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우리는 청두에서 비단을 실어 서역에 가져갑니다. 그곳에서 비단을 은과 보석으로 바꿔오지요."
"우와, 그러면 지금 수레에 실린 것들이 전부 은덩이들이란 말씀이세요?"
"으하하! 나도 소저의 말처럼 전부 은덩이들이면 좋겠소. 사실 열 수레 중 두 개만 은덩이들을 꽉꽉 실어 두었습니다. 나머지는 암염과 말린 고기와 양젖 따위들이죠."
"그걸 말해줘도 되나요?"
"그래야 도적들이 우리 수레를 노릴 때 대협들께서 나서 주시지 않겠소? 으하하!"
맹강은 적화와 죽이 잘 맞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적과 상아도 맹강의 말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큰 수레에 은덩이만 가득 실린 것들이 두 개라니, 수레 하나만 해도 성 하나에서 대부호로 떵떵거리며 살만한 재물이었다.
"한 번의 상행에 천금을 실어 나르는군. 내 비단상인들이 대단하단 소문은 들었지만 굉장하구료."
"노 강호께서 잘 모르시는구먼. 많이 남는 건 사실이지만 큰 금액은 아니라오."
"마차 두 대면, 적어도 은만 백관이 넘지 않소?"
"훨씬 넘지요. 이백 관도 되리다. 하지만 비단길을 걷는 일엔 사람값이 그만큼 든다오."
그의 말처럼 상단에는 수레의 양에 비해 말을 타고 있는 표사와 호위무사들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아 보였다.
"돈이 되는 만큼 무척 위험한 일이지. 나도 내 할아버지 때부터 물려받으며 길을 익히고 초원을 건너는 법을 배우지 못했더라면 감히 시도도 못 해 보고 고꾸라졌을 거요. 비단 상행에는 쟁자수의 몫도 은 한 관씩이외다. 그 정도 삯은 주어야 제대로 된 사람을 쓸 수 있소. 표사나 호위무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까 은 이백 관중 최소 백오십 관은 상행에 참여한 상단원들에게 급여로 지급한다는 소리였다.
나머지 오십 관 중 비단값을 빼면 남는 금액은 서른에서 스무 관 정도. 열 배의 이문을 남긴다는 비단상인들이었기에 이 정도라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잘못 알고 계신 점들도 있더이다. 우리가 비단길을 건너는 건 맞지만 차마고도를 건너진 않소. 거긴 운남을 거쳐 천축으로 가는 산행길이지. 거기다 비단을 가져갈 때 보다 천축의 귀물을 가지고 오면서 큰 이문을 남긴다오. 반면 이쪽은 초원길을 건너는 사람들이요. 비단에서 큰 이문을 남기는 것도 고도상인들과는 정 반대올시다."
"다니는 길도 이문을 남기는 방법도 다른 분들이었군요. 내가 상인에 대해서 무지하였소. 가르침에 감사하외다."
"무엇을, 이 맹강도 칼 밥 먹는 노 검객처럼 칼을 다루는 방법에 정통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말 밥 먹는 제가 상인에 대해 잘 아는 게 당연한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중원의 많은 이들이 고도상인과 비단상인들을 착각하고는 한다오. 으하하! 하긴, 알고 보면 다들 비단을 팔러 다니긴 하니 틀리지도 않았구먼."
무림인은 물론 일반인들은 알지 못할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특히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적화의 귀는 맹강이 비단상인에 관한 이야기를 풀기 시작할 때부터 연신 쫑긋거리기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상상 속으로 말 한 필에 의지한 채 넓은 초원과 뜨거운 사막을 건너는 여류 무사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비단을 노리는 도적들의 기습에 맞서 밤이 새도록 검을 휘두르고 하얀 벽돌로 지어진 서역의 궁전에 도착하면 양젖으로 담근 술과 잘 구워진 고기 한 상을 대접받는다.
표사와 서역의 상인들과 밤이 새도록 술잔을 나누고 상행을 위한 깃발을 짊어진 자신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적화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비단상인을 노리는 도적들이 많나요? 위험하다는 이야기는 수없이 들었지만 정말 그런지 궁금해요."
"말도 마시오, 소저. 북적들도 골머리를 썩인 흉노족들이 호시탐탐 비단과 은을 노린다오. 내 할아버지 때만 해도 세 번 상행을 나서면 한 번은 흉노의 마적들에게 약탈당해 빈털터리가 되는 비단상인들이 부지기수일 정도였다오. 하지만 이젠 그만큼 위험하진 않소."
"어째서요?"
"모두 칠제의 은혜 덕분이지, 당연한 걸 어찌 묻소?"
칠제의 은혜라는 말에 적화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적을 연신 힐끔거리는 그녀의 눈엔 자부심이 가득하다.
그녀가 단순히 칠제를 흠모하여 보이는 반응이라 생각한 맹강의 눈엔 그저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칠제께서는 무림과 강호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상인분들께도 그늘이 되어주셨군요."
상아가 보태어 말하자 맹강은 다시 으하하! 하고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었다.
"우리 비단상인들은 창제께서 만드신 사자기마군의 보호를 받소이다. 덕분에 감히 마적들이 비단상인들을 약탈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오. 그랬다가는 사자기마군이 그들의 부족을 찾아내어 쑥대밭으로 만들 거요. 실제로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소. 그 탓에 유목민들이 굶주리는 시기만 잘 피한다면 약탈을 걱정할 일이 없어졌다오. 고도상인들도 마찬가지. 염제께서 신교의 무사들을 풀어 운남에 산적들의 씨를 말리셨으니, 온 상인들이 칠제의 은혜를 입고 있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외다."
창제와 염제라.
친우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적이 그에게 물었다.
"칠제를 직접 본 적이 있소? 창제라든지 말이오."
맹강은 고개를 저었으나 곧 애매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 같은 장사치가 감히 뵐 일이 있겠소이까. 아니지. 뵈었군! 사십 년 전이오. 내 나이 열 살 무렵이지. 칠제께서 북적으로부터 중원을 구하고 안휘에서 돌아가신 영웅들을 위해 제사를 올릴 때 말이오. 천운이 따라 주었는지 나와 내 아버지가 사천에서 항주로 가던 도중 그곳에 있었소. 칠웅이 칠제로 불리기 시작한 그 영광스런 순간에 우리 부자가 있었단 말이오. 껄껄! 제사가 끝나고 삼일 밤낮으로 축제가 열렸지. 내 아버지께선 사천에서 가져온 술 스무 동이를 모두 축제를 위해 꺼내놓으셨소. 그때 꺼내놓은 술 스무 동이가 지금도 우리 가문의 자랑이외다. 선친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손주들에게 유언 대신 칠제를 위해 술 스무 동이를 보탠 일을 자랑하실 정도로 말이오!"
삼일 밤낮 동안 축제를?
적의 기억엔 없는 일이었다.
아마 그가 떠나고 난 후에 일어난 일이리라.
그런 자리가 있는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벗들의 곁에 머물렀을까 작은 아쉬움을 가져본다.
반면 상아는 칠제를 본 적 있다는 맹강의 말에 살짝 경계하며 말했다.
"그럼 칠제를 모두 뵈었나요?"
"아쉽게도 내가 그날 뵌 분은 여섯 분이셨지. 모두 선남선녀에 훤칠하신 것이 영웅다운 풍모 셨소. 왜인지 도제께선 계시지 않았는데, 아마 그 빈자리를 돌아가신 대모님께서 채워주시지 않았다면 온 무림인들이 그분을 찾아 나섰을 거요."
이어서 맹강은 그날 처음 얼굴을 드러낸 남궁대모의 자태가 뭇 강호남아의 가슴을 얼마나 설레게 하였는지, 또 최근에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슬퍼하였다는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잠깐만요 맹 대인. 그 얘기는…."
상아가 서둘러 화두를 돌리려 나섰다.
남궁대모의 이야기에 적화와 적이 침울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불쑥 예상치 못한 변수가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여기 소저께선 젊은 날의 대모님과 무척 닮은 것 같소이다."
헙! 적화의 얼굴에 낭패가 어린다.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적에게 어떡하냐고 눈빛을 보냈다.
적은 껄껄 웃으며 태연스럽게 말했다.
"내 손녀딸이 훗날 남궁대모와 같은 여걸이 될 거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으냐?"
"그럼요, 소녀도 대모님과 같은 여걸이 되길 소원한답니다."
맹강은 두 조손의 장담에 놀란 척 눈을 크게 뜨더니 마주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이 조손 관계였군! 나란히 정도맹의 협객들이시니 대단하구만, 이보시오 소저, 혹 마음에 둔 사내가 있소? 내 손자 놈이 이제 혼자 상행을 이끌 만큼 장성하였는데, 인물이 좋아 성도에서 꽤 인기가 있다오."
"어허, 이 아이는 아직 한참 이르니 거두어 주시겠소?"
"농담이오, 농담! 으하하! 내 말하고 보니 칠제 중 여섯 분을 뵈었건만 도제만 뵙지 못했구먼, 궁제께서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신 탓에 다들 다섯 분만 뵈어도 천운이라 했거늘, 내 마지막 도제까지 뵙게 된다면 내 아버지의 술독만 한 자랑이 될 텐데."
지금 옆에서 말을 몰고 계십니다만, 적화가 숨죽여 쿡쿡 웃었다.
그리고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중원에 도제를 뵈신 분이 없지요. 북적의 황제를 처단하고 곧바로 은거에 들어가셨으니까요."
"내 괴상한 소문을 듣게 되어 하는 말이오. 삭풍을 노리던 마두와 잡졸 무리들이 말하길, 삭풍이 아니라 도제께서 직접 강림하셨다는 헛소리를 하고 다닌다 하니, 혹시 소문이 진실이라면 내게도 기회가 있지 않겠소이까?"
"소녀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오! 그렇군, 당사자인 한 대협께서 가장 잘 아시겠구려. 그곳에 진정 도제가 계셨소?"
잠시 그녀의 눈이 남궁적의 눈과 스친다.
상아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럴 리가요. 40년 동안 소식 하나 없던 분이 갑자기 나타나실 리 없잖습니까?"
"그렇지. 칠중도제라, 여섯 제는 역사가 되어 황제 못지않은 권위를 누리어 이름을 새기셨거늘, 도제만이 전설로 남겠구나."
내가 그럴만한 사람인가?
자신에 대한 평가가 너무 후한 게 아닌가 생각한 남궁적이 물었다.
"도제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오?"
그러자 맹강이 버럭 성을 내었다.
"이보시오 노 검객! 내 장사치를 욕보이는 건 참으나 감히 칠제를 모욕한다면 참지 않을 거요. 은혜를 입은 자들의 분노가 두렵다면 입조심 하시오. 최근 칠중검제를 최고라 받들며 다른 제들을 얕보는 멍청이들이 있다고는 들었소만, 부디 그대는 아니길 빌겠소."
"그렇군. 내 명심하겠소."
"도제가 계셨기에 대모님이 남궁을 일으키셨다오. 남궁이 없었다면 20년 전 대기근에 안휘의 십만 동도들이 굶어 죽었을 거요. 그뿐이겠는가? 반백 년 동안 이루어진 중원의 평화가 칠제의 은혜에서 비롯되었으니, 누구든 중원에서 난 쌀 한 톨이라도 입에 대었다면 칠제께 빚을 진 게지."
"빚이라."
적은 은혜를 갚겠다는 맹강의 말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베풀지 아니하였거늘, 이들은 내게 갚는다 하는구나. 노야, 당신이 말한 제 책임엔 이들 또한 포함된 것입니까? 제가 이들을 버렸다 말씀하고 싶으셨던 겁니까?’
남궁적은 마치 자신의 대변인이 된 것마냥 도제를 옹호하는 맹강을 쳐다보았다.
상인인 그가 무림인에게 이런 소리를 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일말의 걱정이나 두려움을 찾지 못한 적은 도리어 자신의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군요. 제가 도제로서 받고 있는 이 존경이, 바로 저의 빚이자 또 다른 죄였군요.’
"사람 된 도리로 어찌 받기만 하겠는가? 나 역시 빚이 있었구나."
남궁적의 빚을 자신과 같은 칠제의 은혜에 대한 빚으로 알아들은 맹강은 만족해하며 웃었다.
보통의 고집 센 노 강호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경우가 잘 없었으니, 남궁적 정도의 늙은이면 친구로 두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다.
겸사겸사 자신의 손자와 그의 손녀가 맺어져 사돈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는 욕심도 일었다.
그래서 그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자 그에 대해 물었다.
"이보시오 노 강호 나으리, 내가 어찌 불러야 하겠소? 올해 연배가 어찌 되시는가?"
"칠십이오."
이제 쉰 살인 맹강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런, 무림의 고수들은 나이를 반만 먹는다더니 나보다 훨씬 형님이셨군. 하지만 우리는 함께 칠제의 시대를 누려온 동도가 아닌가? 내 앞으로 노 강호를 형님으로 모셔도 되겠소이까?"
"하하. 그러시게 맹 아우. 내 이름은 별 볼 일 없는 사내이니, 자네처럼 훌륭한 거상에게 밝히기 부끄러운 점은 이해해주겠나?"
배분이 높은 무림인일수록 이름을 밝히기 꺼리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기에 맹강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노형이라 부르겠소. 조금 섭섭한 감이 있으니 상행이 끝나기 전까지는 몰래 귀띔해주시구려 으하하!"
그가 만나고 싶어 하는 도제와 호형호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까무러쳤을 것이다.
적화는 낯선 이와 쉽게 가까워지는 남궁적의 모습에 기뻐한다.
은거가 길었던 할아버님이라 내심 불안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하고 있던 것은 오히려 과거의 남궁적이었다면 맹강에게 날을 세우고 경계할지언정 말을 붙이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오랜 은거로 정에 목말라 있던 세월이 남궁적의 날을 무디게 만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