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피와 비명소리가 난무하는 혈전이었다.
비급을 가진 혈루마인을 둘러싼 사파와 마두무리들은 접근하는 모든 무림인들을 가차 없이 베어내었다.
그들은 혈루마인을 보호하는 것처럼 굴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후방에도 포위망을 두어 경계했다.
혈루마인은 가장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그가 출수할 때마다 매섭게 회전하며 날아가는 쌍환은 무림인들의 목을 베어내거나 치명상을 입히고 돌아왔다.
얼핏 보면 상황은 비급을 쥐고 있는 쪽이 유리해 보였다.
하지만 제3세력이 기울어진 저울에 추를 얹어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비급을 노리며 배회하듯 숨죽이고 있는 무리들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틈을 놓치지 않고 사파무인들을 협공하여 하나씩 목숨을 취해가고 있었다.
노련한 낭인과 살수들로 주를 이룬 그들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이대로라면 양패구상이다.
이곳에서 비급을 챙겨 나오는 데 성공한다 하여도 뒷일을 장담할 수 없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감히 본좌의 군림천하를 가로막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혈루마인은 허리 뒤에서 한 쌍의 쌍환을 하나 더 꺼내 들었다.
한 손에 두 개씩, 총 네 개의 환을 쥔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양손을 크게 휘둘러 모든 쌍환을 한 번에 쏘아 보냈다.
20년 전 무림을 공포에 떨게 했던 혈루마인의 성명절기 혈혈난무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촤르르륵!
"끄아악!"
마구잡이로 사방을 누비는 환들은 경로에 있는 모든 이들의 살갗을 할퀴며 끝없이 질주했다.
그는 두 개의 환이 돌아오면 환의 손잡이를 잡아채 몸을 회전시켜 곧바로 쏘아내었다.
그렇게 네 개의 환은 혈루마인의 손에 한순간 머물렀다 다시 먹이를 찾아 비상했다.
이기어환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신기에 가까운 그의 무공에 이곳에 있던 무인들은 아비규환이 되어 네 개의 환으로부터 몸을 피하기 급급해졌다.
어느 정도 무공 경지를 이룬 무인들은 간신히 환을 쳐내거나 아슬아슬하게 피해냈지만, 대부분의 이들은 목숨을 달리하거나 치명상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위력적인 혈혈난무에도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으니, 바로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멈추시오 혈루마인! 내 부하들도 당신의 환에 죽어 가잖소!"
일단 혈루마인에게 협조하여 그를 둘러싸고 등을 보이고 있던 사파무인들의 피해가 특히 극심했다.
그러나 혈루마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환을 날려 보냈다.
혈루마인에게 협조한 사파무리의 대장, 거환도 장소는 자신에게도 날아오는 환을 칼로 쳐내고는 춤을 추듯 혈혈난무를 시전 중인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더 이상 부하들이 그의 공격에 쓰러져가는 걸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다.
등 뒤에서 거대한 환도를 치켜세우고 찍어내려오는 장소의 기습에 혈혈난무를 멈춘 혈루마인의 손이 장소의 손목을 붙잡아 공격을 막아내었다.
"배신을 하다니!"
"배신은 당신이 먼저요! 네놈의 혈혈난무에 벌써 열이 넘는 부하들이 죽었다!"
"어리석은 놈, 거사를 도모하는데 사소한 희생 따위에 연연하다니, 넌 처음부터 함께 하기엔 그릇이 글러 먹은 놈이었구나."
그리고 손목을 붙잡은 혈루마인의 손이 검게 변하더니 장소의 손목이 썩은 나무처럼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으윽, 흑수마공! 실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크하핫! 검제 놈을 피해 20년 동안이나 치욕스러운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내가 그동안 놀고만 있었는 줄 알았더냐."
귀신같은 쌍환술을 가졌지만, 근접전에서는 같은 경지의 고수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혈루마인이었다, 혈루마인은 오래전에 정도맹에 쫓기는 흑수마공을 지닌 마두를 구하는 척 기습으로 죽여 버리고 그의 흑수마공을 갈취했었다.
그리고 은거하는 동안 흑수마공을 대성하고 때마침 삭풍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기회라 여겨 다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본래 검제 그놈의 목을 비트는 최후의 순간까지 아껴두려 하였지만, 특별히 네놈에게 먼저 하사해주마. 죽어라 잡졸놈아!"
장소의 두꺼운 손목에 뼈가 드러나며 완전히 비틀어졌다.
하지만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아낸 장소는 기어코 혁대에서 단검을 꺼내 들어 혈루마인의 목을 향해 횡으로 그어버렸다.
장소의 초인적인 인내심과 한쪽 손목을 대가로 이루어낸 반격이었지만 혈루마인은 간단히 몸을 뒤로 젖히는 것으로 피해내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탓에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고 가슴팍에 얇은 자상을 남기고 말았다.
수많은 싸움에서 살아남은 혈루마인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상처였다.
"하하하! 가소롭구나!"
마침 돌아오는 환이 장소의 등을 할퀴고 지나갔다.
악! 소리를 지르며 쓰러지는 그의 목을 검은 손으로 잡아 비틀었다.
거품을 물며 눈이 뒤집히는 와중에도 장소는 희열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크큭, 당신은 이제 삭풍을 얻지 못해. 지옥에서 기다리마."
이제야 도착한 네 개의 환을 모두 거두어 손목에 건 혈루마인은 곧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독기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놈, 독을 발라뒀었구나! 해독제를 내놓아라. 해독제를 내놔!"
하지만 이미 검게 변한 목과 함께 숨이 끊어진 장소는 아무리 쥐어 잡고 흔들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재빨리 그의 품을 뒤졌지만, 해독제로 보이는 물건을 잡히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장소의 부하들로 표적을 옮기려 했지만, 장소의 손목이 검게 변하는 순간 벌써 달아난 후였다.
장소는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혈로 마임을 기습했으나, 그의 부하들은 장소가 목숨을 잃는 순간에 망설이지도 않고 도망쳐 버린 것이다.
"으악!"
분노한 혈루마인은 장소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리고, 비로소 승기를 잡게 된 공동과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미소를 지으며 혼자가 된 혈루마인을 향해 포위망을 좁혔다.
"곧 독으로 자멸할 테니 섣불리 덤비지 말고 진을 펼쳐라! 놈의 흑수마공에 붙잡히면 살을 잘라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역시 지략의 제갈세가답게 현명한 판단을 내린 그의 명령에 혈루마인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는 이제 정파무인들을 향해 제안했다.
"내게 해독제를, 아니 길만 터주어도 10년 후에 모두 갚아주마. 제갈세가는 무림일세가가 될 것이며 공동은 무림 최고의 도가문파로 군림할 것이다."
그의 절박함을 느낀 공동의 도사는 껄껄 웃으며 조롱했다.
"틀렸소 혈루마인. 당신은 10년 후가 아니라 반 시진 후에 시체가 될 것이외다. 그다음 삭풍은 정도 무림의 품으로 안전히 돌아갈 것이오."
"아까는 남궁세가의 품으로 운반한다 하더니, 이제는 정도 무림의 품으로? 이놈들, 벌써 네놈들끼리 삭풍을 나누기로 합의를 보았구나. 끌끌, 정도라는 놈들이 다 그렇지. 들어라. 만약 네놈들이 길을 비키지 않는다면 나는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과 동귀어진 하겠다. 내가 못 할 거 같으냐? 아니, 죽음을 각오한다면 네가 말한 반 각이면 충분하다."
허언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스무 명 남짓 남은 공동의 도사와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모두 죽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내공으로 억제 중인 독이 심장으로 퍼져 피를 토하고 죽게 되겠지.
그리고 승냥이처럼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저 하찮은 것들이 삭풍을 가져갈 것이다.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무려 20년이다.
20년 동안 치욕을 참아가며 복수의 칼날을 갈고 참아왔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런 변방에서 죽어버린다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혈루마인의 칠제에 대한 증오는 비급이든 목숨이든 둘 중 하나를 포기하기엔 너무 거대했다.
"끌끌끌, 그렇다면 네놈들이 그리 원하는 비급을 없애버리는 수밖에. 반 각이다! 반 각 후엔 내 흑수마공으로 비급을 썩은 종이뭉치로 만들어버리겠다. 나는 어차피 죽는다. 내게 덤비는 놈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숨통을 끊어버리겠다! 허나, 운이 좋다면 너희끼리 싸워 살아남은 자는 내 시체에서 삭풍을 가지겠지!"
기회주의자들의 눈빛이 돌변했다.
반면, 정도무인들은 사색이 되었다.
혈루마인은 그의 악명답게 지독한 자였다.
그리고 지나치게 영리했다.
"비급을 노리는 다른 자들부터 제거해야 하오."
"제갈 시주의 말이 맞소이다. 저 들 또한 삭풍을 노리는 사파나 마두무리와 다르지 않구려."
살수, 표사, 낭인을 포함한 잡졸 무리들은 그들의 말에 코웃음 쳤다.
"우리가 마두와 다르지 않다고? 그건 너희들도 마찬가지잖아."
"흥, 어차피 비급은 하나야. 이보게 동도들! 누가 삭풍의 주인이 되건 일단 저 위선자들부터 없애버려야 하지 않겠나?"
"낄낄, 저 녀석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다닌 세월이 너무 길긴 했지. 도제의 삭풍으로 칠제의 시대를 끝내자!"
와아아!
한순간에 뜻을 맞춘 그들은 먼저 정도무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혈루마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저들끼리 싸우고 죽이다 포위망이 풀리면 그대로 달아날 생각이었다.
한편 이 모든 난장판을 지켜보던 적화는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한탄했다.
"끔찍해요. 저자의 세 치 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죽어야 하는 걸까요?"
술 한 모금을 넘기던 적이 말했다.
"자업자득이다. 욕망에 사로잡히지 아니하였다면 세 치 혀에 휘둘리는 일도 없겠지. 부질없는 일이로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에요. 칼을 쥐고 무림에 발을 들인 이상, 한 번이라도 천하를 꿈꾸지 않는 사내들이 얼마나 있겠어요?"
"하하! 그래. 그러나 천하란 무엇이냐. 일신의 무력으로 천하를 쥔다 한들, 진정 세상이 그들의 것이 된다더냐. 화야. 나와 내 벗들은 누구도 천하를 바라지 않았다. 겨우 그런 걸 위해 싸우지 않았노라. 하지만 어느 날 시대는 우리를 주인이라 칭하고 있으니, 천하란, 단지 늘 그 자리에 있는 장강에 이름을 바꿔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대의 주인은 그저 욕심을 부린다 하여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과거 중원을 찬탈하여 천하를 얻었던 북적의 황제조차 한 줌의 기마로 시작하여 백만의 대군을 휩쓸었던 위업을 이루었기에 인정받았을 뿐, 일신의 무력을 믿고 천하를 도모했던 자들은 대부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소녀, 할아버님의 말씀을 평생 교훈으로 삼아 간직하겠사옵니다."
"명심하거라. 이름 없는 황제는 폐허의 글귀로 남지만, 군자와 영웅은 죽어서도 천년을 살아간단다. 너는 천하를 가지려 하지 말고, 천하가 기억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거라."
"할아버님처럼요?"
"녀석아, 나 같은 늙은이를 누가 천년이나 기억하겠느냐?"
"흥! 강호가 할아버님을 잊는다면 저는 강호를 원망하겠어요. 할아버님께서는 최고의 영웅인걸요?"
적은 말 없이 웃어 보였다.
그는 다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정리해볼까.’
슬슬 지겨운 참이었다.
그러나 적이 의자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청아하면서도 강건한 음성이 일대를 울렸다.
"싸움을 멈추십시오!"
지붕 위였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위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휘황찬란한 달빛을 등지고 그들을 내려다보는 백의의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가 눌러쓴 죽립을 살짝 올리자 한 떨기의 목련 같은 고운 미모가 드러났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하얀 경장을 입고 검 한 자루를 늘어뜨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금방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를 발견한 이들은 신비롭고 아리따운 자태에 홀려있기보단 사색이 되어 겁에 질려 외쳤다.
"협나찰!"
‘호오?’ 적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를 관찰했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볼 때 지금의 무림에서 꽤 유명한 젊은이인가 보구나.
호기심이 생긴 적이 그녀에 대해 물어보려 고개를 돌리니 적화의 미간이 힘껏 구겨져 있었다.
"잘 아는 사이인가 보구나."
"무림에 천하의 척마대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답니다. 정도맹의 이사후 맹주님이 친딸처럼 아끼는 협객이에요."
오호라, 천곽의 손녀와 같은 아이구나.
그녀를 바라보는 남궁적의 시선에 호감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