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연말 무대 (26)
무대 아래는 나와 고유준을 제외한 모두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고유준은 연습 몇 번 하더니 이젠 부끄러움 없이 곡에 수록된 대사를 연습했다.
나도 노래를 중얼거리며 조금 간지러운 니트 면을 쓸었다.
입고 있는 새하얀 니트는 내가 쓸어 댈 때마다 털이 떨어져 날아다녔다.
그러자 고유준이 내 팔을 툭 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야, 옷 건드리지 마. 나한테 털 붙는다고.”
“아 어. 근데 벌써 좀 붙었는데.”
새하얗고 복슬복슬한 니트를 입은 나와는 달리 고유준은 셔츠에 크리스마스와 어울리는 빨간 니트를 입었다. 내 니트 털이 고유준의 옷에 붙어 보이는 대로 떼어 내고 있자 스타일리스트 누나가 다가와 완전히 제거해 주었다.
“누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눈치 보며 인사하자 스타일리스트 누나는 거의 죽어 가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로 돌아갔다.
누나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서 우린 조용히 차렷 자세로 대기했다.
“크로노스 이제 올라갑니다!”
무대 위에선 우리와 엘리시아 선배님, 그리고 다른 19살 가수들의 만남과 준비 과정 영상을 내보내고 있는 중이다.
“흠!”
마지막으로 목 한번 풀어 주고 나니 VTR 영상이 마무리되었다.
“올라갑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의 것> 전주가 시작되고 나와 고유준이 탄 리프트가 천천히 올라갔다.
VTR이 끝났을 때부터 더 커질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관객석의 환호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자 인이어를 뚫을 정도로 더 커졌다.
무대 위에 서면 이따금 기댈 곳 없이 혼자가 된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오늘은 옆에 고유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혼자 무대에 선 것 같은 이상한 긴장감이 돌았다.
아마 무대의 크기와 노래의 반절을 혼자 불러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일 거다.
하지만 이런 긴장감은 나보다 첫 파트를 시작하는 고유준이 더하겠지.
환하게 제각각의 응원봉을 흔드는 관객석을 바라보다 고유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나와 마찬가지로 긴장하고 있을 줄 알았던 고유준은 예상외로 편안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고유준은 엔간해선 무대에서 실패하지도, 과하게 쏟아붓지도 않는 타입이었다.
고유준이 편안하게 무대를 준비하니 나도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긴장되면서도 믿을 구석이 있는 이상한 감정을 느끼며 뮤지컬의 첫 파트가 시작되었다.
* * *
“뭐가 이렇게 달달해?”
“듀엣이라며. 우정의 듀엣이라며.”
그런데 우정의 듀엣치곤 멜로디가 굉장히 달달하다.
순간 김고리는 사회가 편견에 관대해졌나 착각할 뻔했다.
물론 사전에 나온 VTR로 두 사람이 부를 곡에 대한 소개는 들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의 것>.
연인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어 하는 친구에게 연인과의 달콤함보다 더 달달한 감언이설을 퍼부으며 크리스마스는 ‘솔로’로 함께하자는 노래.
일명 물귀신 작전의 달콤한 버전이라 할 수 있는 노래였다.
그러나 그걸 영상 자료와 글귀 소개로 보는 것과 최애와 차애 둘이서 부르는 걸 직접 보는 건 기분이 좀 많이 남달랐다.
그도 그럴 게, 맨날 싸운다는 동갑내기가 어색하게나마 다정한 연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너무 좋다!
“흡, 으갸악!!!!!! 유준아!!!!”
어색한 멜로눈깔을 장착하고 서현우를 보는 고유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는 서현우라니!
하지만 찐친으로서의 오그라듦이 꽤 흐뭇하게 볼만하다. 이 노래를 추천한 강주한도 두 사람의 이런 모습, 그 모습을 본 고리들의 반응을 예상한 것이 아니었을까.
두 사람은 저절로 광대가 솟아오르는 고리들을 상태를 눈치채지 못하고 징글벨 소리와 함께 무대를 시작했다.
첫 파트는 고유준이었다.
아름다운 화이트 크리스마스
징글벨 소리가 들려와
오늘은 너와 나 우리의 크리스마스
너와 나만으로 충분하잖아
우정의 크리스마스, 정말 즐거울 거야!
고유준의 파트와 함께 솟아오르던 고리들의 광대는 폭발하여 승천했다.
고유준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서현우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어깨동무를 하며 설득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고유준 특유의 낮고 다정한 목소리와 어울려 얼마나 설레는지.
그에 평소의 생각 많아 보이는 진중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순진하고 호기심 많은 표정으로 고유준의 움직임을 따르는 서현우의 시선은 덤이다.
‘조금 오그라들지만 행복하다.’
아마 관객석에서 보는 고리들도, 방송으로 보는 고리들도 몽글몽글 같은 감정을 가지며 두 사람을 보고 있을 거다.
그 와중 고유준의 파트가 끝나고 서현우가 마이크를 들었다.
정말 그럴까?
하지만 모두와 떠들썩하게 보내고 싶어
내 옆의 연인과 손을 잡고
크리스마스 거리를 걷고 싶어
설레는 크리스마스, 정말 즐거울 거야
지금의 서현우.
평소 고유준의 장난에 투닥거리거나 어이없어 하던 예민미 풍기는 그 모습이 아니었다.
속이면 속이는 대로 속아 줄 것 같은 그런 모습.
이것은 서현우의 센스인가, 아니면 소속사가 시킨 것일까.
그 어느 쪽이든 고리들은 두 사람의 훈훈한 모습을 열정적으로 반기며 환호를 보냈다.
정말 사골 끓이듯 우려 먹을, 귀엽고 왠지 모르게 설레는 그런 무대였다.
* * *
무대를 이으면서 주문처럼 되뇌었다.
‘나는 박윤찬이다. 나는 윤찬이다.’
‘순진무구하게 속아 버리는 바보 같은 주인공’이라는 콘셉트를 듣고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순진무구한 사람이 누구일까 줄곧 생각했다.
이전의 삶과 지금의 삶 통틀어 인간관계가 좁은 나는 딱 한 사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박윤찬.’
내가 아는 가장 순진무구, 아니 순진무구보단 가장 이 주인공과 비슷한 표정을 지을 것 같은 사람.
난 이번에야말로 저번에 실패한 윤찬이 빙의에 성공해 열심히 날 설득하는 고유준을 존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유준도 나도 서로가 서로에게 어색하고 오그라들어 몸서리쳐지는 건 잘 느끼고 있지만 그럭저럭.
그래도 무대 좀 서 봤다고 잘 치르고 있는 중이다.
함께하자, 친구야. 자! 손을 잡아!
손을 내미는 고유준의 손을 냉큼 잡았다. 그러곤 내 파트를 불렀다.
응! 너와 함께라면 소소한 크리스마스도 정말 즐거울 것 같아!
고유준이 씨익 웃으며 잡은 손을 머리 위로 추켜들었다.
손을 잡았으니 크리스마스는 함께 보내는 거야.
따라 해. 크리스마스는 우리의 것!
고유준의 파트에 맞춰 내 파트를 이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의 것!
크리스마스는 우리의 것!
크리스마스는 우리의 것!
고유준과 번갈아 가며 <크리스마스는 우리의 것>을 외쳤다. 그러자 고유준이 만족한 얼굴을 하며 스르륵 뒷걸음질 쳐 내 손을 놓고 무대 뒤로 사라졌다.
그렇게 혼자만 남은 무대.
오롯이 혼자서 관객들의 함성을 듣고 있으니 곧 흰 조명이 천천히 꺼지고 분홍빛 조명이 들어왔다.
그리고 또 다른 느낌의 달달함을 띤 노래 <구불구불>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아는 사람만 아는 띵곡.
20대 청춘들의 설렘을 고스란히 표현한 인디 밴드 애서&훈의 노래다.
이 곡을 아는 사람들은 반가움에 감탄사를 내뱉었고, 모르는 사람들은 낯설지만 귀에 쏙쏙 들어오는 전주에 몰입했다.
곡이 바뀌며 한차례 소란이 일었으나 그건 곧바로 정리가 되었다.
대신 말도 안 되는 함성, 아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관객들의 소리가 들렸다.
난 시선을 돌려 반대편 무대에서 나오는 엘리시아 선배님을 바라보았다.
엘리시아 선배님이 꽃에 묻힌 마이크를 들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님과 마주 보자 관객석의 반응이 더욱 커졌다.
엘리시아 선배님이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나에게로 다가왔다.
잠이 오질 않아
너와의 통화를 끝낸 뒤
창밖의 달빛 아래 두근대는 심장
이건 널 좋아하는 게 분명한데
엘리시아 선배님 특유의 잔잔한 목소리. 잘 정돈된 덤덤한 톤이 오히려 곡의 달달함을 잘 살려 주었다.
엘리시아 선배님이 걷는 길을 따라 꽃이 피어났다.
선배님은 언제 어색했었냐는 듯 프로답게 똑바로 내 눈을 바라보며 조금씩 가까워졌다.
아까의 순진무구한 표정은 지우고 평소의 나로 돌아왔다.
그렇게 진정된 눈으로 엘리시아 선배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내 파트를 이었다.
시원한 바람은 달콤한 향기를 띠고
내 마음은 흔들리며 너에게로 향하는데
같은 하늘을 보며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별을 보는 네 표정이 궁금해
엘리시아 선배님에게는 분홍 조명이, 나에게는 노란 조명이 비췄다.
좀처럼 몰입할 수 없었던 시선 교환 부분인데 역시 무대 위에선 느낌이 달랐다.
선배님을 제대로 보는 것도 조금 더 자상한 목소리와 다정한 눈빛을 내는 것도, 지금은 쉽게 느껴졌다.
천천히 의자에 앉은 나에게로 다가오던 엘리시아 선배님이 가까운 곳에서 멈춰 나를 가볍게 바라보며 웃었다.
나도 선배님에게 맞춰 살짝 웃으며 내 파트를 불렀다.
하지만 이 마음을 말하기 쉽지 않아
네 앞에만 서면 입술이 닫혀
너와 내가 같은 마음일 거란 확신이 없어서
이후 이어지는 엘리시아 선배님의 파트. 아까 전 고유준과의 듀엣과는 다르게 이번 곡에서 내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엘리시아 선배님을 바라보는 것, 최선을 다해 설렘 가득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뿐이었다.
엘리시아 선배님의 파트가 다 끝나고 난 선배님의 노래에 맞춰 화음을 넣었다.
우리 사이는 구불구불, 너무 복잡한 길 같아
조금 더 쉽게 가자
보편적인 듀엣곡과는 다르게 남자의 목소리가 높은 음을 담당하는 화음.
그렇기에 남자의 목소리는 더욱 부드럽게 들리고 여자의 목소리는 담백하면서도 어른스럽게 들린다.
이 곡은 전주와 화음 부분이 좋아 즐겨 듣는 사람이 많은 곡이었다.
그렇게 화음이 끝나고 다시 내 파트. 난 살포시 미소 지으며 엘리시아 선배님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름길이 있어
이렇게, 내가 한 발 더 다가가면 돼
엘리시아 선배님이 천천히 내 손을 잡으려 할 때였다.
무대에 몰입하던 관객석에서 또다시 소란이 일었다.
나와 엘리시아 선배님은 깜짝 놀란 척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진행석에서 등장한 고유준이 장난스럽게 씨익 웃고는 이곳으로 뛰어와 엘리시아 선배님의 손을 낚아챘다.
그러곤 곧바로 다음 곡, 이 시작되었다.
날 놀리듯 엘리시아 선배님을 데리고 메인 무대로 향하는 고유준을 보고 있으니 카메라가 쑥 다가와 내 얼굴을 찍었다.
난 믿었던 친구에게 철저히 배신당한 사람처럼 억울하고 슬픈 얼굴을 하며 두 사람을 향해 애매하게 뻗은 손을 아련히 내렸다.
간단히 준비한 개그적 연출에 관객석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날 비추던 조명히 꺼졌다.
메인 무대에서 고유준과 엘리시아를 포함한 19살들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여기까지.
뮤지컬의 마지막 파트 전까지의 내 역할은 끝이 났다.
이제 뮤지컬의 마무리와 우리 크로노스의 개인 공연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