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콘서트 (22)
김 실장님의 건배사를 몇 번이나 듣는 건 힘들었지만 멤버들과 콘서트 준비로 미뤄 두었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바빴던 수환 형과 오랜만에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등 꽤 괜찮은 회식 자리였다.
회식을 마치고 나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늦게까지 연습하고 숙소로 돌아와 씻고 고유준과 게임 한판 하고 부모님께 감사 문자를 간단히 보낸 후 곧장 잠이 들었다.
조금 더 특별하고 행복한 하루를 보낸 오늘, 내일도 분명 이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큰 행복 뒤 그에 상응하는 불행이 닥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바보같이 잊고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건 침대에 누워 눈을 감자마자 바로 알아차렸다.
17) 선택하시오
덜덜덜 온몸이 진동했다.
단순히 기분 탓으로 넘길 정도의 진동이 아니었다. 진동은 조금씩 거세지더니 이내 큰 흔들림으로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눈을 떴다. 숙소 침대에 누워 이런 진동과 흔들림,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리 없지 않은가.
“……허억!”
그리고 눈앞엔 평화로운 숙소와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순식간에 머리가 차가워짐을 느꼈다. 사색이 되어 아무 생각도,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입 밖으로는 그저 ‘아…… 아…….’ 하는 멍청한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이게 뭐지? 이게 진짜 뭐지? 무슨 상황인 거지?
꿈이라기엔 너무나 실감나고, 아니라기엔 갑작스럽고 뜬금없다.
-승객 여러분, 강풍으로 인해 기체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삐삐삐삐삐-.
-머리를 숙이시오! Head down! 발목을 잡으시오! Grab your ankles!
절대 잊을 수 없는 광경, 분위기, 냄새.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공포와 걱정이 뒤섞인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아 도무지 숨을 쉴 수 없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몸이 떨렸다.
-머리를 숙이시오! Head down! 발목을 잡으시오! Grab your ankles!
왜? 어째서? 왜 다시…….
누군가에 의해 머리가 숙여졌다. 그리고 곧 커다란 굉음, 충격과 함께 내 몸은 열기로 휩싸였다.
“아아아악!!!!”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소리쳤다. 그 순간 온몸의 고통이 깨끗하게 사라지고 주변이 조용해짐을 느꼈다.
죽은 건가? 아니 죽은 건 아니었다. 몸 아래서 느껴지는 눅눅한 이불의 감촉. 참으로 오랜만에 맡아 보는 곰팡이 냄새.
난 다시 눈을 떴다.
“……시발.”
오랜만에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눈에 보이는 곰팡이가 핀 천장은 분명 회귀 전 내가 살던 원룸 천장이었다.
몸을 일으키자 얼굴부터 쇄골까지 피부가 당겨 왔다. 이 느낌 또한 무척 잘 아는.
시발, 이거 진짜인가? 정말 전부 다 꿈이었다고? 과거로 돌아갔던 것과 데뷔, 첫 콘서트 전부?
“시발.”
분노가 차올랐다. 내가 미친놈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한테 그렇게 행복한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도대체 뭘 믿고 허상을 믿었던 건지.
모든 게 허상이었다.
“진짜 다 없던 일이라고? 진짜?”
크로노스도, 콘서트도, 가수 서현우도.
그럴 수가. 그간의 희망과 노력들이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다.
신이 있다면 도대체 나를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느냐고 묻고 싶었다.
크로노스로서 생활했던 날들이 꿈이었다면 차라리 그냥 영원히 꿈속에서 살고 싶었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욕만 지껄이고 있을 때 갑자기 내 눈앞에 이상한 창 하나가 떠올랐다.
[꿈은 아니지, 멍청아.]
[두 번째 조건 : 극복하라] 완료
상태 이상 : 기억상실이 해제되었습니다.
홀로그램 같은 창 속에 적힌 글자가 차례대로 올라왔다.
글을 눈으로 읽어 내리는 순간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뭔가 이상해.’
모든 상황이 이상했다.
단순히 모든 게 꿈이었다고 단정 지을 수 없을 정도로 나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 순간 홀로그램 창의 텍스트가 한번 더 바뀌었다.
[세 번째 조건 : 선택하라]
-조건을 완료하기 전까지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세 번째 조건?”
뭘 했다고 첫 번째, 두 번째도 없이 세 번째 조건이지? 선택하라는 건 무슨 뜻이지?
알고 있는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창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임은 분명했다.
내가 미친 게 아닌 이상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 크로노스의 생활이 전부 꿈일 리 없다.
‘그건 절대 꿈이 아니었어.’
그러나 나 혼자 꿈이 아니었다고 발버둥 쳐도 바뀌는 건 없었다.
그저 원래 내 삶과 같은 일상이 계속되었다. 한동안 잊었던 트레이너 생활, 피부가 눌어붙어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목 근육, 치료비로 끌어다 썼던 빚과 어두운 방, 그리고 가족, 멤버들과 스스로 쌓은 벽까지.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 * *
[세 번째 조건 : 선택하라]
“…….”
이게 뭘까. 뭘 선택하라는 걸까.
글자는 마치 얼른 의미를 알아차리라는 듯 수시로 눈앞에 나타났다.
이곳에 돌아온 이후 꼬박 하루, 밤새도록 고민해 보았지만 역시 뭘 선택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답도 없는 상황에서 이따금 내 얼굴을 보게 되면 깜짝 놀라기 일쑤다. 몇 년간 이 얼굴로 살아왔는데 잠깐 원래의 얼굴을 되찾았다고 그새 까먹은 모양이다.
그리고 난 다시 YU의 트레이너로 돌아왔다. 분명 크로노스였는데, 무대에 서는 가수였는데 원치 않게 강등된 기분이라 굉장히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곳은 크로노스가 없는 세계였다.
“현우 씨?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내 앞에 커피가 들이밀렸다.
고개를 들자 지혁 형이 미소 지으며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하려다 행동을 멈췄다.
“커피 받아 주세요. 아, 혹시 자판기 커피는 안 드시는 분?”
“아니요.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지혁 씨.”
지혁 형은 몹시 사무적인 태도로 날 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YU에 근무하게 되었을 때쯤 하이텐션은 이미 데뷔해 단독 콘서트를 여는 인기 그룹이었다. 내가 데뷔한 아티스트의 연습 지도를 맡은 건 온세네 그룹 크라운이 유일했으므로 지혁 형과의 친분은 없다.
그냥 오다가다 인사하는 정도.
지혁 형은 그저 지나가다 아는 얼굴이 침울해 있으니 말을 걸어 본 모양이었다.
“별일 아니면 됐고요. 그럼 전 이만.”
딱히 나에게 관심이 없는 모습, 내가 알던 지혁 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묘했다.
관계가 확연히 달라진 사람은 지혁 형만이 아니었다.
날 선생님으로 부르며 어려워하는 온세, 시도 때도 없이 오던 연락이 잘 지내냐는 조심스러운 안부 인사로 바뀐 크로노스 멤버들, 그중에서도 거의 남이 된 윤찬이, 연이 전혀 닿지 않은 수환 형과 태성 형, 아마 단단히 벽을 치고 있을 가족들까지.
나는 도무지 이 관계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하아.”
어쩌겠는가. 이 관계는 다름 아닌 내가 만든 결과물이다.
난 지혁 형이 주고 간 커피를 멍하니 바라보다 일어났다.
‘퇴근하자.’
다시 크로노스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어 봐야 비참해질 뿐이었다.
[세 번째 조건 : 선택하라]
-조건을 완료하기 전까지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시야 구석 텍스트창이 떠올라 내가 무언가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무슨 말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 * *
집에 도착하자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가 이런 환경에서 살아왔단 말이야?’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크로노스의 좋은 숙소에 살다 이곳에 오니 어떻게 여기서 살았나 싶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불을 켜고 방으로 들어오자 부엌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인기척에 멈춰 선 채 기웃거리자 냉장고 문에 가려져 있던 사람이 일어나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어쩐지 나와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그, 저, 너희 엄마가 반찬이라도 두고 가라고 해서. 네가 문을 열어 두고 갔더라고. 그래서 네가 문 열어 준 줄 알고 들어왔는데, 멋대로 들어와서 미안하다.”
“아, 문.”
크로노스 숙소는 도어 록으로 되어 있어서 열쇠로 잠가야 한다는 걸 잊어버렸다.
난 그제야 내가 이 원룸에 틀어박힌 이후로 부모님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걸 떠올렸다.
그래서 이렇게 눈을 못 마주치시는 거구나. 크로노스 시절 아버지의 얼굴이 묘하게 오버랩돼 마음이 너무 아팠다.
“현우야, 냉장고에 반찬 넣어 뒀으니까 먹고, 다음엔 꼭 연락하고 오마.”
아버지는 도망치듯이 나를 스쳐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다 멈칫, 날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얼굴 봐서 좋다. 언제든 연락하고. 그, ……쉬어라.”
현관문이 닫혔다. 난 이미 꽉 닫힌 문을 바라보며 울컥 치밀어 올라오는 분함을 삼켰다.
크로노스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난 아버지의 저런 표정을 볼 여유가 없었다.
한참이나 현관문을 바라보다 뒤돌아섰을 때 또 한번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바로 휴대폰이 울렸다.
-집에 있냐
고유준의 문자였다. 문밖의 누군가도 고유준인 모양이었다.
또 한번 진동이 울렸다.
-그냥 너랑 술 한잔 하고 싶어서 연락해 봤다. 집에 없으면 됐어.
문밖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난 예전 고유준의 문자에도 제대로 답한 적이 없었다. 아예 만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건 방송국에서 우연히 만나 밥을 먹은 거지 개인적인 연락은 거의 하지 않았다.
고유준이 돌아간다.
어차피 마음도 붕 떠 있는 마당에 이대로 그냥 보낼까 하다 다시 휴대폰을 켰다.
-술 한잔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