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비갠 뒤 어게인 (5)
“모두 지금까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출연진이 큰 문제 없이 한마음 한뜻으로 즐겁게 촬영에 응해 줘서 보다 재밌는 방송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에 우리 추억고가 좋은 기억이 되길 바라며 선창 추억고! 하면 영원하라! 가겠습니다. 추억고!”
“영원하라!”
왕년에 건배사 좀 외쳐 보신 PD님의 건배사와 함께 잔 부딪히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이야, 고생했다.”
“고생했어 너도, 너도.”
나는 가까이 있는 친구들과 잔을 부딪히고 소주잔에 담은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이런 좋은 날 사이다가 웬 말이냐, 서현우.”
“술 잘 못 마셔. 분위기만 즐기면 되지 뭐.”
예전엔 이 정도로 술을 못 마시진 않았는데 젊은 나는 굉장한 알쓰인 모양이라 한두 잔도 솔직히 불안하단 말이지.
상황을 보아 건배사가 여러 번 있을 것 같은데 고유준은 모처럼 없는 기회에 술 마시고 싶어 하는 기색이라 그냥 서브 리더인 내가 바짝 정신 차리고 고유준을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철민이도 술 안 마셔?”
희수의 목소리에 이철민을 바라보았다. 이철민은 잔을 비우지 않고 눈앞의 반찬만 깨작거리며 말했다.
“난 새벽에 알바.”
“아니 알바를 도대체 몇 개를 하는 거야?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먹고살려면 해야 돼. 신경 꺼.”
“그래, 넌 고기나 먹어라.”
이제 이철민의 싸가지 없는 말투에도 익숙해진 준환이가 열받는 만큼 이철민의 그릇에 고기를 잔뜩 쌓아 주었다.
“철! 말 좀 예쁘게 해! 맨날 욕질이나 하니까 네가 친구 없는 거야!”
“다니엘레, 팩폭 작작 좀.”
다니엘레와 이철민이 소소하게 다투는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던 카메라들이 바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 촬영은 진짜 끝났습니다! 카메라 꺼졌으니까 마음껏 놀고 먹읍시다!”
“예에에에에!!!!”
촬영이 끝났다고 PD님의 흥에 겨운 외침이 들려왔다.
“뭐? 촬영 끝났어?”
다니엘레가 화색이 되어선 이철민에게 말했다.
“끝났대!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해! 이 욕쟁이 샠키야!”
“이씨히힣!”
다니엘레의 말에 준환이가 꺽꺽거리며 웃었다.
준환이는 술이 들어가면 웃음이 많아지는 편인가 보다.
“다들 그만 그만 한잔해, 한잔해.”
고유준이 무슨 객기인지 스스로 친구들의 술잔을 채워 주기 시작했다.
난 헛웃음 치며 고유준의 손을 붙잡았다.
“야, 네 술잔엔 따르지 마라. 너는 사이다 먹어.”
그러자 고유준이 정색하며 고개를 젓더니 제 손을 잡은 내 손을 다른 손으로 잡아챘다.
“서현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럼 뭐가 중요한데?”
“내가 사실…… 너를 겁나 사랑한다는 게 중요해.”
아, 얘 지금, 벌써 취했네.
고유준이 찰싹 붙어 왔다.
“……사이다 좀 더 시키자.”
크로노스의 진정한 알코올 쓰레기는 바로 고유준이었다.
오자마자 친구들에게 이끌려 한 잔, PD님께 불려 가 PD님과 한 잔, 건배사로 한 잔.
총 세 잔 마시고 딱 30분 지난 시점에 고유준의 애정이 샘솟기 시작했다.
“야, 내가 너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하아, 알겠냐, 니가.”
“알아. 내가 어떻게 몰라. 좀 나와라, 열받네.”
난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고유준을 떼어 내려다 포기하고 고유준의 소주잔을 멀리 치워 버렸다.
“야, 그래도 챙겨 주는 친구 있으니까 좋다. 유준이 취한 거야?”
“어. 지금부터 고유준이랑 눈 마주치지 마. 마주치면 달라붙을 거야.”
“그게 뭐야. 주정이 달라붙는 거임?”
희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자리 좀 만들어 줘.”
“……어어, 그래. 여기 앉아. 그, 기훈아…….”
갑작스러운 온기훈의 등장에 희수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를 벌려 주었다.
온기훈은 별 고맙다는 말도 없이 곧장 희수에게서 시선을 떼고 이철민의 옆자리에 앉았다.
떠들썩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말 그대로 초를 치는 등장이었다.
나에게 붙어 있던 고유준마저 정색하며 떨어져 온기훈에게 집중했다.
“……왜.”
“뭐가? 나도 고기 먹으러 온 건데 다들 표정이 왜 그래?”
대충 분위기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하는 저 뻔뻔한 태도 좀 보라지.
물론 온기훈은 이철민이 우리에게 모든 걸 알렸다는 것까진 모를 것이다.
그러니 회식 자리처럼 갈 곳 없을 때 우리 곁에 오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겠지.
“야, 너 진짜 어이-.”
“고유준.”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고유준의 말을 이철민이 막았다. 이철민은 고개를 저으며 고유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 신호를 보냈다.
아직도 온기훈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건가?
다 끝난 마당에?
그렇게 체할 것만 같은 불편한 식사 자리가 재개되었다.
“다니엘레, 나한테도 술 좀 줄래? 너희는 술 안 마셔?”
“네가 따라 마셔! 난 손이 없어!”
“…….”
온기훈은 다니엘레를 노려보며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르고 나에게 권유했다.
“현우는?”
“난 스케줄이 있어서. 이놈도 챙겨야 하고.”
영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고유준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쉽다. 원래 회식 자리는 술이 좀 들어가야 재밌는데. 내 드라마 회식 때는 다들 술을 좋아하셔서 즐거웠거든.”
딱히 궁금하지도 않은 TMI까지 말하며 억지로 억지로 대화를 이어 나가는 모습이, 관점을 다르게 하면 우리가 온기훈을 괴롭히는 것으로 보일 것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룸 안에 촬영 팀 이외에는 아무도 없어서 천만다행이지 원.
어지간히 불편한 티를 내며 회식을 이어 나갈 때 잠시 말을 멈춘 온기훈이 활짝 미소 지으며 이철민을 바라보았다.
“근데 철민아, 너 요즘 왜 내 연락에 답장 안 해?”
저런 미친놈이?
“……바빠서.”
“바쁘다면서 현우랑 유준이 팬 미팅에는 가고 했던데, 내 연락에 답장할 시간이 없었을 리가. 이러면 좀 곤란한데?”
“…….”
“네가 아무리 바빠도 나만큼 바쁘지는 않을 거 아니야.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할까?”
“야, 너 뭐 하냐?”
굉장히 불편해진 분위기. 난 들고 있던 젓가락을 온기훈에게 던져 버렸다. 젓가락은 온기훈의 몸에 맞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제야 온기훈이 인상을 푹 쓰고 날 바라보았다.
“너 지금 뭐 던진 거야?”
“젓가락. 야, 애가 불편하다잖아. 뭘 ‘나가서 얘기 좀 할까’야? 여기서 해.”
“…….”
시끌벅적한 공간, 카메라는 꺼졌고 마이크 또한 없다. 아무도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는 지금, 딱 지금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너 어쩌려고 그러냐? 진짜 어쩌려고 이렇게 행동해?”
“무슨 소린데?”
“땐 굴뚝엔 연기가 날 수밖에 없어. 너 이딴 식으로 남 협박해서 분량 챙기고 이러는 거 언제까지 할 수 있을 거 같냐? 분위기 파악하고 딴 데로 가라, 그냥.”
“…….”
온기훈은 영악한 놈이다. 돈 없고 힘없는 녀석 하나 건드리는 건 쉽게 해도 같은 업계에 있는 연예인, 그것도 본인보다 인기 있는 연예인에겐 한없이 약하다.
이 자식은 비열하긴 해도 업계 사람들의 이야기, 이를테면 지금 나와 자신의 사소한 다툼을 공공연히 말하고 다닐 깡은 없다.
말해 봐야 인기가 곧 힘인 이 업계에서 온기훈의 편을 들어 줄 사람도 없고.
“이철민, 지금 온기훈 차단해 뒀으면 그거 풀어. 앞으로 전화받아. 전부 녹음해 놔.”
“뭐?”
“이딴 짓 하면 신인 배우 하나 어떻게 묻히는지 보자고.”
“현우야,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싫으면 괴롭히지 말고 저리 가든가. 지금 누가 누구 눈치를 보는 거야? 온기훈 네가 이철민 눈치를 봐야 할 판에.”
이철민에겐 지금까지 온기훈과 나눴던 수많은 메시지들이 있다.
얼마나 이철민을 만만히 봤으면 자신이 도리어 폭로당할 수도 있다는 경우의수를 전혀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
여러모로 재수 없고 대단히 멍청한 놈이다.
온기훈은 자존심이 단단히 상한 듯 뚱한 얼굴로 바닥만 바라보다 일어났다.
“갈게. 다음에 보자.”
정말 짜증 난다, 힘없는 사람만 피해자가 되는 게.
기껏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이철민 대신 말다툼하는 정도라니.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방송 <졸업합니다>에서의 온기훈은 적당히 착한 신인 배우로, 이철민은 사회성 부족한 일반 출연인으로 나오겠지.
이것으로 이철민이 촬영 이후 온기훈의 연락을 받고 홧김에 폭로해 2차 폭로, 3차 폭로 끝에 전 출연자가 자중하게 되는 일은 없어지겠지만 딱히 좋은 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땐 굴뚝엔 연기가 날 수밖에 없는 법.
어떤 방식으로든 온기훈은 업계에서 조용히, 또는 떠들썩하게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러나 당분간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는 연예인, 추억고 동문이라는 공통점까지 생겨 한동안 이 방송 저 방송에서 진짜로 만나게 될 것 같아 슬프다.
“하아…… 인생. 이철민, 아까 차단 풀라는 거 그냥 한 말이고 계속 차단 박아 둬. 젓가락 새거…….”
“어? 어.”
이철민은 진짜 차단을 풀려 만지작거리던 휴대폰을 머쓱하게 집어넣었다.
“현우, 아까 두어 잔 마시지 않았어? 얘는 술 취하면 거칠어지나?”
“아냐, 저번에 술 취했을 때는 귀여웠어. 응응거린다고?”
그 와중 고유준의 주정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난 인상을 팍 찌푸리며 고유준의 등짝을 내려쳤다.
“하지 마, 제발. 너 이거 술 깨고 곱씹으면 이불 찰걸.”
저번엔 별생각 없었는데 맨정신으로 듣고 있으려니 진짜 미칠 것 같고 도망치고 싶다.
“평소 화도 잘 안 내는 애가, 오죽 꼴 보기 싫었으면……. 괜찮아. 다음엔 형이 싸우께~. 현우는 이제 좋은 것만 봐. 무슨 말인지 알지?”
“알지 알지. 크로노스 사랑한다는 말이잖아.”
“잘 아네. 수환 형 어딨어?”
“수환 형 저기.”
냉큼 가서 혼나고 와라.
내가 수환 형을 가리키자 고유준은 고기쌈을 들고 수환 형한테 달려갔다.
다른 애정 타깃은 수환 형인 모양이다.
수환 형에게 쌈 먹이는 고유준을 어이없이 쳐다보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 쳤다.
“……깜짝이야.”
이철민이었다.
“야, 잠깐 밖으로 나와.”
“……싸우러?”
혹시나 싶어 묻자 이철민이 고개를 저었다. 머뭇대는 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라 나는 선뜻 일어나 이철민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