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휴식기 (5)
역시 긴장된 분위기부터 풀려고 하는 거구나.
주한 형이 고유준을 가리키는 순간 긴장감이 탁 풀리는 듯했다.
‘보나 마나 입 좀 다물고 있으라든가 장난 좀 작작 치라든가 하겠지.’
그럼 고유준은 또 웃음을 흘리면서 ‘싫은데?’와 같은 장난을 쳐댈 것이다.
그러니 주한 형이 고유준을 가리켰다는 뜻은 진지할 생각은 없다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느끼는 건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윤찬이의 표정도 한층 풀렸다.
하지만 주한 형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외의 말이었다.
“형은 유준이한테 항상 고마워하고 있거든. 너도 늘 즐거운 일만 있는 건 아닌데 늘 밝게 멤버들을 챙겨 주고 하는 거 안다.”
“……뭐.”
덕분에 장난칠 생각으로 가득하던 고유준이 도리어 민망한지 주한 형의 시선을 피했다.
“가볍게 지내는 것 같아도 굉장히 어른스럽고 배려심 있고 생각많고-.”
……저 형 왜 저래?
주한 형을 알고 지낸 지 어느덧 9년.
주한 형을 고유준을 동생으로 굉장히 아끼긴 했지만 고유준에게 대놓고 진지한 칭찬을 늘어놓는 건 처음 봤다.
그도 그럴 게 예전부터 고유준은 주한 형이 진지한 꼴을 못 봤고, 주한 형은 그런 고유준에게 늘 화를 내거나 물리적으로 제압했기 때문이다.
“주한 형도 술 마셨나?”
진성이가 나에게만 들리도록 귓가에 속삭였다. 진지하게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쩐지. 그게 아니고서야 두 사람 사이에 저렇게 훈훈한 분위기가 나올 리 없는데.”
진성이는 납득하고 나에게 기울였던 몸을 바로 했다. 그러자 뒤에서 지켜보던 수한 형이 술을 마시진 않았다며 잘못된 정보를 정정해 주었다.
그러자 진성이는 재차 충격받은 표정을 지은 채 떨리는 눈동자로 주한 형을 쳐다보았다.
그러든가 말든가 혼란스러워하는 멤버들을 못 본 척 계속 칭찬을 이어 가던 주한 형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뻘쭘해하는 고유준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는 이렇게 다 좋은 앤데-.”
“아니 난 별로 한 것도 없-.”
“그렇게 형이 말하는 거 끊어 먹는 것 좀 고쳐 줬으면 좋겠거든.”
“……엉?”
“특히 일 관련해서 말할 때. 그리고 하나 더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유준이 네가 친구가 많은 건 좋아. 그런데 연습하거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을 때 휴대폰 만지고 있는 것도 좀 고쳐 줬으면 좋겠어.”
머쓱하기만 했던 고유준의 눈동자가 흔치 않게 당황스러움을 드러냈다.
최근 아이돌 대표 인싸로 불리는 녀석답게 평소 많은 친구들과 메신저를 주고받는 고유준인데, 아무래도 휴대폰 금지가 풀린 이후 그 정도가 심해진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론 개인 시간에 휴대폰을 만지는 거야 전혀 상관없지만 간혹 연습, 리허설 후 대기실에서의 회의 때도 자제 못 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가끔 가볍게 ‘휴대폰 내려.’라고 말하든가 말없이 고유준의 휴대폰을 뺏어 내려놓는 등 옅게 지적하고 말았는데,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말하고 넘어가려는 모양이었다.
“아, 그렇구나. 내가 그랬어? 미안, 앞으로 조심할게. 스케줄 할 때는 휴대폰 꺼 놓을게.”
고유준은 스스럼없이 나오는 자신에 대한 컴플레인에 당황하면서도 수긍하고 반성했다.
“그래, 너는 한번 말하면 잘 고치니까. 이제 형은 끝났어.”
솔직한 고마움을 건네면서도 고칠 점은 눈치 안 보고 확실히 말하는 아주 적절한 조언이었다.
“유준이 차례.”
주한 형의 말에 고유준은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오늘의 고유준이면 당연히 윤찬이려나.
“난 윤찬이.”
그럴 줄 알았다. 주한 형이 윤찬이에게 화를 내기 전엔 고유준도 장난 아니게 불만이 쌓인 상태였었지.
그때 윤찬이가 많이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유준은 적당히 스스로와 타협해서 윤찬이에게 사과해 버리고 끝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고유준의 불만이 사라졌겠는가. 그냥 저 녀석 성격에 그룹 분위기가 험해지는 게 싫어서 넘어간 거지.
그런데 사실 이런 불만이 계속 쌓이면 좀 위험하다.
서로를 배려한다고 속에 품고 있는 불만을 그대로 썩이고 있다가 나중에 해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으니.
“네, 네! 형, 말씀하세요.”
윤찬이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는지 비장한 눈으로 고유준을 바라보았다.
최근 멤버들이 자신에게 불만이 많다는 걸 스스로도 느끼는 만큼 이 상황이 무서워도 응당 마주해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흐음.”
고유준은 입을 다문 채 한숨을 푹 쉬곤 미소 지었다.
“네가 열심히 하는 건 나도 알고 있거든. 네 나름 피해 안 끼치려고 애쓰지만 그럼에도 버거운 건 이해해. 근데 그래도 리허설엔 참여해 줬으면 좋겠어.”
“……아.”
윤찬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차라리 새벽에 혼자 연습하는 시간을 줄이고 그 시간에 잠을 자는 건 어때?”
“연습은……. 아, 계속 말씀하세요…….”
“너 무대에서 실수가 되게 잦아진 거, 사실 리허설 참가만 해도 확실히 줄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것들이 많았거든.”
고유준이 그렇게 말한 뒤 수환 형을 바라보았다.
“이건 수환 형한테도 부탁드리는 거예요. 저는 정말, 무대에서 실수하는 크로노스를 보기가 괴롭거든요, 형.”
고유준이 이렇게 심각하고 노골적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현하다니.
확실히 멤버 모두 진실 게임이라는 상황의 특이성이 있으니 평소보다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낼 수 있게 된 모양이다.
수환 형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리허설은 꼭 빠지지 않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저도 실수하지 않도록 더 많이 신경 쓸게요. 이번 기회에 모두한테 사과하고 싶어요.”
“어어어~ 고개 숙이고 그런 거 하지 마라. 형은 그런 꼴 못 본다.”
고유준이 윤찬이가 고개를 숙이지 못하도록 손으로 어깨를 고정시킨 채 깔깔 웃었다. 그러곤 다시 진지한 톤으로 말했다.
“나는 다만 그거지. 드라마는 네가 하겠다고 결정한 거고 윤찬이 너도 훨씬 바빠질 거 예상했을 거잖아.”
“네, 물론…….”
“그럼 너도 수환 형이랑 따로 상의를 해서라도 그룹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일정 조정을 해 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해. 너도 이제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연습생은 아니니까.”
진성이가 내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유준이 형 오늘 되게 진지하다. 그치?”
“응.”
“저 형도 진지하면 참 멋지고 잘생긴 형인데.”
“응.”
“어이, 거기 이진성, 나 다 들린다.”
고유준이 벌떡 일어나 이진성에게 다가오더니 헤드록을 걸어 댔다.
내 바로 옆에서 제일 덩치 큰 두 사람이 레슬링을 하고 있느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내 몸도 마구 흔들려 댔다.
덕분에 적당한 기세로 술기운이 오르던 몸에 훨씬 빠르게 열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아, 좀 가만히 있어, 이 자식들아. 아니면 나 윤찬이 옆으로 갈래.”
“아악! 이거 유준 형 때문이거든? 와, 현우 형 나 버리는 거 봐.”
난 기어서 윤찬이 옆으로 자리를 피했고, 고유준은 진성이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한참 설치던 고유준은 이내 잠잠해지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씨익 웃었다.
“난 끝. 이제 없어.”
“그럼 윤찬이.”
“저는…….”
윤찬이는 지목 상대를 구하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주한 형, 고유준, 진성이를 한 번씩 힐끔거리더니 힘들게 손을 올려 그나마 편한 진성이를 가리켰다.
“진성이…….”
“응 나일 줄 알았지. 뭔데?”
윤찬이는 진성이에게 언제나 춤 연습을 도와주고 최근 여러모로 화난 게 많았을 텐데 오히려 위로해 줘서 고맙다며, 다만 스태프들에게 과한 투정―예를 들면 염색― 등을 그만둬 줬으면 좋다고 말했다.
진성이는 배신감이라도 느끼는 표정으로 ‘귀엽다며……!’라고 외쳤으나 금방 좀 더 성숙해지겠다고 반성했다.
진성이는 주한 형, 주한 형은 나를 지목하며 언제든 의지하고 있고 기대만큼 잘해 줘서 고맙지만 행사에서 토크 참여에 좀 더 적극적이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몇 번의 턴을 반복하는 동안 갈수록 올라오는 취기에 난 술기운과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했고 급기야 슬슬 잠이 오기 시작했다.
“서현우 취한 거 아니지?”
“안 취했어.”
내 말에 진성이가 날 빤히 바라보더니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 형 아직은 안 취했나 봐. 이 형은 취하면 ‘응……응…….’이것만 하거든.”
주한 형은 진성이의 말에 공감하며 말없이 술잔에 다시 술을 따라 주었다.
난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술잔을 반만 비우고 다시 내려놓았다.
“더 마시면 진짜 취하니까 권하지 마.”
그러자 고유준이 고개를 저으며 내 어깨에 손을 둘렀다.
“아냐 아냐. 얘가 지금도 아예 안 취했을 리는 없고-.”
“안 취했다고. 윤찬이 말 좀 듣자, 인마.”
마침 지금 윤찬이 턴이 돌아온 차였다.
“네가 자꾸 윤찬이 말을 가로채니까 어? 윤찬이가 매번 하고 싶은 말을 못하는 거 아냐!”
“아, 형들 둘 다 쉿쉿! 자, 윤찬이 형.”
진성이가 우리 둘의 입을 손으로 막았고 윤찬이는 끝까지 주저하다 고유준을 지목했다.
“유준이 형, 매일 아침 같이 조깅하면서 좋은 말 많이 해 주셔서 감사해요.”
“고마우면 윤찬이도 형들한테 말 놓고 편하게 부를 생각 없느냐. 비즈니스 친목 아니냐고 우리 사이를 오해해서 형아가 많이 슬퍼.”
이때쯤부터 난 슬슬 물을 찾아 댔던 것 같다. 솔직히 좀 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몇 번의 턴이 지나갔다.
그리고 이번 턴은 진성이. 진성이는 날 지목했다. 난 풀렸던 눈에 바짝 힘을 주고 진성이의 말에 경청하겠다는 자세를 취해 보였다.
“형 좀 취한 거 같은데. 얼굴 빨개, 완전.”
“응, 근데 적당해. 말해.”
“응, 있잖아.”
진성이는 좀 부끄러운 듯 입술을 좌로 우로 몇 번이나 삐죽이다가 툭 말했다.
“나는 형을 진짜 존경해.”
“……갑자기?”
“연습생 때는 그냥 연습생 오래 한 형 정도였는데 지금은 솔직히 좀 멋있다고 생각해.”
난 태연한 척 일단 고개만 끄덕이고 경청했지만 사실 상상이상의 오그라듦에 상당히 경악하고 있었다.
차라리 부끄러워하지라도 말지. 부끄러워하면서 말하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아, 그 와중에도 졸려 죽겠네.
“무대에서의 표현력이나 몸 이용하는 기술도 그렇고. 분위기가 쩌니까 솔직히 따라 해 보려고 한 적도 있는데 내 스타일은 그게 아니니깐……. 아무튼.”
“으응.”
존경한다는 말에 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겠나. 그냥 ‘고맙다’뿐이지.
그래서 표본적인 대답을 꺼내 놓았는데 고유준은 그걸 또 부끄러워한다고 말했다.
……근데 내가 방금 고맙다고 입 밖으로 제대로 말했던가?
“또, 또, 어……. 형이 늘 멤버들 힘들 때마다 자상하게 상담도 해 주고 위로해 줘서 정말로 도움 많이 됐고 또, 어…… 늘 고맙게 생각해요.”
……딱히 부끄럽지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띄워 주면 역시 안 부끄러워질 수 없다.
“응…….”
고유준이 제 팔을 쓸며 몸을 떨었다.
“쟤 무슨 단점을 말하려고 이렇게까지 빌드업 하는 거야? 보는 사람까지 민망하게.”
그러자 진성이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비장한 눈빛만큼 단호하게 물었다.
“그런데 정작 그런 현우 형은 우리한테 숨기는 게 있는 것 아닌지.”
진성이의 말에 수환 형 포함 멤버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향했다.
“나 정말 많이 고민하고 묻는 거야. 형, 많이 걱정돼.”
“……응.”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하아.”
또 딱히 꺼내고 싶지 않은 주제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갑자기 훅 끼쳐 오는 짜증스러움에 남은 반잔의 소주를 들이켰다.
“어어, 야! 미친.”
고유준이 황급히 내 손의 소주잔을 채 갔지만 잔은 이미 비워진 후였다.
말하려고 할 때마다 더욱 철저히 진실을 감춰야만 한다는 걸 비참하리만치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상담도 피하고 있었는데.
난 또 한숨을 깊이 내쉬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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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조건 [극복하라]
상태 : 진행 중(50%->70% NEW!)
-아직 계약자의 회귀 조건이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계약자의 적응 과정이 완료될 때까지 통합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제한 시간이 있는 조건입니다(남은 기한 : 150일).
-특이 사항 : 기억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