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한번 아이돌-266화 (266/475)

12) 비갠 뒤 어게인 (39)

주한 형, 윤찬이 그리고 고유준의 댄스 파트가 마무리되었다.

뒤에서 대기하던 나와 이진성이 다시 앞으로 나서고 마지막 댄스 브레이크가 이어졌다.

예전 연말 무대에선 이때쯤 댄서들이 대형 깃발을 가져와 휘날려 주었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그렇게까진 하지 못했다.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있을 거야

두려워할 필요 없어

너의 시간은 멈추었으니

마음이 깊어질 시간은 영원히-

주한 형의 파트가 끝나자마자 댄서들의 손이 온몸에 다닥다닥 붙어 왔다.

주한 형이 끌려가듯 뒤로 사라지고 점점 조명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나에게만 내려오는 스포트라이트.

양 사이드의 대형 화면 모두 온전히 내 얼굴을 비춰 주며 내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난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터덜터덜 걸어 중앙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시간이 꽤 길었는데 그동안 갑작스레 터져 나온 관객들의 함성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렇게 도착한 중앙 스테이지의 가운데. 천천히 무릎을 꿇고 있자 나를 대신해 내레이션이 작은 중얼거림을 읊었다.

영원히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비로소 나를 비춰 주던 조명까지 모두 다 꺼지자 나는 환호 속에서 바닥을 짚은 채 숨을 골랐다.

사방에서 감탄사가 쏟아지고 말소리도 들려왔다.

난 한참 그렇게 무대 소리를 듣다 다음 공연을 위한 진행이 시작되고서야 암전 속에서 인사하고 서둘러 무대를 내려왔다.

오랜만에 이렇게 넓은 무대를 뛰어다니니 힘들긴 하구나.

고작 한 곡 한 내가 이 정도이니 다른 멤버들은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을 거다.

날 데리러 온 스태프들과 함께 대기실로 향하자 역시나 멤버들은 녹초가 되어 각자 드라이기를 손에 쥔 채 널브러져 있었다.

“왔냐?”

“왔다. 야, 너네 뒤에서 봐도 잘하더라.”

“잘하기는 무슨. 멤버 하나 없다고 위에서 얼마나 허우적거렸는지 모르지?”

“현우 형이 얼마나 큰 존재인지 다시금 깨달았어요.”

“무대 중앙이 텅텅 비어 가지고 아주.”

“미안.”

내가 사과하자 멤버 모두가 우르르 뭐가 미안하냐며 화를 냈다.

너무 크게 소리치길래 당황하며 웃다가 스타일리스트 누나가 시키는 대로 앉아 조용히 머리나 말렸다.

우리의 공연이 끝난 이후엔 또 한참이나 대기해야 했다.

듣기론 먼저 돌아간 아티스트도 있다고는 하는데 페스티벌 마지막쯤에 하는 단체 인사를 위해 대기 중인 이들도 있다고 했다.

아까 자기 무대가 끝났는데도 굳이 남아서 눈 찢으며 조롱하던 알렉트로즈도 분명 그중 하나일 터다.

대기하는 동안 <비갠 뒤 어게인> 측에서 준비한 일정은 딱히 없었다.

무언가 일정을 짜기에도 애매한 시간이라 우리는 그저 카메라를 대동한 채 페스티벌의 남은 공연을 보거나 주변 부스를 돌아다니며 먹거리, 게임을 즐겼다.

페스티벌 주최 측은 12시를 훌쩍 넘겨 새벽 2시가 가까워지고서야 마무리하겠다며 우릴 호출했다.

열기로 가득했던 페스티벌의 끝, 원 없이 실컷 논 사람들과 아티스트들이 DJ의 디제잉에 맞춰 여유롭게 춤을 췄다.

남아서 호출당한 아티스트들은 모두 무대에 올랐는데 우리 외에는 다들 면식들이 있는 모양이라 우리 빼고 열심히 어울려 즐거워했다.

쟤네가 우릴 따돌린 게 아니고 우리가 쟤넬 따돌린 거야.

뭐 우리도 우리끼리 흥 타며 잘 놀았다.

사방의 스피커에서 클럽에서나 들을 법한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불태울 체력이 남아 있는지 다들 열심히 춤추고 즐길 무렵, 난 조금 시끄럽다는 생각을 하며 슬그머니 귀로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그때 윤찬이가 몸으로 내 시야를 가로막으며 미소 지었다.

“형은 예쁜 것만 보세요.”

“어?”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슬그머니 뒤로 가더니 리허설 때의 고유준처럼 내 귀를 조심스럽게 손으로 덮어 막아 주었다.

그 순간 ‘퍼엉-!’ 하고 내 귀를 덮은 손 너머로 자그만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작은 소리에마저 움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다 살그머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높이 올라간 빛이 활짝 펼쳐지며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하나, 둘, 또 하나, 셋.

연속으로 터지는 화려한 폭죽에 시선도 떼지 못한 채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

“……고마워, 윤찬아.”

터지는 소리도, 사람들의 좋아하는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조용한 폭죽놀이였다.

내가 이런 걸 본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그조차도 너무 아름다워서, 멤버의 배려가 너무 고마워서 마음이 아릿하게 울려 왔다.

폭죽을 끝으로 길었던 페스티벌은 마무리되었고 우리의 <비갠 뒤 어게인>도 뒤풀이만을 남겨 두게 되었다.

* * *

페스티벌 당일은 새벽 늦게 숙소에 도착해 멤버 모두가 지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하나둘씩 일어나는 순서대로 <비갠 뒤 어게인>을 마무리하는 인터뷰를 진행했고 나는 한참 일어나지 못하다가 언제나 그렇듯 고유준의 발에 깨워져 간신히 준비만 하고 인터뷰장으로 향했다.

비몽사몽 하던 정신은 다행히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에 또렷해졌다.

-<비갠 뒤 어게인> 촬영이 모두 마무리되었어요. 어떠셨나요?

“음, 굉장히…….”

고생했지, 그냥 고생이 아니라 하루도 빠짐없이 정말 많이.

“즐거웠어요. 평소 하지 못했던 곳에서 공연을 즐기고 관객들과 소통하는 것도 좋았고, 뭔가 오히려 저에게 낯선 곳이라 더욱 즐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평소 동경하던 아티스트들도 만났고.”

이상하리만치 하나같이 성격이 더럽긴 했지만.

-정말 즐거우셨군요.

“네, 무엇보다 방송이나 공연에서 자주 즐겨 불리던 노래, 살면서 절대 불러 보지 않을 법한 노래처럼 많은 도전과 모험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나요?

“저는 가장 처음 했던 길거리 공연이요. 마지막 페스티벌도 좋았지만 뭔가 관객들이랑 함께 즐기며 무대 한다는 느낌? 놀면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른다는 느낌이어서 좋았습니다.”

그 이후에도‘다음에 또 <비갠 뒤 어게인>을 한다면 어떤 것을 해 보고 싶어요?’,‘캘리아 로렌스 씨와의 곡은 조만간 들을 수 있나요?’,‘시청자분들이 주목해서 봐 주었으면 하는 부분들은 무엇인가요?’ 등등의 질문이 이어졌는데, 전부 무난하게 답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무난하게 인터뷰가 마무리되고 슬슬 일어나 뒤풀이 장소로 향하려던 나는 몸을 움직인 지 얼마 되지 않아 곧장 제작진에게 다시 붙들렸다.

-현우 씨.

“네?”

-저희가 인터뷰하시는 멤버분들 한 분 한 분께 서프라이즈로 알려 드렸는데요.

“뭐가요?”

-저희 어제 페스티벌 출연했던 부분, 현우 씨가 무대에 올라간 마지막 부분뿐이지만 TV에 방영된다고 하네요.

“……어.”

정말? 왜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난 제대로 된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저 카메라에 대고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네?’ 하고 다시 한번 되물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주최 측이 우릴 영 탐탁지 않아 한 데다 리허설부터도 대우가 엉망이라 TV 방영은 그냥 일말의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정말 말 그대로 ‘갑자기 왜?’ 하는 의문만 계속 들었다.

그러자 제작진은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여러분들 무대가 굉장히 좋아서 방영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대요. 정말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난 어리벙벙히 제작진에게 인사하고 인터뷰장에서 나왔다.

좋은 일인데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다.

보통 보통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것들이 이루어지곤 하지 않던가.

상상조차 한 적 없던 좋은 일이 생겼지만 그냥 실감하지 못한 채 멍하니 숙소로 되돌아왔다.

내가 겨우 있는 그대로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은 이미 인터뷰를 통해 소식을 알고 있던 멤버들이 활짝 웃으며 다가와 다 같이 강강술래를 돌게 되었을 때였다.

출연진 모두의 인터뷰가 끝났을 때 레나 선배님이 머물던 숙소에 한가득 뒤풀이 상이 차려졌고, 우린 드디어 촬영도 막바지라는 생각에 좋아하며 뒤풀이를 시작하였다.

* * *

주한 형을 제외하고 미국에선 아직 스물이 넘지 않은 우리들의 컵엔 일제히 탄산으로 가득한 사이다가 채워졌다.

나와 고유준은 굉장히 많은 의미가 담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유준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오늘만큼은 술 한잔하고 드디어 이 말도 탈도 많았던 촬영이 끝났음을 축하하고 싶었단 말이다!

우린 동시에 시선을 돌리고 동시에 음식을 집어 아작거리며 동시에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행동을 보아하니 고유준도 나랑 비슷한 생각인 모양이다.

둘 다 술 못하기는 하지만.

술을 입에도 댄 적 없는 막내들은 각자 좋아하는 요리를 먹으며 재밌게 즐기는 듯했고, 레나 선배님과 캘리아를 포함한 어른들은 이미 술판이 벌어진 지 오래였다.

주한 형이 술을 먹고 취해서 잔소리를 해 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의외로 주한 형, 술 먹고도 어른들 앞에선 얌전했다.

주사도 사람에 따라 조절하나 보다, 저 형은.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술을 마시고 우린 우리끼리 또 회포를 풀었다.

“고생했어.”

“고생하셨어요.”

“우리 다음에 우리끼리도 한번 와 보자.”

비록 이번에는 보는 눈이 많아 편한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아! 여러분! 너희들을 위한 신곡! 한번 들어 볼래?”

어른들에게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조용히 대화하던 우리의 시선이 일제히 캘리아에게로 향했다.

바로 오늘, 알렉트로즈를 공개적으로 저격했다며 특보가 난 미국 최고의 샐럽 캘리아는 지금 우리 앞에서 잔뜩 취한 상태로 제 휴대폰을 높이 들어 올리고 있었다.

‘참 감개무량-.’

“강주한이랑 내가 틈날 때마다 싸워 가며 만든 곡이야!”

“대놓고 싸웠다고 말하지 마! 그냥 음악적 견해 차이라고 하면 좋잖아?”

“어우, 주한, 또 잔소리!”

캘리아가 질린 표정을 지으며 귀 파는 시늉을 했다.

한동안 줄곧 같이 음악 작업을 하더니 캘리아 또한 강주한의 잔소리를 많이 들은 모양이다.

“어쨌든 들어 봐!”

“참고로!”

캘리아가 음악을 틀기 전, 마찬가지로 술기운이 돌아 좀 들뜬 것 같은 주한 형이 끼어들어 말했다.

“우리 타이틀곡은 아니야!”

“SHIT! 꺼져! 주한! 들어 봐!”

둘이 저러면서 어떻게 음악 작업을 한 거지?

어쨌든 캘리아는 휴대폰 속 음악을 틀었고, 모두 잠시 대화를 중단한 채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곡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 부분은 방송에 나갈 때 편집되거나 다른 음악을 덧씌워 대체될 것이다.

캘리아와 주한 형의 작업이다. 그것도 캘리아가 거의 완성해 둔 곡에 주한 형의 소스가 들어간 곡.

절대 안 좋을 수 없는 곡이라고 생각했고 역시나 듣자마자 첫 파트부터 최근 트렌드, 최신 감성 다 퍼펙트하게 잡았다는 감탄부터 했다.

처음에는 너무 좋아서 줄곧 감탄하며 듣기만 했고, 두 번째로 생각한 건 ‘서로 양보 굉장히 많이 했구나.’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각자의 곡 스타일이 반반씩 섞여 있는지.

제 작품에 대해 욕심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합을 잘 맞춘 걸 보면 그렇게 싫다고 싸워도 솔직히 음악 취향은 잘 맞았던 모양이다.

“근데 이걸 타이틀곡으로 안 낸다고? 이것보다 좋을 수 있어?”

“맞아. 이거 너무 좋은데? 타이틀 아니면 너무 아쉽지 않나.”

내가 말하자 주한 형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디지털 싱글로 낼 거야. 캘리아 로렌스 피처링인데 묻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타이틀로 하기엔, 우리 첫 정규 앨범 타이틀인데 멤버 목소리만 들어가길 바라지 않아?”

“그건 그런데, 뭐 디지털 싱글이면 이 곡도 충분히 주목받을 수 있단 말?”

주한 형은 고유준의 말에 수긍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어쩌면 뮤비도 나올 수 있고. 타이틀은 이미 예전부터 컨셉이 정해져 있어서 이걸론 못 나갈 거야.”

우린 여기까지 말하고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이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곤 주한 형이 캘리아를 바라보며 슬쩍 말했다.

“그런데 너 우리한테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캘리아?”

주한 형의 조곤조곤한 말에 신나서 레나와 대화를 나누던 캘리아가 멈칫, 어쩐지 조금 주눅이 든 얼굴로 슬그머니 일어섰다.

“레나 언니, 언니들, 이야기 나누고 있어. 나 쟤네랑 잠시 이야기 나눌래…….”

“어? 그래라.”

그게 뭐 별거라고. 레나 선배님은 흔쾌히 캘리아를 놓아주었고 캘리아는 굉장히 얼굴이 빨개진 채로 다가와 우리 앞에 앉았다.

“어어…… 어서…… 오세요?”

당황한 진성이가 인사를 하고.

“술, 술이나 한잔할래?”

더 당황한 캘리아가 미성년자들에게 술을 권했다.

“아니아니아니아니요…….”

우린 기겁하며 동시에 손을 내저었고 캘리아는 뒤늦게 자신의 바보 같은 행동을 깨달으며 술병을 내려놓았다.

“할 말이 뭐야?”

내가 괜히 주한 형을 보며 묻자, 주한 형이 캘리아를 보며 또 조곤조곤 말했다.

“캘리아, 나랑 약속했던 거 천천히 말해도 되니까.”

“됐어! 그, 너희들, 내가 미안해.”

“예?”

“그때 늦게 오고 오해해서 펑크 내고, 그냥 무례했다고 생각해. 미안했어.”

“아, 저흰…….”

물론 기분은 많이 나빴는데 상대가 너무 톱이라 반쯤 체념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걸 설마 사과해 줄 줄은.

“내 행동이 얼마나 무례했는지 주한이 음악 작업을 하며 틈틈이 알려줬어. 같이 협업을 하는 사이에 일방적으로 한쪽을 무시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 돼. 정말 미안했어.”

아 캘리아도 예외 없이 주한 형의 예절 교육을 들은 모양이었다.

“아…… 주한 형아…….”

단번에 눈치챈 예절 교육 1기생 진성이가 저도 모르게 탄식하고. 우린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던 불만이 풀리며 캘리아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 주었다.

그렇게 조금 풀린 분위기에 캘리아와 주한 형의 작업했을 때의 썰 등을 듣고―진성이는 도중부터 전혀 못 알아듣겠다고 나와 윤찬이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또 각자 이야기를 나누며 뒤풀이를 마무리했다.

“<비갠 뒤 어게인> 촬영 마치겠습니다!”

“와아아아!!!!”

뒤풀이의 끝쯤 PD님의 우렁차고 속 시원한 목소리와 함께 <비갠 뒤 어게인> 촬영 종료를 알리는 슬레이트가 쳐졌다.

이젠 제작진 모두가 함께하는 뒤풀이 시간.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고생한 만큼 새벽까지 이야기는 끊일 줄 몰랐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린 여전히 비몽사몽인 채로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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