세요!”
-처음, 하하, 처음 뵙겠습니다.
상대도 나 못지않게 낯가리는 성격인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선배님!”
영상통화 주인공은 <픽위업>의 전 시즌 <픽미업> 최종 우승 걸 그룹인 ‘리뉴얼’의 멤버 엘리시아.
그녀는 리뉴얼의 메인 보컬을 맡고 있는 재미 교포 멤버로 우리와 같은 열아홉 살이다.
유넷의 연말 방송에서도 리뉴얼과 합동 무대를 하기로 정해져 있었는데 그 전에 SES에서 먼저 인연이 닿게 되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 곡도 정하고 해야 하는데 미팅 언제 할까요?
“아유, 저희는 언제든지 괜찮습니다. 선배님께선 언제 시간 되세요?”
상대도 아마 대사를 따로 받은 모양이다.
크로노스는 반년 차, 리뉴얼은 일 년 차.
아직 신인인 두 그룹의 멤버들은 철저히 비즈니스적인 마인드로 촬영에 임하며 꾹꾹 대사를 열심히 읊는 중이다.
-그럼 최대한 빨리 만나기로 하고 그 전에 저희 무슨 곡할지 각자 생각해 보기로 해요.
“네, 알겠습니다. 선배님!”
-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서로 어쩔 줄 몰라 하며 한 서너 번의 인사를 반복하다 겨우겨우 끊긴 영상통화.
후우, 완벽한 통화였다.
이제 다시 대사를 읊을 차례.
“와, 진짜 설렌다.”
“빨리 공연했으면 좋겠어!”
우린 호들갑을 떨며 <시나리오1. 두근두근 설레는 첫 만남>을 완료했다.
도대체 어떤 데뷔한 지 얼마 안 되는 신인이 걸 그룹과의 만남에 러브 라인을 만들고 그런 멘트를 하나 방송을 보며 용감하다는 생각을 간혹 했었는데 그걸 내가 하게 될 줄이야.
아마 나와 고유준이 한 대사와 행동은 편집을 거쳐 분홍색 뽀샤시~ 하트 뿅뿅~ 등의 CG와 함께 보이게 될 것이다.
촬영 팀에게 다시 휴대폰을 넘겨준 나는 잠깐 앉아 있었다고 아픈 허리를 부여잡으며 다시 침대에 올라가 엎드렸다.
그러자 고유준이 기어서 내 침대 옆으로 다가와 바닥에 앉았다.
“야, 근데 선배님이랑 곡도 생각해야 하지만 그 전에 우리 둘이 부를 곡도 생각해야 하잖아.”
“응, 그러게. 뭐 하지. 넌 생각하고 있는 거 있어?”
“흐음.”
무대 구성은 이러하다. 고유준과 나 둘이서 곡 하나, 나와 엘리시아 선배님이 다음 곡 후렴까지 둘이서 부르고 끝날 때쯤 옷을 갈아입은 고유준이 나타나 엘리시아 선배님과 함께 메인 스테이지로 향한다.
그곳에서 나를 제외한 열아홉 살 팀이 SES 측에서 제공한 뮤지컬 형식 공연을 하고 내가 다시 무대에 올라 다 함께 엔딩곡을 부르며 끝.
원래 나와 고유준, 엘리시아 선배님 셋의 무대는 없었던 것이지만 크로노스의 인기가 부상을 이유로 팀에서 제외시킬 수는 없는 정도로 컸고, 무엇보다 김 실장님과 매니저 형이 미팅에서 굉장히 말을 잘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뮤지컬 무대에서 빠지는 만큼 오프닝을 맡겨 준 것이다.
내 입장에선 정말 너무 감사한 배려다.
그렇게 받은 오프닝 무대.
미팅 때 급작스럽게 정해진 무대라 선곡은 우리에게 맡겨졌다.
“……뭐 하지.”
“…….”
촬영 중임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뭐라 말을 꺼낼 게 없었다. 머리를 최대한 굴려서 곡을 생각해 내야 했다.
뮤지컬 무대 때 쓰는 곡과 분위기도 맞아야 하고 춤을 추지 않아도 들뜨는 곡이어야만 한다.
그런 곡이 뭐가 있을까?
그때 고유준이 말했다.
“이게 춤이 없다 해도 발라드는 아니고 약간 율동이 어울릴 만한 그런 곡이 좋을 듯. 연말이니까 신나야 하잖아.”
“난 유명한 곡으로 했으면 좋겠어. 약간 디지몬이나 포켓몬 오프닝 엔딩곡처럼 엄청 익숙해서 막 따라 부르게 되는 거 있잖아.”
그렇게 말하며 침대와 침대 가운데 벽, 떡하니 걸려 있는 YMM발 커다란 달력을 바라보았다.
곧바로 보이는 달력의 붉은 표시. 이어진 연휴들.
검은 숫자 사이 빨간 숫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아.” 하며 작은 탄성을 냈다.
“크리스마스네. 맞다. 크리스마스였잖아.”
“어? 어, 그렇지.”
“PD님, 혹시 이번에 캐롤 부르는 무대 있어요?”
내가 묻자 PD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생각해 보다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어요. 1부 오프닝, 2부 엔딩 때요.”
“곡 뭔지 혹시 알 수 있을까요?”
“캐롤 부르고 싶어?”
고유준의 물음에 난 잘 모르겠다는 뜻으로 그냥 미소 지었다.
크리스마스. 캐롤을 하루 종일 틀어 놓아도 질리지 않는 하루.
오프닝 캐롤이 팝송이라면 케이팝 캐롤을, 반대라면 반대를.
열아홉 살 팀 무대의 첫 곡이고 엘리시아 선배님과 함께할 듀엣은 아마 달달한 곡일 테니 설렘, 들뜸으로 가득한 캐롤을 조금의 율동과 곁들여 선보여도 겹침 없이 즐거울 것이다.
PD님은 자신의 휴대폰을 뒤적거리더니 말했다.
“오프닝 엔딩 둘 다 팝이에요.”
“그럼 저희는 한국 캐롤로 정해도 될까요? 기획상 안 된다고 하시면 다른 곡으로 정할게요.”
최대한 겸손하게 양해를 구하자 PD님은 살짝 웃더니 잠시 통화를 하고 오신 후 오케이 하셨다.
“대신 다른 아이돌 그룹 중에서도 캐롤을 준비한 분들이 계셔서 그분들이랑 선곡 겹치지 않도록 해 달래요.”
“넵! 감사합니다. 그 곡 리스트 주시면 겹치지 않도록 정할게요.”
그때였다.
똑똑.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주한 형이 문을 두드리더니 얼굴만 빼꼼 내밀어 우릴 바라보았다.
PD님은 주한 형이 모습을 보이자마자 카메라를 획 돌려 주한 형을 담았다.
“곡이 캐롤이라고?”
“……형 듣고 있었어?”
“아, 촬영 잘하고 있나 궁금해서 잠깐.”
주한 형의 말에 고유준이 킥킥거렸다.
“형 귀 대고 듣고 있었던 거 아니야?”
“아닌데? 어우야 너 형을 뭘로 보고?”
“잊었구먼. 우리 방 문 앞에 카메라 설치되어 있는데~. PD님, 주한 형 귀대고 있었는지 방송에 꼭 넣어 주세요.”
고유준이 실실 얄밉게 말하자 주한 형은 고유준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실직고했다.
“들었다! 들었다 왜. 우리 귀여운 동생들 잘하고 있는지 걱정되는 형의 마음이었는데. 아무튼.”
주한 형이 방으로 완전히 들어와 고유준의 등짝을 찰지게 때리고 고유준이 아픔에 몸서리치며 바닥을 구르는 사이 우리 중간에 자리 잡고 앉았다.
“형이 캐롤 하면 좋아하는 곡이 있거든. 그걸 써 줄래?”
형이 신나서 드릉거리는 얼굴로 내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저 얼굴을 하면서 내놓는 의견은 언제나 팬들의 반응이 좋아도 멤버들은 별로 안 좋아하는 그런 유의 의견인데.
난 의심스러운 눈빛을 가득 보냈다.
“뭔……데?”
“이거야.”
흘러나오는 곡은 나와 고유준 둘이 부를 노래치곤 살짝 많이 달달한 빠른 템포의 듀엣 곡.
“어때? 좋지?”
“좋긴 한데…….”
드릉드릉 즐겁게 노래를 트는 주한 형이 눈동자가 의심스럽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치 멍멍냥냥 출 때의 그 생기발랄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