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한번 아이돌-307화 (307/475)

13) 정규 1집 (40)

아무리 쉬워졌다고 한들 한때 많은 고인물 유저들을 고통의 수렁텅이에 빠트렸던 레이드다.

오버 스펙의 장비를 착용하고 왔다고는 해도 레이드는커녕 <원아워즈> 자체를 처음 해 보는 뉴비들이 기믹도 모른 채 이걸 한 번에 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좀 심하다.

-죄송합니당..ㅜ

-저 그냥 누워 있는 편이 나을 듯

난 한숨을 쉬며 부활 스킬을 스킬창에서 뽑아 버렸다.

살려도 죽고 살려도 죽고 살리면 또 죽는다면 저들은 더 이상 팀원이 아니다.

그저 괜히 마나만 낭비되는 하나의 함정일 뿐이지.

그럴 거면 그냥 계속 저대로 죽은 채 지켜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힐러님 저 ㅎㅣㄹ좀..

-ㅜㅜ죄송해요 마나가 부족해요

그도 그럴 게 자꾸만 죽는 출연진 때문에 정작 힐(치료)이나 부활이 필요한 능력 있는 팀원들한테는 마나 부족으로 스킬 사용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정말 다행인 건, 그나마 잘 버티는 팀원들이 죽으면 죽을수록 실력과 테크닉이 빠르게 쌓이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난 또 죽어 누워 있는 팀원들을 향해 채팅 하나를 올리고 레이드에 집중했다.

-님들 저 부활키 뽑았어요

그러자 빠르게 올라오는 시체들의 채팅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힐러님 흑화하셨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ㅜㅜㅜㅜ죄송해요ㅜㅜㅜ용서해 주세요ㅠㅠ한번만 더 살려 주십셔…

-스킬쿨이 도는 바람에 그만…

안 보인다. 안 보여. 하나도 안 보여.

애써 그들을 무시하며 보스를 때리는 데 집중했다.

-오 이제 다들 잘하시네

살아남은 사람은 나 포함 셋.

이들은 보스의 기믹에도 익숙해져 웬만해선 맞지 않는다.

그렇게 조금씩 합이 맞춰지고 레이드의 끝을 향해 달려 나갈 때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히히히힛~ 진실은 하나뿐이지. 범인은 바로 나라는 것이야.]

비운의 탐정이 자신의 비밀을 밝히더니 악마처럼 웃으며 땅을 흔들고 연속 공격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

-??뭐야

-저 안 움직여지는데요?

살아남은 자들은 동요하며 표시도 없이 퍼부어지는 공격을 피하려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죽은 자는 그저 채팅창에 물음표만 띄우고 있었다.

‘이게 뭐지?’

지금까지 없던 패턴에 나 또한 멈춰 선 채 미친 듯이 요동치는 체력바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마치 보스의 주특기처럼 화려하게 쏟아붓던 불길은 어느새 내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며 시야를 막았다.

그러고서야 이 상황이 딜 부족(적에게 가하는 대미지 부족)으로 인한 보스의 즉사기(게임에서 상대를 즉사시키는 필살기)였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깨달아 봤자 이미 타이밍은 늦었고 우리는 이 상황의 파훼법을 모른다.

뒤늦게 탱커님이 배리어 스킬을 발동해 보신 듯했지만 아쉽게도 발동되기 전 우린 모두 죽어 정신을 차려 보니 처음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동안 열심히 손, 눈, 머리를 굴리며 게임에 임한 시간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허무한 상황.

나와 가장 마지막까지 버텼던 탱커님, 그리고 딜러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ㅜ저희 여기까지 할까요?

-다음에는 더 연습해서 오겠습니다ㅜㅜ죄송해여..

-공략 꼭 보고 오겠습니다ㅜㅜㅜ

딱히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았지만 관전하던 팀원들은 열심히 공부해 오겠노라 말하며 미안함을 표했고, 난 허무함을 뒤로한 채 캐릭터를 점프시키며 괜찮다는 표현을 했다.

-이제 다들 퇴장하시죠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탱커님이 ‘/손인사’ 감정 표현을 한 뒤 가장 먼저 레이드에서 탈출했고 그 뒤로 차례차례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힘들어…….”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내뱉자 지혁 형 역시 다른 팀원들처럼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와 내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고생했어, 현우야. 형도 연습 좀 해 올게.”

“응, 아마 형은 연습하면 되게 잘할 거야. 뭐든 잘하잖아.”

지혁 형은 또 과하게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막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레이드 장소를 나오자 다시 보이는 만남의 광장 켈루스틴의 텔레포트 분수대.

그곳에 대기하던 PD 캐릭터가 한차례의 레이드 경험으로 지친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ㅋㅋㅋ다들 지치신 것 같은데

-어둠의 궁전 레이드 어땠나요?

PD님의 말에 다들 잠시 말이 없다 한마디씩 툭 채팅을 올렸다.

-어려워요ㅠ

-계속 누워 있다 와서 잘 모르겠습니다ㅜ

-좀 연습해야 할 것 같아요

-이거 등급으로 따지면 상중하 중에 어느 정도인가요?

-난이도

-전체로 따지면 중상 정도요?

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연습이나 경험이 없다고는 해도 부활하자마자 죽는 사람들이 반이었다.

중상 정도의 레이드에서 이 정도의 수준인데 이 팀원으로 공대를 짜서 최상위 콘텐츠에 도전을 한다?

그게 말이 되는 걸까.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전혀 불가능하다고 본다.

스케줄 죄다 비우고 프로게이머들처럼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원아워즈>만 하고 있지 않는 이상 단기간 안의 클리어는 무리가 아닐까.

-여러분들은 다음부터 <원아워즈>의 현재 시점 가장 어렵다는 엔드 컨텐츠, ‘신념의 불꽃’ 레이드에 도전하게 됩니다

-물론 그때는 지금처럼 온라인 정모가 아니라 모두 한 장소에 모여서 원활히 소통하시며 진행하시게 될 거예요

하지만 클리어가 되지 않아도 예능적인 그림은 만들어져야 한다.

감동.

감동을 만들어야 했다.

어쨌든 출연진이 레이드에 진심이 되어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며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국 클리어하지 못했다는 분함과 서러움의 눈물.

적당한 감정싸움과 화해.

“잘했어. 잘했어. 이만하면 잘한 거야.”

이런 식으로 누군가 눈물 흘리는 출연진을 토닥이며 복돋아 주는 그림이 훨씬 현실적으로 와닿았다.

이것도 나름 괜찮을 것 같은데?

<원아워즈> 입장에서도 겜알못(게임을 잘 모른다는 뜻) 뉴비들이 몇 주간 노력했다고 깰 수 있는 콘텐츠보다 더욱 도전의지가 생기지 않을까.

-공대장은 힐러님^^

-힐러님 조아요~

-힐러님이 제일 게임에 익숙해 보이셔서요

내가 나름의 계획을 짜는 동안 형식상의 공대장 투표가 이루어졌고 제작진의 예상대로 공대장은 내가 맡게 되었다.

공대장에게는 무거운 책임감이 따르지만 그만큼 분위기를 좌지우지하기 참 좋은 위치다.

-감사합니다ㅜㅜ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내가 ‘/인사’ 감정 표현을 하자 팀원들이 ‘/박수’ 감정 표현을 하며 공대장 취임을 축하해 주었다.

훈훈한 우리들을 지켜보던 PD님도 함께 박수를 보내며 분위기를 맞춰 주다 점프를 뛰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자, 이제 공대장님도 정해졌으니 이제 슬슬 캐릭터가 아니고 진짜로 통성명을 해 볼까요?

-오옹

-여러분들은 지금 서로가 누구인지 모르시는 상태로 레이드를 함께하였죠.

-공대장 투표의 공정성과 색안경없는 실력 평가를 하시라고 서로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우선 레이드를 진행해 보았습니다.

-우선 서로가 누구인지 밝히기에 앞서 저희들의 아지트로 먼저 이동하실까요?

PD님은 좀 더 다른 유저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안히 소통할 수 있도록 제작진에서 독자적으로 구매한 개인 영지를 소개시켜 주었다.

이곳에서 우린 서로 통성명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욤!^^하이텐션의 리더 우지혁입니다

-게임은 처음 해 봐서 오늘 부끄러운 모습 많이 보였는데 열심히 연습하겠습니다!

출연진은 한 사람 한 사람씩 소개될 때마다 ‘/박수’ 감정 표현을 해 주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출연자는 지혁 형, 얼마 전 함께 배짱이를 촬영했던 온정우 선배님을 포함해 개그맨 두 명, 배우 한 명이었다.

-안녕하세요. 크로노스의 서현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헐 현우 씨 반가워요. 얼마 전에 우리 촬영하면서 봤죠?^^

-힐러님 너무 잘한다고 했더니 역시 젊은이였군!

-에이 형님 요즘 그런 말하면 꼰대라고 해요ㅡㅡ

이제 레이드 내에서 누워 계시던 선배님들의 대화 속에서 난 아직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채 멀뚱히 서 있는 탱커님을 주목했다.

내가 출연진 중 가장 궁금한 사람은 저 사람이었다.

말투를 보아 나이는 좀 있으신 듯하고, 게임에 억대는 가볍게 넘길 정도로 돈을 쏟아부은 MMORPG 고인물.

딱 죽고 싶을 정도로 잡몹을 몰고 공격을 다 맞긴 했지만 보스만은 잘 때려잡은 사람.

레이드 도중 동지애도 나름 느꼈던지라 캐릭터 뒤에 숨은 실제 인물이 누구일지 굉장히 궁금했다.

-자, 다음. 우리 전사. 탱커님.

PD님의 말에 탱커님이 점프를 뛰고 한 박자 늦게 채팅을 올렸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원아워즈>의 개발사 틴타윙스의 대표 이미향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출연자가 튀어나왔다.

굉장히 센스 좋고 능숙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개발사 대표님이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개발사 대표치고는 실력이 안 좋았겠지만 점점 잘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고 보니 개발사 대표님이 <원아워즈> 초대 디렉터라고 하셨던가.

지금도 적자를 보는 게임에 큰돈 들여 예능 제작도 할 정도로 상당한 애정이 있다고 들은 적 있는 것도 같다.

출연진은 빠르게 예능적인 아부와 굽신거리기를 하기 시작했고 PD님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며 오늘의 정모를 마무리했다.

“현우야, 다음 주 기대해도 좋아. 형은 천재라 연습 좀 하면 금방 잘할 수 있어.”

“어, 그래.”

“다음 주엔 너랑 끝까지 살아남는 게 내가 될-.”

나는 열심히 자기 어필을 하는 지혁 형을 토닥여 준 뒤 매니저 형과 함께 숙소로 향했다.

* * *

한창 활동할 때는 피로한 상태가 기본이다 보니 차에서 미친 듯이 졸음이 쏟아지는 것도 익숙하다.

“아, 피곤해 죽겠어~ 주한 형 담요 귀여운 동생한테 빌려 주면~.”

“싫어.”

“진성이 담요를 귀여운 형아한테 빌려주면~.”

“누구세요?”

“윤찬이 담요를 잘생긴 형아한테-.”

“윤찬이 잔다.”

“넵, 주한 형님.”

고유준은 이리저리 돌아가며 멤버들에게 장난을 치다 잠이 들었다.

<환상령> 활동엔 유독 행사 스케줄이 늘어난 데다 나뿐만 아니라 다들 각자 예능 스케줄까지 있으니 오죽 피곤하겠는가.

근데 그런 하드한 스케줄 속, 멤버들 중에서도 유독 피곤함에 쩔어 있는 멤버가 있었다.

윤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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