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한번 아이돌-391화 (391/475)

18) 레드루주아 (8)

“연습량을 줄여 달라는 말은 실수하지 않은 멤버만 할 수 있어요. 그런 의미로 주한 형과 유준 형에게 발언권은 없습니다.”

진성이가 단호하게 말하며 콧바람을 불었다. 확실히 주로 연습 시간이 늘어난 주원인은 주한 형과 고유준이었기에 그 말을 잘하던 주한 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당하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주한 형, 우리 둘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니까? 총대는 서현우가 멨어야 해.”

고유준이 주한 형에게 속삭이듯 작게 중얼거렸다.

“주한 형은 실수하는 모습이 본인 방송국 직캠에 찍히는 게 나아요, 아님 나랑 같이 새벽까지 연습하는 게 나아요?”

주한 형은 잠시 고민하더니 깔끔하게 납득하고 정면의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어? 그럼 이 안건은 없어진 거야? 연습량은?”

“형?”

“자, 다음 안건은요!”

분명히 연습량을 줄이자는 안건은 주한 형뿐만 아니라 진성이를 제외한 멤버 모두가 바랐던 것이고 주한 형이 총대를 멘 것뿐이었는데.

웬일로 제대로 된 반박을 한 진성이에게 그토록 말발 좋은 주한 형은 약점 잡힌 사람처럼 입을 틀어막힌 채 서둘러 주제를 넘겨 버렸다.

진성이는 카메라에 대고 승리의 브이를 그렸고 주한 형은 큐카드를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좀 더 연습해서 정진한 다음 다시 한번 도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크흠. 자, 다음! 얼른!”

주한 형의 요청에 천장에서 다급히 현수막이 내려왔다.

[크로노스 첫 예능의 이름과 앞으로의 방향성을 논의해 주세요!]

“이건 우리 제작진분들의 안건입니다. 우리들의 첫 예능 이름과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 멤버 모두 의견을 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아아, 이래서 예능 이름을 안 알려 준 거였어?”

고유준이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댔다. 아까부터 답답하게 ‘크로노스 예능’, ‘우리들의 첫 예능’ 등의 수식어로 부르길래 왜 그러나 했는데.

아무래도 우리보고 이름을 지으라는 빌드업이었던 모양이다.

“우선 누구부터 말해 볼까요. 이번에는 윤찬이에게 가장 먼저 발언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 저요?”

“네, 윤찬이는 비교적 이번 회의 참여율이 적었으니까. 영광스러운 크로노스 예능 이름! 무엇이 좋을까요?”

주한 형의 물음에 또르르 윤찬이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서 머리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게 반대편에 앉은 나에게까지 보일 정도였다.

“……이 침묵 뭐야?”

“쉿, 조용히 해. 윤찬이 생각하고 있잖아.”

“맞습니다. 조용히 하세요, 고유준 씨.”

“아이, 방송에서 오디오가 비는 게 말이 됩니까? 방송을 위해 말한 거죠! 다들 뭐야. 좀 떠들어!”

지방방송이 계속되어도 윤찬이는 조용히 심각하게 한참 고민하더니 울상이 되어 말했다.

“저는 저희 예능 이름 하면 <크로노스 히스토리>밖에 생각 안 나요.”

“아.”

멤버 모두에게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우리들의 진짜 첫 예능이었던 <크로노스 히스토리>.

유넷에서 우리들의 그룹 이름과 경연에서 사용했던 오리지널 곡 제목을 합쳐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솔직히 <크로노스 히스토리>만큼 딱 맞는 이름도 찾기 힘들 것 같은데.

“그럼 그것처럼 이번에도 곡 이름에 빗대어서 뭔가 만들어 보는 게 어떨까요?”

진성이가 덧붙여 의견을 냈다.

“크로노스의 퍼레이드……? 아, 너무 거창한가.”

히스토리 외의 노래 제목을 붙이기엔…….

<퍼레이드>, <즐거울 락>, <환상령>, <블루 룸 파티>, <레드루주아>.

딱 붙는 제목은 나오지 않을 듯하다.

세트장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오디오가 비면 안 된다고 하염없이 멘트를 날리던 고유준도 조용해졌다.

뭐가 좋을까. 다른 그룹들은 어떻게 지었더라?

아는 건 알뤼르 형들의 ‘알뤼르 캠프’, 하이텐션의 누가 봐도 지혁 형이 지었을 법한 ‘텐션 높은 하이텐션’ 정도?

……솔직히 참고가 되는 이름들은 아니다.

“<크로노스 히스토리>를 그냥 이어 가는 건 안 되겠죠?”

“음…… 한번 물어볼게요. 그것 외에 다른 이름은요, 유준 씨가 말해 볼까요?”

“어엉…….”

고유준도 딱히 아이디어는 없는지 어벙한 소리를 내고선 잠시 고민하다 히죽 웃었다.

“근데 막 크게 거창하고 멋진 이름 안 해도 되지 않아요? 되게 단순한 이름도 좋을 것 같은데.”

“단순한 이름이 좋을 것 같다?”

고유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가지 예시를 생각해 봤는데 보통 예능은 거창한 제목은 안 쓰지 않아요? 좀 더 친밀하고 입에 딱 달라붙는 이름을 쓰지.”

“오, 괜찮은데? 예를 들어 어떤?”

나름 술술 의견을 내놓던 고유준이 뚝 조용해졌다. 그러곤 다시 히죽거렸다.

“거기까진 생각 안 해 봤는데~.”

그래도 고유준 덕분에 대충 어떤 제목이 좋을지 제목의 방향성 정도는 잡힌 느낌이다.

“형 말대로 거창한 제목 말고 되게 귀엽거나 쉬운 게 좋을 것 같아.”

“근데 쉬우면서도 약간 크로노스랑 연관 있는 이름.”

“주한 형, 크로노스가 꼭 들어가야 해?”

“타이틀에 크로노스는 무조건 들어가야 합니다.”

쉽고, 단순하고, 크로노스랑 연관 있는 제목.

뭐가 있을까?

“……흐음.”

한참 고민하다 결국 허심탄회하게 숨을 내쉬었다.

쉽고 단순한 제목을 지어야 한다면서 너무 어렵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살짝 머리를 비우고 아무거나 입에서 꺼내 보자.

“크로노스의 시간 이런 거 하면 안 돼?”

툭 꺼낸 말에 금방 부수 의견이 달라붙었다.

“아, 그런 쪽으로 단순하게 지어야 해?”

“주한 선생님! 서현우 의견이 너무 촌스러운데요!”

“현우야, 좀 더 생각해 볼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 예예, 아, 알았어…….”

역시 좀 그르치?

난 민망해 죽겠어서 그냥 엎드렸다. 생각나는 게 전혀 없는데 어떡해.

애초에 난 작명 센스가 없다. 지금이야 익숙해져서 귀엽다고들 하지만 예전 처음 우리 팬들의 이름 ‘고리’가 결정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라.

그때 촌스럽다며 깔깔 웃어 대던 고유준이 가볍게 툭 말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좀 더해서 ‘크로노스의 놀기 좋은 시간’. 나는 이거 괜찮은데?”

“놀기 좋은 시간? 흐음.”

주한 형은 성에 안 차는지 대답이 없다가 진성이에게서 ‘크로노스의 락앤롤 어때? 즐거울 락 섞어서!’라는 말이 나오자 더 지체하지 않고 ‘놀기 좋은 시간’으로 의견을 모았다.

“크로노스의 놀기 좋은 시간, 이건 제작진분들도 다 같이 투표할게요. 이 제목에 동의하시는 분들은 손을 들어 주세요.”

아무래도 이 멤버 구성에선 이 이상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을 거란 걸 깨달은 표정이다.

멤버뿐만 아니라 제작진 다수가 망설임 없이 손을 들었다. 애초에 제작진은 우리가 어떤 제목을 붙이든 동의해 줄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주한 형이 의사봉을 들었다.

“그럼 우리의 단독 예능 이름은 ‘크로노스의 놀기 좋은 시간’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땅땅땅!

의사봉을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세트장 안에선 어워드에서나 들을 법한 거창한 BGM이 흘러나왔다.

BGM은 어두워진 현장에 현란한 조명과 함께 한참이나 흘러나오다 주한 형의 지휘봉 신호에 조용해졌다.

“자, 그럼 예능 이름은 정해졌으니 다음은 앞으로 이 예능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논의를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크로노스 회의는 되게 오래 하네요?”

고유준의 말에 주한 형은 수긍의 지휘봉 휘날림을 보이곤 말했다.

“2회분 촬영이기 때문에 주제가 좀 많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주제니까 좀 더 힘내도록 하세요.”

그렇게 말하는 주한 형이 솔직히 더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데.

“전 완전 좋죠. 재밌는데?”

“크로노스의 놀기 좋은 시간은 어떤 예능이 되어야 할까요? 의견 있으신 분?”

주한 형의 시선은 이미 고유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고유준은 이번엔 별로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예능인 거 아니에요? 저는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나도 고유준의 말에 동조하며 덧붙였다.

“맞아요. 애초에 크로노스 회의로 시작하는 것부터가, 주제가 매번 바뀌는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매번 바뀌지만 그런 거 있잖아. 어떤 걸 해 보면 좋겠다, 이런 거?”

주한 형의 지휘봉이 다시 한번 고유준을 가리켰다. 고유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멤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곤 씨익 웃었다.

“평소에 절대 안 할 법한 걸 하는 게 좋습니다.”

“절대 안 할 법한 게 뭐야. 예를 들어 어떤 거?”

“뭐 체육대회나 무인도에서 일주일 살기나 서현우 연기시키거나 아니면 요리하거나 이런 거.”

“야, 중간에 뭐냐?”

연기는 뭔데 소름 끼치게. 내가 고유준을 툭 치며 묻자 고유준은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고리들 항마력 향상 차원에서? 그냥 멤버들끼리 드라마 한 편 찍어 보는 것도 괜찮겠고.”

“오, 재밌겠다. 그런 거 외에도 방탈출이나 길거리 공연이나 좀 리얼한 서바이벌 게임 같은 것도 했으면 좋겠어!”

“저는 멤버들끼리 수학여행 가 봤으면 좋겠어요, 캠핑이나. 바빠서 수학여행도 못 갔으니, 우리끼리 여행하는 것도 하고 싶고.”

예능 이름을 정할 때와는 다르게 여러 가지로 많은 의견들이 나왔다. 받아 적기도 벅찰 정도로 정말 많은 아이디어들.

의견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게, 개인 예능을 하기로 결정한 날부터 멤버 모두 이런 거 했으면 좋겠다, 저런 거 했으면 좋겠다, 평소 이야기하던 게 정말 많았다.

연기나 드라마는 평소 이야기하던 게 아니었지만.

이 많은 의견 중에 설마 연기를 뽑겠어? 주한 형은 내가 얼마나 연기를 못하고 또 부끄러워하며 하기 싫어하는지 아주 잘 아는데.

……아니 솔직히 주한 형이면 드라마 찍는 걸 하겠다고 할 것 같긴 한데.

난 조금의 불안함을 뒤로하고 말했다.

“담력 체험이나 공포 특집요.”

내 말에 신나서 이야기하던 진성이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에이, 형! 그런 게 어디 있어! 형은 하나도 안 무서워하면서! 그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네 네, 전부 알겠습니다. 다들 진정하시고 착석해 주세요.”

주한 형은 비즈니스적 미소와 함께 모든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여러분들의 고견 아주 잘 들었습니다. 듣기만 해도 재밌을 법한 아이디어들이 참 많이 나왔네요.”

주한 형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큐카드를 넘겼다. 그러곤 카메라 뒤 감독님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두 분 시선은 왜 교환하시죠? 감독님? 형?”

그러자 주한 형이 모든 것을 정리하듯 힘차게 말했다.

“여러분들의 의견을 모두 존중합니다. 그렇기에 적어도, 앞으로 많은 주제를 가지고 촬영에 임하겠지만 적어도! 여기서 나온 의견들은 언제가 됐든 무조건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주한 형이 진성이를 가리켰다.

“담력 체험.”

그러곤 나를 가리켰다.

“드라마. 그뿐 아니라 무인도, 수학여행 등등 전부요.”

“아, 나 이럴 줄 알았어!”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나와 마찬가지로 진성이 또한 울상이 되어 나를 노려보았다.

히죽이는 주한 형과 얄미운 고유준, 별생각 없이 하하 힘 빠진 웃음을 지은 채 손뼉을 치는 윤찬이.

“쉿, 이제 마무리해야 하니까 진성이, 현우 조용히 하세요. 이상으로 제3회 크로노스 회의는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잠깐만! 우리한테만 이러기야?”

그러든 말든 주한 형의 진행은 계속되었다.

“여러분, 저희 크로노스의 놀기 좋은 시간은 다음 주 이 시간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안녕!”

“안녕!”

주한 형, 고유준, 박윤찬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동시에 땅땅땅! 의사봉 소리가 회의의 끝을 알렸다.

어이없어. 벌써 부끄러워.

뒤늦게 고유준을 노려봤지만 고유준은 아는 척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진성이의 째림을 모르는 척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노려본들 이미 촬영은 끝이 났다.

“하!”

‘어쩔 수 없나 봐.’

그깟 연기 하면 되지. 민망함은 연대책임일 테니.

난 반쯤 체념한 채 멤버들을 따라 세트장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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